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스팁] 꿈속에서, 내가 너에게 13. 06. 06
꿈속에서, 내가 너에게
아침에 눈을 떴을때 스티브는 비교적 심한 상실감을 느꼈다. 상실감이 몸이 지배하고 있을때에는 손가락 하나조차 제대로 펼수가 없었다. 상실감은 차츰차츰 화를 몰고 왔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단지, 꿈의 감정만이 남아있을 뿐 꿈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에도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꿈에 대한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왜 생각나지 않는 그 꿈에서 느꼈던 감정에만 이렇게 휘둘려 혼란스러워야하는 걸까. 스티브는 눈을 깜박였다. 미어지는 슬픔은, 이해가 되지않으므로, 고통이 배가 되었다. 꿈은 싫었다. 그런 이유에서.
커피에 밀크를 넣지 않으면 마실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은 밀크가 하나도 없었다. 스티브는 후두부에서 밀려오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몸이 더욱 지쳐가는 것을 느끼며, 하루의 아침을 간신히 열었다. 사실은 그냥 쓰러져 자고싶은데. 좀 더. 그러나 움직여야하였다. 이른 아침에 찾아오라고 버키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같이 먹자고. 스티브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겨우 찾은 자신의 모자를 머리에 꾸욱 눌렀다. 일주일만이었다. 버키가 돌아온 것은. 물론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을때마다 언제나 늘 그리운 친구이니까. 그러나, 그가 장기임무를 끝내놓고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며 전화로 이야기가 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스티브는 뼈가 앙상한 두 손으로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였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장기임무가 막 끝난후의 버키와의 아침은 싫다. 왜냐하면 언제나 가장 싫은 것에 대면하게 되니까. 그래도 가지 않을 수가 없는 자기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스티브는 자기가 찾아오지 않음으로써 실망하는 버키를 보기가 싫은 것이다.
걸어서, 삼십여분. 새벽에 가까운 아침의 공기는 차갑고 시려웠다. 안개사이로 익숙한 벽돌을 헤치며 스티브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찬공기가 폐에 스며들때마다 소름이 오싹오싹 끼쳤다. 버키가 살고있는 적색의 벽돌로 쌓여있는 빌라의 층층 너머로, 스티브는 고개를 들어 버키가 자고있는 버키의 집 창문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얀 커튼은 닫혀있고, 유리창도 잠겨있고. 스티브는 눈을 내리깔았다. 또 곤란한 시간에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곤란한 사람과. 장기임무를 끝내고 버키는 늘, 여자와 함께였다. 물론 스티브는 모르는 여자와. 어느날은 스티브도 아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같은 여성과 두 번씩 마주칠때도 있기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스티브에게 상대 여성이 누구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어차피 버키는 그들 모두와 사귀거나, 그들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중의 하나였으니까. 단지 스티브가 곤란한 것은 그 여성들의 존재 그자체였다. 여자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에, 스티브 로저스는 늘 불청객이 되는 것이다. 그 무수히 많은 여성들에게만. 스티브는 한숨을 들어삼키다 사레에 걸린 사람의 지친 표정을 지으며, 버키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렇다. 버키는, 전날엔 그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여성이 다음날 그 무엇보다 귀찮은 존재가 되기전에, 떼어버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스티브 로저스를 이용해서.
문이 열리고, 진해서 붉은 웨이브처럼 보이는 갈색머리칼의 여성은 버키의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졸려보이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 뭐죠? " 이른 아침부터도 목소리가 꼭 산너머에서 오는 듯 높고 고왔다. 곧은 다리의 곡선이나 연한 색의 레이스속옷위로 풍만한 가슴의 굴곡에 스티브는 잠깐 시선을 빼앗겼고, 여성은 스티브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졸리다는 어필을 몸을 배배꼬면서 표현하였다. 스티브는 이럴때 항상,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어졌다. 몇 번 겪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날 세상에 둘도없을만한 사랑을 잔뜩 받은 것처럼 뺨이 상기되고 표정이 만족스러운 여성은 항상 그 어느순간보다 가장 아름다워보였다. 그런 여성앞에서, 대체 그 어떤 말이든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그런 말을 대체, 어떻게. 스티브는 우물쭈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앞에서 손가락을 힘없이 움직이며, 해야 할 말들을 머리속에 마구 그려보았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봐요, 뭐냐니까요? " 피곤함에 지쳐 스티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여인의 짜증이 그렇게 입밖으로 내뱉어지면, 스티브는 더욱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할 말을 잇지못하고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의를 헐벗은 채로, 버키는
배꼽아래부터 탄탄한 다리아래까지 보송보송한 타올 하나로 감싼 채, 여성의 둥그런 어깨를 밀어버린다. 집밖에까지.
그리고, 똑같이 크고 힘줄이 선 다른쪽 손을 들어, 스티브의 어깨를 잡아 끈다. 이번에는 버키 자신의 왼쪽 어깨까지.
당황하여 눈이 동그랗게 커다래진 여성을 향해, 여성의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던져주고, 그리고 버키는 문을 쾅하고 닫는 것이다.
갈색머리의 여성이 깜짝놀란 표정으로 버키를 소리쳐 불러도 버키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거의 표정없는 얼굴을 한채로, 그저 손을 뻗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문을 쾅. 그리고 스티브가 버키와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여성의 얼굴에 문득 스치는 차오르는 슬픔을 볼때마다, 스티브는 갑작스런 가슴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스티브는 눈앞에서 문이 닫힐때의 일렁이는 여성의 동그란 눈물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 ...넌 나쁜 녀석이야. "
" 아아. "
버키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
" 여자들은 자꾸 달라붙어서 귀찮거든. "
"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아. "
" 흥. "
버키가 왼손을 들며 과하게 제스츄어를 취하는 것을 스티브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내용이 이런 것이 되는 것은 싫어. 이 단 한순간만으로 버키는 쉽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가 되는 것이다. 버키는 길게 하품을 하며 그대로 침대위로 배부터 쓰러졌다. 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깊게 묻고, 하늘을 향한 왼쪽 다리가 좌우로 한 번씩 흔들렸다. 스티브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쉰 후, 모자를 벗었다. 익숙하게 버키의 옷걸이에 모자를 걸고나서 스티브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 네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남자가 되는 것이 싫단 말이다. 나는. "
이불에 파묻혀 눈을 감고있던 버키가 스티브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두어번 눈을 깜빡인다. 이불위에서 눈썹이 반으로 접혀 간지러웠다.
" -그래도 넌 한사람만 정하라는 말을 안하잖아. "
" 어느 아가씨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건지 나는 모르니까. "
" 맞아. 너,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거 같아. "
" 그건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서야. "
" ...알려주면, 알아줄꺼야? "
" 물론, 내가 아는게 더 좋은일이라면, 그렇게하지. "
" ...하하. "
이불위에 파묻힌 채 버키가 웃었다. 코를 침대에 묻고 있어 웃기가 힘든지 어깨가 들썩였고, 웃는 목소리가 대부분 이불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 그래그래, 알았어. 고려해볼게. 내 친구 스티브 로저스. 난 언제나 너한테 약하니까. " 스티브는 입을 다물었다. 과장으로 느껴질정도로 움직이는 버키의 어깨의 골격들이 위아래로 흔들릴때마다, 스티브는 가끔 낯선 기분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다시뜨니, 그 낯선 기분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밤에서 새벽녘까지 이어진 긴 꿈. 아무 기억에도 남지 않았는데 오로지 감정만이 선명했던. 그 안에 네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버키. 하지만, 스티브는 아무 할 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왜냐면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으니까. 스티브는 단지, 버키가 엎드려 누워있는 침대께로 다가가 그 옆의 좁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버키의 어깨가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버키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고, 버키의 조용해진 입매 너머로, 어느새 뻗어온 버키의 손이 스티브의 손을 맞잡았다.
늘, 버키는 아침에, 이렇게 뜨거웠다.
체온이.
맞잡은 손아귀 너머로, 스티브는 타오르는 것 같은 버키의 육체의 강렬함을 느꼈다.
" ...열이나는 것 같아. 버키. "
" ...맞아. 진정이 되지 않아... "
늘, 같은 아침마다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 스티브... "
" ...... "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버키가 자신의 손을 좀더 꽈악 잡는 것이 느껴졌다. 동그랗게 일렁이던 진한 갈색머리 여성의 슬픈 눈동자. 후두부에 밀려오는 두통의 원인은, 어쩌면 그것일까. 그 수많은 슬픔들 앞에서, 스티브는 언제나 가느다란 우월감을 맛보곤 금방 좌절하고야 만다. 창백한 죄책감에.
그러니까, 이대로, 앞으로도 계속
먼저 말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버키, 여자를 안지말고
날 안아달라는
그 말을.
- d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