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스팁] Captain's order 15. 06. 13
Captain's order
스티브 로저스의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언제나 조금씩 검은색 부위가 열려 있는 듯 팽창해 있다.
그리고 그의 속눈썹은 진한 갈빛으로 숱이 많아서, 그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 배너는 그의 눈동자를 대부분 보지 못한다. 속눈썹이 그의 눈동자를 가리는 것이다.
당연히 토니 스타크의 제안을 스티브 로저스가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 사이에서 배너는 입을 꾸욱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배너는 다소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어 마치 두 사람의 말다툼과는 상관을 하고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배너의 그런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당연한 거였다. 그는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배너에게 가장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두사람의 반목이었다. 진정으로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사상을 반목하는 행위. 둘의 싸움은 끊임이 없었고, 배너를 가운데두는 오늘의 언쟁은 특히나 그 강도가 심했다. 그 틈바귀에 끼어 배너는 단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평소에 즐기는 클래식의 흐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배너는 토니의 제안을 이해하고 있었고, 스티브의 강력한 거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한 배너의 심정은 스티브의 의견쪽으로 끌리고 있었고, 그러나 필요성은 토니 스타크의 의견에 더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너는 그래서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단지 어서 둘의 상황이 정리되어 어느 하나로 결정된 흐름을 빨리 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이에 둔 싸움은 끔찍했다. 나를 자극하는 단어를 두 사람이 너무 쓰지 말아줬으면. 배너는 귀를 틀어막고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입안에서 중얼거려보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하지만 베로니카 프로토타입의 전투실험은 당연히 해야하는거라고!!" 토니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 반동에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그 큰소리에 배너의 스트레스수치가 더욱 치솟았다. 배너는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며 몸을 더욱 움츠렸다. 스티브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들수록 배너는 오히려 으르렁대는 숲 속의 맹수들의 카리스마가 떠올랐다. "그저 살상무기의 성능실험 하나만을 위해 배너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게 하자고?" 배너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목 언저리에 소름이 파다닥 돋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둘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배너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안경위로 젖은 숨이 차올랐다. 나타샤. 클린트. 아무라도 좋으니까 누가 나 좀 도와줘요. 배너는 꿀꺽 침을 삼켰다.
토니와 배너가 힘을 모아 완성한 베로니카는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는 강한 존재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배너는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위성가까이에 쏘아올려진 것 중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강한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위성보다 더 높게 쏘아올려지던 그 날, 배너는 저것을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저것이 '지구 밖'의 존재를 상대한다면 그 확신은 의미없는 것이 될 것이지만, 하지만 여전히 지구는 지구 밖에 있는 그 무언가보다 지구 안에 있는 것에 더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 안'에 존재하는 것중 가장 지구에 위협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브루스 배너이다. 안경테너머의 흐린 눈동자를 빛내며 배너는 자조하고 있었다. 토니도 그런 배너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너는 아름다운 베로니카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네가 지구를 구해줘. 나에게서. '헐크 버스터'. 너에겐 그런 이름 또한 어울릴 거야. 프로토타입을 조절하면서 토니가 전투실험을 해보지않겠느냐고 눈을 빛내며 배너에게 제안했을 때, 그리고 배너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모든 실험은 필요한 것이다. 그 무기를 조정하는 자가 그 무기의 성능을 정확히 모르고 있어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당연히 '그 괴물'을 이겨야 한다. 헐크를 말이다. 배너는 뺨을 구르는 식은땀을 훔쳐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또다른 나를 이길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토니 스타크는 베로니카를 데리고 실험을 하기 위해 브루스 배너로 하여금 '헐크'로 변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토니는 이때를 위해서 타워에 그 어느때보다 단단한-전에 로키를 잡아넣은 것과 마찬가지의-방어체계의 방을 구축해냈다. 배너는 그 방을 돌아보며 충분히 안심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배너는 헐크때의 기억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지만 단편적인 영상이나 감정들은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더욱 분노를 느낄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낸다. 어느날은 정말이지 헐크가 지구를 두쪽이라도 내는 줄 알았을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 솟았더랬다. 물론 베로니카의 최대치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서니까 당연히 엄청난 힘을 내보이는 게 낫지만, 뒷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때부터는 이미 재앙인 것이다. 헐크란 이름의 재앙. 과학자로써, 실험을 해야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며 결국 캡틴의 의견을 묻지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을거라고 배너가 그렇게 토니에게 말한 것은, 결국 그 재앙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당장 그 말 취소해. 아이언맨은 단 한 번도 살상무기였던 적이 없어. 살상무기로 사용된 건 다름아닌 캡틴 아메리카이고, 아이언맨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거든."
"아무리 예쁜말로 포장해봤자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아. 토니 스타크.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행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언제쯤이면 이해할거지?"
스티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않고 토니의 분노를 받아넘기고 있었다. 토니는 토니 나름대로 스티브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고.
배너는 늘 그랬듯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늘 그렇다.
배너는 늘 자신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까.
다수결에 의하여, 베로니카의 성능실험이 결정되었다. 토니 스타크의 새로만든 아이언맨 수트에 연결된 베로니카가 헐크 버스터의 부품을 또한 그 위에 연결하여 헐크를 제압한다. 참 한줄로 정리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배너는 그것을 행하는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여겨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보면 보았던 붉은 노을. 그 붉은 노을은 마치 저주처럼 배너의 초록색 몸뚱아리 위로 녹아들 것이었다. 배너는 한숨을 쉬려다가 문득 숨을 들이마셨다. 하얗고 그 넓이를 가늠하기 힘든 방 안에, 또 방이 한 칸 더 있었고, 그곳이 바로 헐크가 들어갈 곳이었다. 그 앞을 아이언맨이 가로막고 서 있었고. 배너는 유리벽너머로 실험에 찬성한 어벤저스들의 얼굴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전부 불안해보였다. 그거야, 그렇겠지. 나라도 불안한다. 아니 사실은 내가 제일 불안해하고 있겠지. 배너는 힘없이 눈썹을 아래로 굽혔다. 그는 불안으로 뒤덮힌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고 외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쉘헤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이며 토니는 언제나처럼 태평한 얼굴로 배너를 바라보았다.
"헤이, 브루스. 그만 걱정일랑 접어둬. 당신도 베로니카의 설계를 보았으니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잖아?"
"......"
"울적해하지말고 웃으라구,"
배너는 토니에게 어설프게나마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토니는 고개를 저으며 배너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라니까. 내가 금방 제압해서 자기의 그 빅가이를 그대로 잠재워줄테니까. 당신은 아주 잠시만 기억이 없고 아주 조금만 아프게 될뿐이야. 마치 가벼운 두통을 느끼는 양 말이야. 나 믿지?"
"어... 토니, 난 원래부터 당신을 믿었던 적이 별로 없어요."
그래, 농담할 기운이 있어보이니 좀 낫네.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내저었다. "좋아. 그럼 우리가 설계한 베로니카양을 믿고 있어." 배너는 그래도 아까보다 조금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사람에게 유머란 필요한 법이다. 그런점에서 토니, 난 의외로 당신을 믿고있는건지도 모르죠. 배너는 숨을 내뱉었다.
배너는 토니의 어깨너머에서 팔짱을 낀 채 여전히 험악해보이는 스티브와 눈이 마주쳤다. 스티브는 여전히 이 실험을 용납할 수 없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입을 굳게 다물게 한 것은 단지 민주주의 덕분일 뿐, 그의 마음은 과연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등에 방패를 매달고 있었다. 스티브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는 스티브의 모습에서 더욱 그와 자기사이에 벽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배너는 겨우 이 얇아보이는 유리벽하나가 정말 자기에게서 세상을 지켜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과 동시에, 스티브와 자기사이에 생긴 벽 또한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배너를 충분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우울한 기분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 상대가 누구든, 브루스 배너는 언제나 담을 치고 살아왔더랬다. 괴물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데도 오늘은 왜이렇게, 이 겨우 얇은 유리벽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기운이 빠지는건지. 배너는 힘없이, 그래도 마지막 힘을 내어 입꼬리를 당겨 스티브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티브 로저스의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언제나 조금씩 검은색 부위가 열려 있는 듯 팽창해 있다.
그리고 그의 속눈썹은 진한 갈빛으로 숱이 많아서, 그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 배너는 그의 눈동자를 대부분 보지 못한다. 속눈썹이 그의 눈동자를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배너는 스티브와 눈을 마주치고는 있지만 스티브의 눈동자를 정확히 보고있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런 것따위에 이다지도 외로운 것인가? 배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토니가 무슨 말을 계속하는 것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단지 품 안에 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배너가 권총을 꺼내들자 갑자기 어벤저스들 사이에서 공기가 바뀌었다. 물론 토니의 공기도. 배너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권총으로 자해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무하고도 의논한 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를 높혀 헐크를 불러내려면 이 방법이 제일 간단했다. 사실은 천천히 분노를 끌어올려 헐크로 변신할 수도 있었지만, 당장 헐크의 가장 큰 위력을 드러내려면 헐크를 해하려는 듯한 제스츄어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배너는 누군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권총을 입에 물었다. 하느님. 부탁입니다. 실험은 실험으로 끝나게 해주세요. 제발 어서 빨리 서둘러서, 아이언맨이 나를 제압하기를. 그 어느때보다 빨리. 배너는 눈을 꽈악 감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브루스!!!"
그것은 스티브 로저스의 목소리였던가.
먼 곳으로 페이드아웃하는 브루스 배너가 마지막으로, 초록색 어디 너머로 꼭 스티브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았고.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헐크로 변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옷을 제대로 챙겨입고 있는 것도 드문일이지만, 병실안에서 눈을 깜빡이며 백열등을 응시하는 것도 거의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배너는 눈이 부셔서 처음에는 거의 제대로 눈을 뜰 수 조차 없어, 온갖 주름을 눈가에 잡으며 눈을 꿈질거렸다. 깊은 숨과 함께 코로 호흡을 내뱉으며 배너는 무척이나 익숙한 병실의 소독냄새, 각종 약냄새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뛰는 소리와 병실기기들의 신호음, 또 액체가 한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배너는 크게 호흡을 하면서 점점 자신이 깨어난 소리를 내뱉었다. 감은 눈 안쪽에서 몇 번이고 눈을 움직이고 나서야, 간신히 마저 눈을 뜰 수 있었다.
"오, 닥터. 일어났어? 금방 깨네, 겨우 여섯시간 정도밖에 안지났는데."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였다. 배너는 끄응대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옆으로 굴렸다. 토니는 도넛을 먹으면서 배너가 누워있는 침대에 기대어 있던 모습 그대로 고개만을 돌려 배너를 향해 웃음짓고 있었다. 곧 토니는 들고있는 서류를 내려놓고 가까운 의자에 앉고서는 배너의 얼굴 가까이 있는 곳까지 의자의 바퀴를 굴렸다. 의자는 도르륵 소리를 냈다. "기분은 좀 어때? 배너."
목이 마르고 목구멍 안쪽이 따가웠다. 배너는 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별로 나쁘진 않네요." 늘 그런 기분과 마찬가지의, 그 기분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공허함만 가득한 머릿속이 어둠으로 혼란스럽고, 계속 지끈거리는. 토니는 웃는 얼굴 그대로 빨대가 꽃혀있는 물컵을 배너의 입에 대주었고 배너는 아주 조금 물을 받아마셨다. "사실은 도넛을 주고 싶은데." "하하.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죠." 속이 조금 메스껍거든. 배너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헐크였을 때의 데미지는 거의 몸에 남아있지 않아서, 배너는 그저 온몸의 둔탁한 느낌을 받을뿐 어디 아픈 곳은 없었다.
"다쳤군요. 토니." 토니는 눈 아래에 작은 밴드 하나를 붙이고 있었다. "뭐, 아주 조금이야. 사실 지구 최강의 주먹과 싸우는데 전혀 상처가 없을수는 없는거잖아." 그리고 배너를 향해 내젓는 손 위에도 여기저기 붕대가. "이정도야 뭐 매우 예상범위내라고 할 수 있지." 토니는 멀쩡한 손가락으로 팔뚝위의 붕대를 톡톡 쳐보이며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요?" "으흠."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너는 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정말로 그 무엇보다 다행이에요."
배너는 정말로 안심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에. 누구도 심하게 다치지도 않았고. 배너는 눈아래가 쑥 들어간 채로 너털웃음을 흘렸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배너는 그렇게 웃음을 내뱉고나서야 자기가 그 어느때보다 가장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의 그 누구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자기가 얼마나 이들 사이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는지를. 사실 그렇게 외로웠던 것인가. 나는. 배너는 마른 손을 들어 미간사이를 꾹꾹 눌렀다. 피곤해. 계속 자고 있었지만, 그냥 다시 또 뻗어 자고만 싶었다.
"그럼 실험은 성공한건가요?"
토니는 손에 들고있던 남은 도넛도 빠르게 입안으로 밀어넣고 손가락 끝에 묻은 설탕도 핥아먹었다.
"대충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그녀의 사용방법도 제대로 마스터했으니까."
"보람이 있군요."
"사실 여기저기가 좀 망가지긴 했어. 당신이 도와줘야하겠지. 몇가지 보충해야 될 부분도 정리해뒀으니까 나중에 브리핑하자고."
"그래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가며 보수하면 되겠군요."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하고 토니는 배너의 어깨를 두드렸다. 배너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토니를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스티브는요? 그도 실험에 만족하던가요?" 토니는 "아, 그 영감탱이?"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원래 제스츄어가 큰 사람이긴 하지만. 배너는 저도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실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몇가지 토를 달더만. 하여간 늙으면 잔소리가 많아져서 못쓴다니깐."
"실험자체를 반대했으니까요. 저는 이해해요."
"됐다그래. 하여간 뭐가 그리 바쁜지, 벌써 타워에도 없고."
"타워에 없어요?" "무슨 도시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서 등에 또 그 대단하신 방패를 매고 바이크타고 슁하고 나가버려서 말야. 며칠동안 안보일 거야. 그동안 우린 베로니카 수리나 마저 하자고." "그래요..." 왜 아쉽다는 기분이 드는건지. 기다리면 또 금방 만날텐데, 그 푸른눈이 내가 깰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뭐 어때서. 캡틴 아메리카를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나갈 사람이니까 이게 당연한건데. 배너는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토니는 푹 쉬라고 말하고서, 나머지 도넛이 들은 박스를 배너가까이에 있는 책상에 옮겨주고는 병실에서 나갔다. 배너는 토니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너는 얼굴을 더듬다가 문득 자신의 안경을 찾았다. 안경. 내 안경.
안경은 토니가 도넛박스를 내려놓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배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있을 의미가 없는데, 난 병자도 아니고. 토니가 쉬라고는 했지만, 병실 침대에 아무 의미 없이 계속 누워있는 것보다는 토니의 랩실로 찾아가 실험영상을 보여달라고 하는 쪽이 나을지도... 배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의 안경을 집어들었다. 안경은 왼쪽 렌즈가 금이 가 있었다. 유리위에 새겨진 가느다란 균열은, 꼭 한여름 푸른잎들 위에 새겨진 거미줄처럼 보였다.
"...?"
배너는 안경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캄캄하게 덧칠된 기억같은 것이 반복하여 재생되었다. 늘 이렇게 단편적으로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하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는 듯... 또다른 나 일때의 기억이란 이렇게나 거의 존재하지가 않았다. 배너에게는. 배너는 눈을 꽈악 감으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머리안쪽을 누군가가 바늘로 빠르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여전히 기억은 흩어진 그림처럼 되어있고, 조각난 그림조각들은 구멍이 많아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후우, 후. 배너는 숨을 내뱉었다. 안경을 깨뜨린 사람은 내가 아니다. 누군가가 안경을 밟았어. 그게 누구였지? 유리벽이 깨지고, 토니의 헐크버스터가 몇 번이나 얼굴을 내리부수고...
내가 뭘한거지?
이 기억은 뭐지?
배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보면 보았던 붉은 노을. 그 붉은 노을은 마치 저주처럼 배너의 초록색 몸뚱아리 위로 녹아들 것이었고.
아아, 그런데 왜 꼭, 이렇게
그 붉은 노을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것 처럼.
"...스티브?"
조각난 그림 한조각이, 배너의 왼쪽 뺨 위에 푹하고 박혔다.
스티브 로저스의 푸른 눈.
순간, 배너는 숨을 멈추었다.
"당신! 왜 이런데 있어?" 토니는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외치는 목소리가 어딘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까 스티브의 방에 먼저 가보고 그가 방에 없는 것을 알자 너무나 놀란 탓인가, 토니는 여전히 좀 진정하지 못한 채였던 것이다. 스티브는 토니가 다가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티브는 팔짱을 낀 채 나타샤와 마리아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스티브는 거의 컨트롤실 문을 박차고 달려오기까지 하는 토니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타샤가 벌떡 일어났다. "왜그래 토니? 왜그렇게 서둘러?"
"닥터 배너가 깨어났어."
"......"
토니의 말에 나타샤와 마리아가 짧게 숨을 삼키었다. 그녀들의 반응에 스티브는 조금 씁쓸하게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토니는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썹으로 여덟팔자를 그렸다. "...당신이 시키는대로 캡은 부재중이라고 말해놨어."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래. 잘했네." 토니의 우울해진 표정을 보니 스티브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방에 가있지 왜 컨트롤실까지 나와있는 거야." 스티브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해야했기에."
"그냥 그녀들에게 맡기면 되잖아. 나한테 맡겨도 되고, 자비스도 있고,"
"내가 해야 할 몫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 몸을 하고서!" 토니는 더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격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를 뿌득 갈며 외치는 토니를 바라보면서, 나타샤는 평소처럼 스티브편을 들며 토니에게 면박을 주고도 싶었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번만은 나타샤도 토니의 의견에 찬성이었던 것이다. 그냥 자기 방 침대에 누워 링겔맞으면서 다 나을때까지 좀 쉬고 있어줄 수는 없는건가, 아무리 슈퍼솔저라 금방 낫는다지만 지금 당장은 조금도 나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스티브는 깨어나자마자 기어코 컨트롤실까지 와서는 브루스 배너의 뒷처리에 대해서 묻고, 그뒤에도 평소 자기가 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마리아와 나타샤가 몇 번이나 방으로 돌아가라고 회유해도 말 한 번 듣지를 않고. 나타샤는 토니의 평소와 다르게 거칠게 나오는 말투나 표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스티브의 몸상태를. 그리고 그 걱정은 굉장한 '미안함'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브루스 배너에게 '헐크화'를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토니 스타크, 그였으므로.
"우리도 아까부터 몇 번이나 제발 좀 들어가 누워있으라 하던 참이야. 그런데 70년 묵은 고집을 대체 누가 이기냔 말이야."
나타샤의 한숨어린 빈정거림에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충분한 걱정이 녹아 있었으므로 스티브는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머리를 긁적이다 눈이 마주친 마리아도 나타샤와 거의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더욱 멋쩍어 할 뿐.
"알았네, 자네들 얘기 다 알아들었다고. 슬슬 들어가보겠네. 닥터 배너도 깨어났으니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래서 스티브는 옆에 뉘여두었던 목발을 집어들었다. 나타샤가 목발에 지탱하려다 크게 휘청이는 스티브에 깜짝놀라 두 팔을 뻗어 스티브의 어깨를 콱하고 잡았다. "스티브!" 토니도 당황하며 스티브의 코앞까지 달려와 그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집었다. "괜찮아, 괜찮아." 목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스티브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변명했다. 사실 다리를 다친 적은 많지만, 목발을 짚은 적은 없어서 어느정도 목발에 어색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망가진 전신에 기운이 없는쪽이 더 휘청이는 이유로써 타당했지만. 그는 겨드랑이로 목발 버팀부분을 단단히 잡고 손잡이부분을 꽈악 움켜쥔 채 천천히 한 발을 내딛었다. 이것이 익숙해질 쯔음이면 다리의 부러진 뼈도 붙겠지. 스티브는 슈퍼솔저의 혈청을 믿기로 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지금 다리가 부러지고, 전신의 30군데가 넘는 부위에 화상, 자상, 피부가 벗겨지거나 하였고, 부러진 갈비뼈가 대부분, 쇄골뼈가 나갔고, 여러개의 내장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얼굴에는 몇 개의 밴드가 붙여져 있으며, 왼쪽 눈이 부어 눈 주변이 푸르게 부풀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평소보다 눈이 훨씬 작아져 있었고.
그것은 브루스 배너에게 당한 상처였다.
아니, 헐크에게.
스티브는 엉거주춤 부축하는 토니의 어깨에 기대어 컨트롤실의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알아서 혼자가겠네." 그리고는 입구에서부터는 목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혼자 방으로 돌아가겠다며 토니를 만류했다. 토니의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죄책감에 둘러쌓인 듯한 눈동자가 흐리게 빛나는 것이, 스티브는 조금 안타까웠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되는데.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 헐크를 우리가 무사히 타워안에서 제압한 것에 있으니까. 겨우 이정도 상처가 무슨 대수랴.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자기 방의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우뚝
서 있는
브루스 배너의 얼굴을,
브루스 배너의 눈동자를, 어둠속에서 바라본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상처가 다 낫기 전에 아예 타워를 떠나버리지 않은 것을 엄청나게 후회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 순간의 배너의 얼굴을 본다면, 스티브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분노와 함께 나타난 헐크를 제압하기 위하여 아이언맨이 분한 헐크 버스터는 엄청난 화력과 파워를 헐크에게 쏟아부었고, 그러나 헐크는 버스터에게 맞으면서도 쉬이 당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버스터의 배터리가 닳기 시작해 베로니카에 자비스까지 총동원해 보조배터리로 기동해야했고, 헐크 버스터의 커다란 팔이 떨어져나가자 아이언맨은 급한김에 아이언맨군단을 불렀다. 그때였다, 헐크의 엄청난 두 주먹이 유리벽을 몇 번이고 내리치고, 벽이 결국 산산조각을 내며 부서져내린 것은. 그 벽은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중 가장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진 방화벽이었다. 헐크는 모든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유리벽이 쏟아져내리는 그 타이밍에, 캡틴 아메리카는 방패를 빼들고 달려나갔다. 유리벽이 만개 이상으로 조각나 쏟아져내려 헐크의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그 틈을 노리며 헐크에게로 뛰어든 것이었다. 토니는 캡틴에게 도망치라고 비명을 내질렀고 캡틴은 도리어 나머지 어벤저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위해 헐크에게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캡틴은 몇 방을 헐크에게 선사했고 헐크는 그 배를 캡틴에게 내리쳤다. 스티브는 몇 번이고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면서도 헐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데에 성공, 헐크 버스터의 최종 한 방과 아이언맨 군단의 제압으로 헐크는 간신히 타워의 한가운데에서 기절. 그와 동시에 스티브 로저스도 전신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방패에 쏟아진 스티브의 핏물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토니는 스티브, 스티브, 스티브의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더랬고.
"내가..."
배너의 기억은, 그러나 그 전부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주 드문드문 해서 마치 막 끊기고 대부분이 지워져 지지직거리는 오래된 비디오영상 같았다. 하지만 배너는 자신의 갈라진 안경의 틈에서 산산이 조각나던 그 유리벽을 떠올렸고, 그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든 스티브 로저스의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외, 대부분은, 진한 초록색으로 덥혀져 잘 기억이 안났다. 하지만 민감해진 후각이 스티브 로저스의 피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 시선의 기억또한.
그리고 배너는 자신의 방을 찾아온, 전신이 헐크에게 맞아 엉망이 된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때 브루스 배너의 눈물은, 정말로 '굴러 떨어졌다'라고 표현해야 할 만한 것이었다.
"내가..."
배너는 더없이 고요한 눈동자를 한 번도 빛내지 않고, 꼭 죽은 것처럼 빛을 잃은 회색의 어딘가를 더듬으며, 굴러떨어지는 얇은 눈물방울들은 그대로 배너의 뺨 아래로 흘러내렸다. 배너의 더할나위없이 얇은 눈물들은 심지어 빛이 나지도 더 진해지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무언가 말을 하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걸음걸음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입안에 피맛이 고여있는 것처럼 늘 텁텁한 맛이나고, 숨을 한번 쉬고 내뱉을 때마다 코안쪽이 울려서 아픈데, 하지만 스티브는 지금 무엇보다 가장 브루스 배너가 아파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물이 무엇보다 아팠고. 당신 잘못이 아닌데. 하지만 스티브는 그런 허울좋은 말들은 지금의 배너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랜시간 기절해있었으면 좋았을 거였다. 아니면 내가 서둘러 타워를 나서서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걸. 어벤저스 대부분이 그렇게 다친몸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역시 그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다. 하여간 어느쪽이든 좀 더 능숙하게 거짓말을 잘했어야했는데. "내가 당신을..." 배너는 그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에서. 스티브는 목발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부러진 다리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하며, 배너의 옆으로 다가왔다.
"닥터 배너."
"아아, 내가 어떻게..."
"...브루스."
스티브는 붕대투성이의 두 팔을 뻗어 배너의 얼굴을 양옆으로 감쌌다.
"브루스. 날 봐요."
"......"
배너는 고개를 들어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어 색이 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너는 검은색부위가 아주 작아져 있는 스티브 로저스의 푸른 눈동자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푸른 눈동자 안쪽에는 연한 금빛이 새겨져 있어, 스티브의 눈속에서 마치 꽃이 핀 것 같았다.
"봐요. 난 안죽었잖아요."
"......"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내가 안죽었다는 것."
"그리고 알다시피 난 슈퍼솔저라서, 지금은 다소 심해보여도 일주일도 안지나서 금방 다 나을 거고." 그렇게 말하며 스티브는 두 손으로 배너의 뺨 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배너는 저도모르게 훌쩍대었다. 스티브의 손바닥이 너무나 뜨거웠다. 코앞의 스티브의 숨도 이렇게나 뜨겁고. 지금 전신에 일어난 발열때문에 스티브는 두 뺨이 있는대로 달아올라 있는데에도, 마치 조금도 아프지 않다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배너는 그런 스티브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작아진 마음을 원래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배너는 스티브의 손안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당신을 죽일 뻔 했어요. 나는 실제로 당신을 죽인 것과 다름 없어요. 그런 말들이 목구멍에까지 꽉꽉 차올랐다.
하지만 배너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스티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아주 연하게 미소지으며, 무척이나 상냥한 눈을 하고서는.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어요, 브루스. 난 정말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
"난 살면서 많은 끔찍한 것들을 보아왔지만, 오늘 본 것은 정말 그 중에서도 제법 최악에 꼽을 만했어요."
"두 번 다시 당신이 당신 입안에 총을 밀어넣는 걸 보고싶지 않아요. 브루스." 그걸 보았을 때 내가 받았던 충격을, 내가 느낀 슬픔을 당신에게 전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당신에게 안길 수만 있다면.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안들었다가, 당신이 당신의 입 안에 총을 밀어넣는 것만큼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은 것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게 또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그런 모습을 하게 해서 내가, 내가 정말 너무 미안해요."
"...스티브, 스티브...."
"브루스. 나에게 그럴 권한이 있다면, 얼마든지 당신에게 명령했을 거에요. 두번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스티브는 부드럽게 웃었고 그 부드러운 웃음만큼이나 상냥하게 배너의 뺨을 다시 한 번 닦아주었다. "하지만 명령이건 아니건 어쨌든, 이건 꼭 좀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해요. 당신이. 그리고 오늘 당신에게 거짓말한 것, 그것도 사과할테니까요." 배너는 스티브의 양 손이 떨어져나가자마자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랗게 오열이 흘러나왔다. 스티브는 입을 다물고 배너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끌어안을까. 어깨를 두드릴까. 하지만 스티브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배너는 단지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아주 조용히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스티브는 그래서 그 인사에 기대어, 단지 배너가 원하는만큼 그의 앞에 서 있어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손가락 사이의 틈에서 흘러넘치는 그의 눈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 done
나는 브루스가 존댓말을 하는 게 좋심더... 캡틴과 배너가 서로에게 존댓말하는 게 최고지요. 홍홍.
뜬금없는 배너스팁. 사실 이 스토리가 떠올랐을 때 별다른 커플링은 없지않겠는가- 도리어 토니스팁을 베이스에 깔고갈까 - 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쓰기시작했는데 묘하게 배너스팁 느낌이 나는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가..!!!! 해서 배너스팁이라고 하기로 하였습니다. 스티브가 캬 아름답네요. 하긴 내 스티브는 언제나 아름답죠. 나는 모두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티브가 좋아요.
누군가를 지켜주고 구해주는 것이 당연한 스티브도 좋아요. 하지만 그런 스티브를 바라보면서 '그럼 당신은 누가 구해주지...?'라고 생각하는 토니가 와따 좋습니다...(배너스팁 써놓고 토니스팁 이야기하는 나.) 영화 장면 넘어가는 듯한 글을 쓰고싶었기 때문에 다소 여기저기 생략하며 깊게 파고들지않고 걍 슥 넘어가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감정도 제법 억제하고 비교적 가볍게 썼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