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스팁] That's it 13. 08. 11
That's it
버키 반즈는 십대때부터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컸다. 초등학교때의 체육선생이 그를 종류를 막론하고 무조건 체육계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중 하나였다. 상급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또래의 그누구보다 가장 먼저 체격이 벌어지고 어깨가 단단해진 버키는 자신의 육체가 그러한 쪽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것에 곧 익숙해졌다. '곧 익숙해졌다'는 말은 원래의 나이보다 성숙한 육체위로 쏟아지는 그에 관한 선망과 그에 관한 질투들에 익숙하게 반응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쪽'은 주로 섹슈얼에 관한 일에 치중해 있다. 버키는 열 셋때 여자를, 열 다섯에 남자를 알았다. 상대의 성별이 무엇이든간에 어느쪽이든 불쾌감은 커녕 매우 기분이 좋았고, 기분이 좋은 것은 나쁘지 않다고 십대의 버키 반즈는 쾌락에 솔직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열 여섯에 사관학교를, 시대가 이끄는대로 탄탄한 육체는 그대로 군인의 길로. 버키 반즈는 무수히 많은 기숙사생도들과 혹은 그 기숙사생도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과, 함께. 남자나 여자나 나이등을 가리지 않고 버키 반즈를 원하는 사람하고는 그 누구하고도 즐겁게 행복하게. 시대가 암울하지만 용케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버키는 종전후에도 순조롭게 승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으로써의 순탄한 삶을 누릴 것이었다. 그러한 쪽에는 곧 익숙해진 채 모두가 보여주는 선망과 약간의 질투를 한몸에 받으면서.
그런 버키 반즈가 항상 말하기를,
'내 친구 스티브 로저스는.'
그런 버키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특히 버키를 성적 대상으로 보곤 하는 여자나 남자-늘 화제로 오르는 것이 바로 버키 반즈의 친구 스티브 로저스였다. 그들은 수다스럽지 않은 빈도로 적당히 분위기를 업시키는 버키의 입담에 즐거워 하였지만 때로는 이 너무나 자주 화제로 오르는 스티브 로저스가 싫어지기도 하였다. 질투가 특히 심한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빈번히 나오는 그 이름때문에 꼭 버키와 자기 사이에 그 이름의 존재가 끼어있는 것처럼 느껴져 진저리를 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사 그런 생각을 한다해도 태도로 드러내지는 않았었는데, 이 버키 반즈란 사람은 당장 매력이라는 것이 사라지면 연이 끊어질 어제 오늘의 연인보다 스티브 로저스쪽을 서슴없이 선택하는 연인에게 한없이 잔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버키와 어울리는 이들은 그러한 버키의 기질을 알고 있었으므로 버키가 스티브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그저 웃는 낯을 만들고 들어주기에 바빴다. 이미 버키 반즈에게 버림받은 무수한 전연인들의 뒷사정은 버키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바이블화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버림받은 이들중에는 스티브 로저스를 실제로 만난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이러한 말을 해버렸다는 것 '스티브 로저스의 얘기는 이제 지겨워' 혹은 '스티브 로저스가 싫어'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금발의 여성이 술집에서 울면서 했던 넋두리는 더욱 유명했다.
"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
라고 말했다는
버키 반즈의 차가운 미소.
전신이 전부 얼어버릴 정도였다고, 목구멍을 딱딱한 게 한 채 정신없이 내뱉었던 그 날의 그녀.
" 너같은 자를 두고 성공한 자라고 하는 것 아냐? "
어느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던 바로 옆자리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기에, 버키는 경례를 하고 있는 와중에 아주 조금 옆을 흘겨 쳐다보았다. 눈동자만을 굴렸기에 가뜩이나 이마까지 가리는 모자때문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얼굴마저 흐릿하였다. 그러나 버키는 오후 조례시간 항상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간이 누구인지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동기였다. 소속부대는 다르지만. 그래도 입고있는 옷은 같았다. 가슴에 달고 있는 것도. 말하자면 스타트라인도 비슷하게, 현재 서 있는 자리까지도 비슷한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쪽이 더 '성공한 자'라고 인식하고 스스로의 자각없는 비굴함을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그거지. 버키는 구령에 맞춰 경례의 손을 반듯하게 내렸다. 그리고 늘 비슷한 말의 속도와 비슷한 텐션으로 이어지는 장군의 훈화. 다른 장군과 비교하여 비교적 템포는 빠르지만 훈화의 시간은 더 길게 늘어지는. 버키는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충동을 오른쪽 군홧발로 짓잇기며 표정의 변화없이 입을 열었다. 버키의 말소리가 나지막하게 바닥으로 향했다.
" 어딜보고 그렇게 말하는거지? "
" 그냥. 모든 면에서. "
" ─그냥, 모든 면이라... "
버키는 주변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뙤약볕 아래서의 조례가 길어짐에 따라 피부에 느껴지는 더위가 점차 심해졌다. 버키는 머리둘레에 딱 맞는 모자의 안쪽에서 조금씩 땀을 흘리고 있었으나 그 흘러내리는 물결을 닦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땀들은 대부분이 목아래까지 흘러내렸고, 그 감각이 아주 조금 버키를 간지럽게 했다.
" 넌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거 아냐? 너의 모든 것에서 여유가 느껴지거든. "
" 그것참. 뭣도 모르는 소릴 태연하게... "
" ? 뭐? 뭐라구? "
버키 반즈는 피식, 하고 웃었다. 어리석은 자하고 더 이상 말을 섞기에는, 오늘 날씨가 너무 무덥다.
가령, 이녀석에게
사실을 말해준다해도, 이해를 못할 것이 뻔하니.
버키는 단지 눈을 내리깔며, 그날의 스티브 로저스를 떠올렸다.
스티브는 몸이 아주 작았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고, 다리는 삐쩍 말랐으며 팔은 짧았다. 배구공만한 얼굴은 볼이 홀쭉하여 커다란 눈만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비교적 쓸어넘기는 금색의 머리칼이 이마에 딱 달라붙어 있을때가 많아 얼굴은 더욱 작아보이기만 하였다. 버키는 이 친구에게 미미한 안쓰러움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동정이었다. 동정은 곧 우월심이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더욱 작고 더욱 안쓰러워 보일때마다, 이 몹쓸 동정심이 날 더욱 나쁜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다. 스티브를 생각할때마다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가슴미어짐이 건방진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죄책감들은 버키로 하여금 스티브와 함께 어울리기를 차라리 관둬버릴까, 인연을 끊어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들게 하였고, 그런 무수한 번민속에서도 그러나, ─버키는 스티브 로저스를 찾아가곤 했던 것이다. 사실 생각이야 늘 하지만, 그러나 도저히 스티브를 끊어낼 수가 없었다. 버키로써는. 스티브가 보이지 않으면 스티브를 찾아가는 것은 오히려 버키이기까지 했다. 그런 버키가 자기를 찾아낼때의 표정이, 스티브는 좀 귀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두웠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아, 찾았다! 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버키는 그날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째서 스티브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가를 또 생각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스티브 로저스는 시내의 작은 도서관에 있었다. 중산귀족이 몰락하고 시청에 내놓은 건물로 만들어진 이 도서관은 말그대로 몇백년정도는 묵은 것이라 외관부터가 이미 낡았으며 날씨에 따라 음산해보이기도 하였다. 건물과 건물사이에 끼여있는 붉은벽돌색의 도서관 정문은 한때 귀족의 저택이라는 사실 자체에 집착하는 것처럼 섬세한 세공의 조각같은 것도 되어 있었지만 이미 거의 낡고 깎여나가 그 형체를 분간하기는 사실상 무리에 가까웠다. 단지 시립도서관이라는 간판만이 불필요하게 깨끗했다. 버키는 두 손을 코트의 주머니에 넣고 도서관 계단을 소리도 없이 밟았다. 스티브는 이 넓은, 아니 사실은 그다지 넓진 않지만 한때 귀족의 건물답게 약간 복잡하고 복층의 계단이 여러군데인 3층자리 건물의 어드메에 있을까. 버키는 눈을 깜빡이며 스티브를 찾았다. 연한 금발과 흐릿한 연갈색의 눈썹. 책에 집중하는 미간도 맘에 든다. 버키는 그렇게 책에 집중한 스티브의 옆모습을 기대하며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버키는 스티브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책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들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버키는 스티브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전혀 방해할만한 구석이 없어보였다. 버키는 단지 코트에 손을 넣어놓은 것 그대로, 스티브가 앉아있는 책상의 두개 뒤쪽의 책상의 빈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의 왜소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목을 쭉 빼고 좁은 어깨를 최대한 벌린 채 반듯한 자세로 어딘가 한군데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깍지를 낀 채 책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버키는 스티브의 금발이 한쪽방향으로 살짝,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스티브 로저스가 짧게 한숨을 내쉰 것이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한.
삼분 정도가 지나고, 스티브 로저스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읽고있었던 듯한 펼쳐진 책을 접고 옆에 쌓아두었던 책도 전부 품에 안아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것 같았다.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는데 작은 체구로 종종 걸으니 묘하게 서두르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버키는 단지 스티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려 고개만을 움직이고 있을뿐 결국 끝까지 스티브를 아는체하지 않았다. 왠지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스티브에게 자기를 알려 그의 산통을 깨게 하고싶지 않았다고나할까. 그 산통이라는 게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어쨌거나. 버키는 스티브가 도서관에서 완전히 나가고 난 후에야 짧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두 손을 코트에 넣은 그대로였다. 버키는 약간 망설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망설이다가 걸음을 주춤하였다. 쳇. 버키는 입안을 우물대다가 곧 발걸음을 죽이며 앞으로 걸어, 방금전까지 스티브 로저스가 앉아있던 책상의 의자앞에 섰다. 결심하고 나니, 망설임따윈 완전히 물러가버렸다. 버키는 오른손을 뻗어 방금까지 스티브가 앉아있던 의자를 끌어내었다. 바닥은 긁히지도 않고 조용했다. 버키는 다시 두 손을 코트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의자에 깊게, 아주 깊게 앉았다.
아.
그래.
저건가.
저걸 보고 있었던건가. 스티브와 같은 자리에 앉아 버키는 스티브가 돌린 고개의 각도와 똑같이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깨달았다. 도서관 3층의 한쪽 창문가, 그 옆의 어느 벽 모서리, 섬세한 천장의 장식으로 양각되어 있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 멀쩡한 회색의 어린 천사상. 엉덩이가 통통하게 묘사되어있는 작은 천사상은 전형적인 모습으로 한쪽 다리를 들고 사랑의 화살을 있는 힘껏 당기고 있었는데, 비죽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인상적으로 귀여웠다.
저걸 발견한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가.
그리고 아마, 행복한 듯 웃으며, 아름다워, 중얼거렸을라나.
어쩌면 카운터로 가자마자 그곳의 직원에게 "이런곳으로 매일같이 출근 할 수 있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습니까?"라는 대화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카운터 직원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 넌
너의 시야엔
언제나 이런 풍경들이 있지.
넌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버키 반즈는 자기를 전부 다 뒤집어도 혹은 몇번이고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말의 남아있는 동정의 부스러기가 산산조각되는 것은 순간으로, 오히려 이때까지 느꼈던 그 가슴저림은 웃기지도 않은 어설픈 우월감이 아니라 어렴풋이 스티브 로저스란 남자를 알때부터 느꼈던 간질간질한 사랑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스티브 로저스란 남자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간질함은 오히려 간절한 것이 되어서, 버키 반즈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스티브 로저스란 남자에게. 정말이지 자각된 감정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버키 반즈가 이름을 부여한 그 순간부터, 감정은 풍선처럼 부풀기만 해서 금방 버키 반즈의 전 신체를 장악하고야 말았다. 물론 오늘날까지, 빈틈 한 점 없이.
세상에
그러한 사람이 있음을
그러한 것을 두고
인생을 즐기는 자라고 말을 해야하는 거라고.
─뭐 그렇게 한 번 말이라도 해볼까, 버키는 잠깐 생각했었으나, 너무 무의미한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한들, 발끝이나 이해하겠는가. 이런 종자가. 버키는 단지 입을 다물었다가, 옆의 사람이 너무 채근하며 뭐라고 했는지 굳이 몇 번을 다시 묻기에, 버키는 한숨섞인 목소리로 " 그러니까 나도 여유따윈 없는 인간이란 얘기야. '진짜'앞에선 나란 인간도 너무나 한심해서. " 그렇게 대꾸해주고 말았다. 동기의 의아함을 담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답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버키는 그저 눈을 감았다. 오늘은 너무 더워 술집 생각이 지나치게 간절하다. 시원한 맥주. 거품이 잔뜩 일어난. 오늘은 어디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를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와, 버키는 가만히 입술꼬리를 당겼다.
- done
+ 주제는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