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스팁] 물듬 15. 10. 05
"부탁이다." 그렇게 말하는 버키의 눈동자가 파랗게 젖어 있었다. 원래의 눈동자 색이 무엇이었는지 순간 잊어버릴 정도로 파랗게 번져 있는 눈동자 속의 절실함은, 그렇게 내 주변에 퍼져 있던 모든 이성을 깨부수고야 말았다. 나는 슬펐다. 버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그리고 겨우 이깟 천조각 하나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라고 버키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날 도와줘." 겨우 이런 게 너의 도움이 된다니, 난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네가 그 푸르게 번진 눈동자 속의 절망을 빛내며 간신히 만든 가짜 웃음이 나의 절망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넌 날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 가짜 웃음을 지어보임으로써. 눈 속 깊은 곳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절망을 애써 외면하고. 버키. 난 네가 바란다면 너의 목을 꽈악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네가 가지고 있는 너의 절망을 함께 껴안아 줄 것이었다. 하지만 넌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너의 절망에 함께 하길 바라지 않아. 아아, 버키, 널 날 위해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너의 앞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고, 너 혼자 절망에 그렇게 빠져있다면, 그렇다면 대체 내가 너의 옆에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니. 넌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스티브." 버키는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재촉하듯 포개 두 팔을 내쪽으로 내보였다. "스티브. 제발." 얌전히 주먹을 쥔 채 손목을 맞대고 있는 버키 뷰캐넌 반즈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간밤에 버키는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잠 속의 악몽이 촉수처럼 밤을 갈라 버키의 몸을 지배한 것이 틀림없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나는 버키의 흔들리는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버키, 버키라고 소리쳤다. 버키가 침대 아래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덜컥 무서워서 내 심장 소리가 금방이라도 날 공포로 지배해버릴 것 같아서, 그 공포를 떨구기 위해서 일부러 더 큰소리를 내게 되었다. 버키 일어나! 버키 왜 그래? 버키 괜찮아?! 어서 일어나 버키! 그러나 버키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내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도 않았다. 버키는 덜덜 떨면서 이를 딱딱 부딪쳤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들을 중얼거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꿈속에서, 버키는 최전방 수호병이 되어 있었나보다. 입대 후 매일같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던 버키가 오늘 처음 실전훈련을 받고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버키는 창백한 안색을 하고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입술은 바싹 마르고 온몸은 멍으로 가득했다. 침대에 누워 시트를 가득 껴안고 눈만을 굴리며 나를 계속 쳐다보다, 버키는 문득 내 등을 향해 "넌 절대 안 돼..." 라고 중얼거렸다. 어느새 잠이든 버키의 엉망이 된 등 위에 연고를 바르면서, 나도 마찬가지로 그의 등을 향해 중얼거려보았다. "...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버키." 하지만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거야.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틀림없이 너는 원하지 않겠지. 손가락 위의 연고 냄새에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너의 엉망이 된 등에 이마를 기대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너의 딱딱 부딪히는 이, 너의 떨리는 어깨, 너의 악몽 속에 갇혀있는 의식. 너는 땀을 주르륵 흘리며 도망쳐, 와, 살려줘, 를 반복했다. 그리고
너의 두 손이 내 목을 조를 때, 나는 깨달았다.
너는 지금 적들만이 가득한 곳에 서 있다는 것을.
그곳엔 너의 아군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네 옆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너의 두 눈에 가득한 두려움,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는 너의 그 눈을 보면서, 나는 정말로 너의 옆에 있고 싶었다. 너의 아군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너의 손아귀의 힘이 점점 세져 내 목을 있는 힘껏 조르고, 너의 손등이 거의 내 목뼈 깊숙한 곳을 압박할 때에도, 나는 고통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단지 눈앞이 조금 흐려질 뿐, 일그러진 너의 얼굴에 가슴이 아파올뿐으로. 그저 너의 힘이 되고 싶었다. 버키.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는 끊어지는 숨에 담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함께, 너에게 쏟아진 그 많은 절망들을, 내가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너는 네가 조른 흔적이 남아있는 내 얇은 목을 보면서 결국 눈물을 흘렸다.
내가 울지 말라고 고개를 저으며 너의 목을 끌어안아도, 너는 한없이 울며 내 등을 감싸 안을 뿐.
그리고 억지를 부려 오늘도 너와 같은 침대에서 자겠다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더니, 너는 이렇게 나에게 천 하나를 쥐어주고선, 그렇다면 내 두 팔을 묶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손목을 겹친 두 손을 내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이다. 버키는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굳은 입매를 하고 있다. 두 번다시는 실수로라도 악몽 때문이라도, 그는 내 목을 조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버키, 나도 너의 목을 조르는 일은 실수로라도 하고 싶지 않은걸. 네가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운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네가 느끼고 있는 그 끔찍함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어. 어쩔수도 없어서, 나는 결국 버키가 시키는 대로 버키의 손목을 천으로 꽈악 묶었다. 내가 양쪽으로 매듭을 잡아당길 때마다 버키는 "좀 더." "좀 더 꽉 해." 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더욱 힘을 주어 버키의 손목을 천 매듭으로 압박하였고, 결과적으로 버키의 손목 주변이 졸려 붉게 물들게 되었다. "아프지않아?" 하지만 버키는 도리어 그것이 더 마음에 든 것인지, 안심한듯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괜찮아. 이게 좋아." 이게 나아. 이게 마음이 편해. 버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버키는 희미하게 웃었더랬다.
그래서 나는 결국, 눈물이나 떨구고 말았다.
"...스티브. 울지 마." 버키는 그런 나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나는 마구 고개를 저으며 내가 꽁꽁 묶어버린 버키의 두 손을 꽈악 잡았다. 버키의 주먹 쥔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손목이 꽈악 묶여있어서 피가 통하지 않아 그럴 것이었다. 버키의 천이 묶여있는 손목은 점점 붉어져, 거의 손등에까지 그 붉음이 번져 있었다. 내 눈물은 방울과 방울과 또 방울이 되어 버키의 손등 위에 뚝뚝 떨어졌다. "스티브." 너의 목소리가 내 등에 닿아, 나는 등위로 돋아나는 슬픔의 가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버키의 묶인 손등 위로 몸을 굽히고 말았다. 버키에게 등을 내보이고 나는 내 작은 몸을 움츠려 버키의 뜨거운 두 손을 가슴에 꽈악 껴안았다. 뜨거운 손. 붉은 그의 팔. 파란 힘줄위로 흔들리는 버키의 피. 버키. 네가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목에 무언가가 차올라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차라리
너의 모든 고통도, 슬픔도
전부 내 마음에 물들어버리면 좋을텐데.
언제나 너를 생각하는 이 나의 마음에
물들어버리면 좋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너의 등을 끌어안으니, 너에게서 어젯밤 내가 바른 연고의 냄새가 났다.
내가 너의 옆에 있는 이유를 간신히 하나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done
월간브루클린에 투고한 글.
흐.... .....진짜 부끄럽다. 왜 이렇게 엉망으로 썼을까...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