Steve, you
(이글은 6월 마블온(A4)에 나올 신간 책의 앞부분입니다
. 신간홍보용 맛보기입니다!:))
<5월 3일, 저녁>
어둡고, 조금 차갑다. 희미하게 외롭고.
스티브 로저스가 숲의 절벽 어딘가, 바위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어느새 수십 시간. 스티브는 그림자 속에서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언젠가 읽었던 고흐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멀리 오른편으로 늘어선 언덕들은 저녁 안개 속에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 푸른빛은 스티브에게 너무나 익숙한 어떤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오래된 것들을 떠올리니 눈앞의 모든 풍경이 순식간에 꿈의 파편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기억은 흐릿해지지 않는 걸까. 내 모든 기억들은. 스티브는 새벽에 출발할 때 싸온 휴대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 기계처럼 윗니와 아랫니를 순서대로 움직였다. 오랜 시간 꿈쩍도 않고 그림자 뒤에 숨어 동향을 살펴보았지만, 깊은 숲속에 숨겨져 있어 마치 요새 같아 보이는 연구소는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겉으로는 쉴드에서 만든 소규모 연구소 중 하나였지만, 그 속은 어쩌면 하이드라의 잔당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스티브는 요 몇 년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러한 쉴드의 건물들을 차례차례 부서뜨려 왔다. 스티브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 몇 년간이었다. 무너진 쉴드의 남은 뒷정리를 함과 동시에 모습을 감춘 오랜 친구를 찾아 헤매는 희망이 적은 여정. 그 끝조차 보이지 않는. 3개월 전, 함께 길을 떠났던 팔콘과도 일단 잠시 헤어져 각자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한 채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절은 어느새 만연한 봄이었다. 스티브는 봄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조차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뒤늦게나마 깊어진 녹음에 눈 안 어딘가의 짜르르한 아픔을 느끼며, 스티브는 그저 느슨하게 눈을 깜빡였다. 봄 냄새가 무겁게 스티브의 어깨를 눌렀다.
‘헬로. 여보세요? …내 말 들려, 캡틴?’
거의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휴대식을 우물거리다, 캡틴은 통신기를 통해 바로 귀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일순, 숨을 멈추었다. ‘스티브? 들려?’ 토니는 그저 같은 말을 또 한 번 반복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아무 의미 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행동을 했다. 몇 번 눈을 깜빡여도, 이것은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토니다. 틀림없는 그의 목소리야. ‘자네 거기 있나?’ 스티브는 침을 삼켰다. 침이 마치 고통 같았다. 토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하지만 스티브는 자신의 이 동요를 아무에게도, 특히 토니 본인에게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티브는 제대로 씹지 않은 휴대식을 삼켜버릴까 밖으로 뱉어버릴까 짧게 고민하다가, 곧 입안의 전부를 한꺼번에 꿀꺽 삼켜버리고 토니와의 통신을 연결하였다. “…잘 들리네. 스타크. 웬일인가.” 그리고 스티브는 결국 토니를 토니가 가장 싫어하는 말투로 불러버리고야 말았다. 스타크라니. 멍청이, 동요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놓고. 스티브는 스타크라고 내뱉자마자 그렇게 내뱉은 것을 후회하였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이제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스티브 혼자 가지게 된 일방적인 어색함을 토니도 눈치 채고 말았을까. 토니는 단지 조금, 아주 조금 말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아, 그래. 잘 들리네. 당신말대로.’
‘제법 멀리까지 간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 거기 어디쯤이야? 혹시 오늘 안에 타워로 돌아와 달라고 하면 그래 줄 수 있어?’
“오늘 안으로?”
‘그래.’
작년 토니 스타크의 주도아래 완성되어 현재 대부분의 ‘하이드라가 아닌’ 쉴드요원들의 출퇴근 장소가 되고 있는 어벤저스 타워. 스티브가 길을 함께 떠난 팔콘과 잠시 헤어진 이유도 타워를 건설하는 데에- 그리고 남은 쉴드요원들에게도-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타워에서는 매일이 바빴고 매번 새로운 일이 터져 정신이 없었으며, 그동안 스티브는 늘 토니와 함께 있었다. 토니는 매일같이 바쁘다고 투덜대면서도 스티브 앞에서는 환하게 웃곤 했다. 스티브는 토니가 그런 식으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계속 보고 싶어지는 웃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건 당신이 날 바라보면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웃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야. 토니는 스티브에게 그렇게 말했다. 결국 내 웃음이 예뻐 보이는 건 당신 웃음이 예쁘기 때문이라고. 스티브는 토니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토니는 알지 못해, 나에 대해서, 라고만 생각했다.
약 일주일전이었다, 스티브가 그곳을 도망치듯 나선 것은. 도망치듯 토니의 옆을 떠난 것은. 스티브는 이 숲속에 숨겨져 있는 의심스러운 형태의 작은 연구소에 대한 정찰을 하겠다는 명목을 가지고 홀로 이 먼 곳까지 왔고, 그것은 캡틴 아메리카의 단독행동에 대한 매우 타당한 이유를 부여해주었지만, 그러나 토니 스타크만이 길을 떠나는 스티브 로저스의 자신을 외면한 등을 향해 ‘도망치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토니가, 사실은 맞았다. 토니는 알고 있었다. 스티브가 그렇게 바삐 타워를, 그곳을, 토니의 옆을 떠나온 이유를. 스티브는 정말로 토니 스타크에게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스티브는 정말이지 그에게서 일단 멀어질 수만 있다면 그 핑계는 무엇이 됐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티브는 이렇게, 그에게서 바삐 도망쳐, 이 녹음이 짙고 저녁 안개 속에서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곳까지. 그런 마음에서부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이곳이 어둡고, 조금 차갑고, 희미하게 외로웠던 것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토니.” 좋아. 이번엔 제대로 토니라고 불렀다. 스티브는 괜히 입이 말라 혀를 내밀어 입술을 연거푸 핥았다. ‘토르가 왔어. 어벤저스의 도움이 필요하대.’ 그리고 스티브는 곧 이어지는 토니의 전언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그 놀람이 여전히 녹아있는 목소리 그대로 반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토르가?” 지구를 한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토르는 어벤저스 타워의 완공 이후에도 거의 타워에 들르지 않고 조용히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소중한 사람 옆에서. 그런 그가 타워에까지 와 친구들의 힘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분명 보통일이 아닐 것이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좀 더 상세한 것을 알려주길 기대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스티브의 생각과는 달리, 토니는 더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하여간 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돌아오면 자세한 걸 가르쳐주겠다고. 스티브는 아무도 보지 않고 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 무서워. 토니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도 여전히 모르겠는데. 스티브는 솔직하게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도저히 지금 토니 옆으로 갈 수가 없었다. 힘들었다. 그 스티브를 똑바로 바라보는 진한 갈색의 눈동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스티브는 마치 지금 눈앞에 토니 스타크가 서 있는 양 눈을 옆으로 피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래. 최대한 빨리 가지. 하지만 당장은 어렵겠네. 최대한 서둘러도 며칠 걸릴 거야.” 스티브로써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독하게 애매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그 단 며칠이 절실하였다. 조금이라도 오래 떨어져있으면, 당신을 향한 나의 동요도 조금쯤은 사그라지게 되지 않을까? 스티브는 토니앞에서 정말로 태연해질 수 있을 때까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스티브의 마음을, 토니도 분명 눈치 챈 것이 틀림없었다. 둘의 몸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있는 통신을 따라, 스티브 로저스의 귓바퀴 아래로 모이는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는 거의 아무 잡음도 섞여있지 않았고, 단지 토니가 토해내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렇군. 그래. 당신, 정말 어지간히 돌아오기가 싫은 거로군.’ 스티브는 토니의 목소리에서 절망을 읽었다. 절망, 아니 상심? 슬픔? 우울? 가슴 아픔? 외로움? 하여간 그런 것들을. 그리고 토니에게 그것들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스티브였다.
“아, 아니, 난… 그게, 지금 너무 멀리 와서.”
“…….”
“정말로 멀리 왔네. 바로 복귀가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자비스로 확인해보면 알지 않은가.”
‘됐어. 당신 마음 다 알았으니까.’
“읏, …….”
그리고 스티브는 그것이 못 견디게 미안했던 것이고, 그것에 너무나 큰 자책감이 밀려와 괴로웠던 것이고, 하지만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스티브는 더 이상 아무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토니는 두 사람 사이에 숨 쉬고 있는 팽팽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섭섭함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스티브의 가슴을 겨냥해 더욱 자신의 외로움을 던졌다.
‘이렇게까지 너무할 거라곤 생각 안했었는데. 스티브, 당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날피하고,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니….”
‘그래. 그거야. 제발 날 스타크라고 부르지 마. …날 피해도 좋으니까, 토니라고 좀 불러줘.’
…아니, 아니다. 날 피하는 것도 너무 괴롭네. 역시, 날 피하지 마. 피하지 말아줘. 토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아파. 지금 당신의 태도가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토니의 말 하나하나가 마치 비수 같았다. 스티브는 앓는 소리를 냈다. 토니는 스티브가 준 상처를 일부러 더 생생하게 스티브의 코끝으로 들이밀었다. 스티브를 자극하려는 토니다운 사나운 방법이었지만, 스티브는 그런 토니의 태도에 욱한 기분이 들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기분이 침잠해지고야 말았다. 스티브는 토니의 상처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피 냄새를 맡으며 그와의 통신을 반 일방적으로 끝내버렸다. 통신을 끊어도 여전히 토니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상처받았다고 숨기지 않고 말하는 토니가 스티브의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했다. 스티브는 지친 듯 몸을 허물어뜨렸다.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 그의 상처에서 나는 살아있는 냄새.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로저스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입으로 더 이상 상처주지 말라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토니. 나도 당신에게 상처주기 싫어. 당신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야.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마땅히 돌려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야. 당신의 사랑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지. 하지만 나에겐 그런 가치가 없어. 스티브 로저스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어. 당신이 사랑해 줄 만한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레방아를 돌자 스티브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꼭 감은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미 내려온 눈꺼풀 위에 더 어떡할 수도 없을 만큼 진한 주름 사이로 스티브의 70년이 아로새겨졌다. 70년 전의 스티브 로저스의 모든 것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왜 나는 어째서, 조금도 잊을 수가 없을까. 그 모든 것들을. 스티브는 지쳤다. 왠지 몹시도 지쳐, 이것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기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에도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월 4일, 새벽>
스티브는 얕은 잠이 들어 잠과 깸의 그 어딘가를 새벽 내내 더듬고 있었다. 그 경계선은 언제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그 날 아침도 그랬다. 아주 멀리서부터 내려온 산의 공기가 알갱이처럼 지상에 흩어져, 얕은 잠에서 덧없이 깨어난 스티브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도시의 꼭대기에 혼자 붕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의 아침은 새벽처럼 일렀고, 모닝커피는 안개보다 더 구름 같았다. 어벤저스 타워는 아침이 이른 스티브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자비스 덕분에 언제나 늘 새로운 커피가 커피포트에 채워져 있었고, 스티브는 눈을 뜨자마자 아무 수고도 들이지 않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스티브는 매일 커피를 마시기 전 자비스에게 하는 아침 인사를 그날도 어김없이 반복하였다. “잘 잤나. 자비스. 오늘도 고맙네.” 언젠가부터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토니는, 그날따라 자비스가 스티브에게 아침인사를 채 건네기도 전에 멋대로 스티브의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스티브는 오른손에 커피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고개만을 돌려 갑작스레 나타난 토니를 향해 아무 반응도 채 보이지 못하고 눈만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토니는 자비스에게 스티브 로저스의 방으로 통하는 모든 통신회로를 차단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한 후, 스티브의 방문을 거칠게 닫았다.
“…잘 잤나, 토니?” 토니의 험악한 안색이 지금 스티브에게 아침인사 따위를 받고 싶은 생각은 일체 없음을 어필하고 있었지만, 스티브로써는 그런 식으로 밖에는 달리 반응할 수가 없었다. 토니는 스티브의 침대위에 주저앉아 자기 머리를 감싸 쥔 채 한동안 허리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스티브의 어색한 인사는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버렸고, 스티브는 더 이상 토니에게 말을 걸 자신이 없어 그냥 침묵을 침묵대로 내버려두고 말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내가 위로를 해줄 수는 있을까. 스티브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었고, 점점 식어가는 커피의 향기만이 스티브의 목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렇게 5분, 6분, 어쩌면 7분. 또는 8분. 이윽고 고개를 든 토니 스타크의 조용하고 침잠한 얼굴. 외로움 속에 파묻힌 것 같은 창백한 눈동자. 그러나 그 눈동자는 선명한 결심으로 단호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곧 쥐고 있던 머그컵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이때, 스티브 로저스는 토니 스타크에게 고백을 받은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역시 그런 것 같아. 머그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그 위에 검은색의 커피물이 퍼져나가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머그컵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완전히 사그라졌을 쯔음 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니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고 담담하기까지 했다. “역시 그런 것 같아. 요 며칠 거의 자지도 않고 내 감정에 대해 계속 생각해봤는데, 결국 도저히 다른 결론은 내릴 수가 없었어.” 스티브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그저 웃었다. 머그를 떨어뜨린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없어보였다. “토니. 자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이런 이른 아침부터. 제발 농담은 좀 적당히 웃을 수 있는 걸로 가려서 해주게. 전부터 생각했지만 자네 농담엔 수위가 너무 없어서,” 그렇게 횡설수설, 되는대로 막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다가 스티브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게 된 것은, 마주친 토니 스타크의 갈색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 조용하고 침잠한 얼굴. 외로움 속에 파묻힌 것 같은 창백한 눈동자. 그러면서도 결심으로 단호하게, 스티브를 바라보며 호소하는 절박한 그 눈동자가. 그 눈 속에서 스티브는 결국 토니가 방금 한 말들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읽어내고야 만 것이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더 이상 농담이라고 토니의 말을 매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토니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를 외면하였다. 그리고 그때 토니는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스티브에게 전해진 것을 깨달았다. 이제 토니에게 ‘∼것 같아.’는 필요가 없었다.
“사랑해. 스티브. 진심이야. 내 마음을 알아줘.”
“토니, 그만하게.”
“그만 안 둘 거야. 그리고 난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되게끔 노력할 생각이야. 그러니 당신도 날 사랑하려는 노력을 해 봐.”
그리고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소 강압적으로 다가가는 토니와,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을 하게 되는 스티브. 괴로워. 그 장면을 다시 꿈속에서 보는 것은 너무나 괴로워. 그 날 스티브는 있는 힘껏 토니 스타크를 거부했고 자넬 사랑하게 될 리가 없어, 라고 외친 스티브의 말은 비수가 되어 토니의 가슴을 두동강 내고야 말았다. 상처받은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스티브는 꼭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닌데. 그런 표정 짓게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런 게 아니야, 당신의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야. 단지 내가, 내가, 나라는 인간이 과연 누군가와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싶어서. 누군가와 행복해져도 괜찮을까 의심스러워서. 난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내가 자넬 사랑하게 될 리가 없는 건, 나라는 인간에게 사랑이 남아있지가 않아서. 당신의 사랑이 잘못된 게 아니야. 사랑을 줄 상대가 잘못된 거야. 그리고 스티브는 빌었다. 자기가 더 이상 토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그래서 스티브는 더 이상 토니 옆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스티브 로저스는 도망치듯, 자비스가 찾아낸 쉴드의 또 하나의 비밀연구소로 떠나게 된 것이었고, 그래서 토니 스타크는 등을 보이는 스티브를 향해 ‘도망치는 거야?’라고 말한 것이었다.
도망치는 거야? 내 마음에서.
그래. 토니. 도망치는 거다. 적어도 옆에 없어야지만, 자네에게 상처주지 않게 될 것이니까. 사랑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꿈에서조차 바라지 못했다. 스티브는 꿈속에서도 황망히 고개를 내저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더 이상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악몽이 길어지면, 70년 전의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 스티브는 몸서리가 처졌다. 비록 괴로워도, 토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토니의 꿈을 꾸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죽음 같을까. 스티브는 몸부림을 치며 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귓가를 스치는 70년 전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티브의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캡틴 아메리카. 내가 그렇게 참으라고 했건만. 이렇게 멋대로 싸버리다니. 말 안 듣는 개에겐 벌을 줘야겠지…?”
“…흡!” 깨어나고 보니, 두 손이 허공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팔이 아플 정도였다. 스티브는 마치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고 있던 것에 간신히 해방된 사람처럼 거칠어진 호흡을 빠르게 반복했다. 그러나 아무리 숨을 내쉬어도 꿈속에서부터 묻어나온 온몸에 퍼져있는 불쾌감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눈을 떠도 눈을 감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주변을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스티브는 허공에 내저어 세상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 움직였던 두 팔을 그대로 양옆으로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져서 주변이 젖은 나뭇잎과 이끼, 숲의 냄새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곧 스티브는 자기가 연구소를 내려다보기 위해 고른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선잠에 들었었다는 기억을 어설피 되살렸다. 스티브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전체를 쓸어내렸다. 핏기가 가실정도로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있는데, 두 손바닥만이 축축해서 미끄러지는 감각이 더없이 불쾌했다. 스티브는 두 손바닥 위에 여전히 묻어있는 꿈속에서부터 시작한 이 불쾌감을 채 떨치지도 못하고 결국 양손을 끌어안았다. 토니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날 토니는 너무나 외로워보였고, 그를 외롭게 만든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이렇게 도망치고 말았다. 토니를 향한 죄책감은 그리고, 결국 스티브를 70년 전의 최악의 스티브 로저스와 재회하게 하였다. 꿈속의 목소리가 이렇게도 여전히 주변을 떠돌고 있다니. 그 남자의 목소리가. 스티브는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봄의 숲속은 전혀 춥지 않았는데, 스티브는 온 몸이 싸늘했다. 온통 주변이 싸늘해서 이대로 얼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스티브가 눈을 꽈악 감자, 눈 속에서 토니 스타크의 씁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토니. 이렇게도 나는, 아무가치가 없는 인간이야. 더러운 인간이야. 이런 인간이 태연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스스로를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라 소리 높이고 있으니, 이것보다 더 몹쓸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스티브는 여전히 제 몸을 더듬어대던 그들의 손바닥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 몸의 모든 감각이 고통스러웠다. 왜 기억이라는 것이 무뎌지지 않는 건지, 왜 몸의 감각이라는 것이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는 건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는 스티브 로저스가, 스티브는 정말이지 끔찍하게도 싫었다. 상처 주었으면서, 어째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걸까. 무슨 자격이 있다고.
<5월 5일, 아침>
스티브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단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팔다리의 근육을 풀어준 후, 숲속의 야생동물처럼 거의 소리 내지 않고 잽싸게 산을 타고 내려왔다. 하루를 꼬박 감시해보았지만 결국 연구소에 사람이 드나드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내부는 어떨까. 더 기다릴 것 없이 조사를 진행해나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티브는 연구소 내부로 향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연구소의 한쪽 벽에 기대어, 스티브는 생명반응이 있는지 더듬어보았지만 레이더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티브는 외벽에 있는 창문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과감히 부수고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하나가 부서졌음에도 외부에서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기가 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 연구소는 버려진 것이 분명해.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구소 내부는 숲의 밤보다 더 어둠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던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이미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갈라져 허물어진 벽, 엉망이 된 바닥, 쓰러져있는 다 낡은 책상들과, 슬쩍 훑어봐도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은 서류들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흩어져 있는. 스티브는 먼지가 쌓인 책상 위를 손으로 훑다가 곧 연구소 안쪽 깊숙한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안쪽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점점 버려진 장소라는 확신만을 더해줄 풍경이 펼쳐졌다. 혹시 난투의 흔적이나 사람의 시체라도 발견하지 않을까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연구소는 그저 더러운 채 깨끗할 뿐이었다. 쉴드의 정체가 밝혀지고 하이드라를 쳐부수는 일련의 과정이 벌어지기도 훨씬 전에 이미 버려진 장소임이 분명하다. 작은 연구소를 몇 십분 걸리지 않고 한 바퀴를 돌아 나온 스티브는 곧 그런 결론을 내렸다. 괜히 하루 동안 밖에서 노려보고 있느라 시간만 버렸군. 스티브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또 옆으로 엎어진 책상 위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마치 습관처럼.
“…?”
그러다 문득, 스티브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먼지가 쌓이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책상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빠르게 달려 다시 연구소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연구소는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과 다른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곳은 온 적이 없는데. 그리고 연구소를 밖에서 크게 한 바퀴 둘러본 스티브는 곧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밖에서 본 연구소의 크기에 비해 내부에서 한 바퀴 돌았을 때의 연구소의 크기가 미묘하게 작은 것이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연구소를 다른 곳에서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시감이 느껴졌던 거야. 스티브는 다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소내부에 숨겨진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마터면 못보고 놓칠 뻔했군.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연구소 내부를, 이번에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돌아다녔다. 곧 스티브는 연구소의 깊은 곳에서 한쪽 벽만이 다른 벽과는 다른 질감의 페인트로 칠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똑같은 색으로 칠해져있었지만 작은 균열이 존재하는. 스티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깊게 들이마신 숨, 짧은 기합과 함께 스티브의 단단한 오른 주먹이 벽을 내리쳤고, 연구소의 오래된 벽은 큰 굉음을 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중간생략)
스티브는 그대로 라이트를 놓쳤다. 라이트는 바닥에 툭 소리를 내고 떨어져 스티브의 발언저리를 데굴데굴 굴렀다. 스티브는 어둠속에서 희미한 현기증을 느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헐떡이기 시작할 때 쯔음, 그제야 자기가 지금 토하고 싶어진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몇 번 헛구역질을 해대도 역한 기운만이 입안을 맴돌 뿐 가슴속에 맺힌 것이 전부 토해내지지가 않았다. 제기랄. 젠장.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여기가 바로 그곳이었던 것일까? 설마 이 연구소에서 내가? 아닌데. 난 완전히 처음이었는데. 이런 곳. 하지만 아까 느꼈던 기시감. 언젠가 비슷한 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 비슷한 곳이 비슷한 곳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 장소였던 것인가? 나는 그 정도로 바보가 되어버렸나. 스티브는 사진을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하고 어둠속을 마구 더듬으며 서랍의 이곳저곳을 잡아당겼다. 무언가 더 남아있는 게 아닐까. 이곳이 그 남자의 관할인 연구소였다면 분명히 무언가가 더. 하느님. 하느님.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제가 당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곧 스티브의 행동이 서랍을 통째로 옆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어둠을 울리며 서랍은 와장창 소리를 내었고 스티브는 쓰러진 서랍의 온갖 곳을 정신없이 뒤지다가 어딘가에 발이 걸려 앞으로 엎어지고야 말았다. 스티브 정도나 되는 사람이 어둠속에서 당황하다 발이 걸려 넘어지다니,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무릎이나 팔 등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발치를 구르던 라이트를 더듬어 무너진 서랍 주변으로 다가갔다. 혹시, 또 무슨 사진 같은 게. 그 남자의 사진 같은 게. 아니면 그때 그 일의 자료 같은 것이. 그 일, 아아 제발 하느님, 바로 그 일의. 스티브는 서랍의 파편을 뒤지는 와중에도 몸이 떨려와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순식간에 전신이 오싹거렸다. 식은땀이 등에 흥건해 스티브의 감은 눈두덩 위에 금방 땀이 고였다. 스티브는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헤매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 뭘 찾고 싶은 거지? 아니, 찾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찾고 싶지 않아. 제발 아무것도 나오지 말아다오. 찾고 싶지 않아, 찾고 싶어. 아니 찾고 싶지 않다. 생각이, 기억이, 떠오르면, 스티브는 꼭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될 것이 뻔했다. 모든 이성이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 남자다. 스티브의 목을 타고 스멀스멀 소름이 밀려왔다. 몸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같았다. 그 얇은 입술. 진한 검은색 머리. 그 남자다.
“캡틴 아메리카. 내가 그렇게 참으라고 했건만. 이렇게 멋대로 싸버리다니. 말 안 듣는 개에겐 벌을 줘야겠지…?”
그 남자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서랍의 어딘가에 숨어 있었는가, 스티브는 결국 한다발의 서류뭉치를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절망이 스티브의 가슴 위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스티브는 거의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여 서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서류의 봉투를 열어보니, 안쪽에 있던 무수한 사진과 종이뭉치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스티브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으로 쏟아진 사진들을 바라보며 점점 눈의 초점을 잃었다. 사진은 거의 대부분 오래 되어 상자체가 뭉개져 있어 도저히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스티브는 알 수 있었다. 그 사진속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전부 자기 자신이었다.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흡…” 스티브는 숨이 막혀왔다. 기어코 귓가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조교도 거의 끝난 것 같군. 기분은 어때, 스티브? 아 물어봤자 의미 없었나?”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환청인 것을 알면서도, 스티브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뇌의 기록에서는 도저히 어떻게도, 도망칠 수가 없어. “당연히 좋겠지? 지금 자네, 너무 좋아서 거의 죽을 것처럼 보이는걸.” 살려줘. 스티브는 목 아래에서부터 막혀오는 숨구멍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목을 쳐들었다. 꺽꺽대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연거푸 목구멍 어딘가에서 반복되었다. 스티브는 귓가에 그 남자의 긴 혀가 닿는 감각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숨소리가 어땠는지, 그 남자의 뜨거운 타액이 어떤 식으로 귓구멍 안을 침범했는지, 입 속을 유린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 왜, 어째서. 어째서 이런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조금도 잊히지가 않는 건데. 왜. 왜 그래야 되는 건데, 왜. 그리고 스티브는, 70년 전 두 팔이 붙들린 채 몸을 떨면서 들었던 그 남자의 말을 오늘, 결국 또 듣고야 말았다. “축하하네. 자네는 드디어 남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도리를 적실만큼 음란한 개가 되었다네.” 그리고 과거에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말들도. “한동안 남자 맛을 못 봤지? 지금 굶주려 미칠 단계이지 않아? 캡틴 아메리카.” 아니야. 싫어. 싫어. 스티브는 귀를 막고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싫어. 살려줘. 주변에 흩어진 사진 속의 스티브 로저스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에게 매달린 채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있으리라.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스스로 엉덩이 구멍을 벌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겠지. 사진 속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스티브는 그때의 기억들이 몸의 표면 위로 재현되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이. 피부를 만져대는 감각이. 혀로 모든 곳을 핥아대는 그 감각이. 싫어. 살려줘. 싫어. 그리고 스티브가 살려줘라고 내뱉을 때마다 오히려 몸이 떨려오더니, 스티브의 아랫배 쪽에 뜨거움이 몰려와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 그 익숙한 감각. 그 몸이 흥분으로 뜨거워지는 단순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사슬. “싫어, 이거 왜, 왜….” 이게 왜, 어째서. 스티브는 덜덜 떨면서 자신의 가랑이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중량을 달리한 채 불룩 튀어나온 스티브의 성기가 어느새 끝에 액을 흘려 유니폼을 적시고 있었다. 스티브의 눈이 충격으로 커다랗게 된 채 곧 안쪽에서부터 새빨갛게 충혈 되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변명이 정신없이 스티브의 입 밖으로 흘렀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건 아니야, 나, 난 결코… 결코 이런 걸 바라지….” 결코 이런 걸 바라지 않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 몸은. 스티브는 덜덜 떨면서 두 손을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몸이 뜨겁다. 싫어. 몸이 뜨거워. 가랑이 사이가 점점 불이 고여 손이 스칠 때마다 아려왔다. 스티브는 허벅지를 꽈악 다문 채 저도 모르게 다리를 배배꼬면서 가랑이 사이에 밀어 넣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싫어. 이러고 싶지 않은데. 스티브는 다시 이마로 바닥을 꽝꽝 내리쳤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아무리 이마가 얼얼해질 정도로 머리를 움직여도, 몸의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지만 이제 어쩔 수도 없었다.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스티브는 절망했다. 이제는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으리라.
“…니.”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스티브는 꽈악 다문 이사이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 순간에 스티브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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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마블온에 나올 소설 신간 'Steve, you '입니다. :>
신간은 수량조사도 안하고 ㅋㅋㅋ 대량으로 많이 뽑을거라 ㅋㅋㅋ 이런식으로 홍보하려구요 ㅋㅋㅋ
토니스팁이며 모브스팁, 다수x스팁이 존재합니다. 19금입니다.
스티브의 과거 날조주의. 짠내주의. 스티브가 웬 모브한테 걸려 조교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컬러표지, 표지미포함 78페이지의 중장편이 되었습니다!
아직 가격은 미정이구요, 미정인데 대충 8000원대가 되지않을까???합니다!
행사 후 통판또한 할 예정이에요~. 많이 기대해주세요 ㅋㅋㅋㅋㅋ
표지업뎃했어요!!!!!
표지는 나의 존잘님 님비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ㅜㅜㅜ 아름다워~~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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