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스팁+버키스팁] 너의 그 어딘가 17. 02. 03
너의 그 어딘가
스티브 로저스가 건너편 건물의 지하3층 주차장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전해들었을 때, 토니 스타크의 심장은 쿵하고 크게 주저앉았다. 심장이 만약 몸 속에서 바닥까지 단숨에 떨어질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토니는 스티브가 다시는 자신을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을 스티브가 평생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어쩔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토니는 스티브를 떠나보내고 (아니다, 스티브가 스스로 떠나간 것이다. 그런데 왜이렇게 내가 그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왜 나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그인데 도리어 내가 그에게 등돌릴 수밖에 없게끔 만든 것 같은걸까. 토니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 뒤 그에게서 온 편지가 얼마나 자신을 구해주었었는가를 떠올리며 건너편 건물의 지하3층 주차장으로 향했다. 맞아. 내가 거기에 내 차를 주차시켜 두었었지. 이 건물도 건너편 건물도 다 내거거든.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서 먼저 볼일을 다 끝낸 후 이쪽 건물로 왔었지.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의 오늘 하루동안의 일정을 전부 꾀고 있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라면 토니에게 한순간도 들키지 않고 내내 그의 뒤를 쫓는 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을 본 스티브 로저스는, 토니 스타크가 알고있던 스티브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았는데, 토니는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던 그 시간때만큼이나 스티브를 앞에 두는 이 순간 그렇게도 많이 긴장이 되었다. 벌써 몇 번째 삼키는 마른 침이며, 주먹은 대체 왜이렇게 있는 힘껏 쥐고 있고. 등줄기는 또 바짝바짝 서고, 왠지모르게 다리까지 후들거리는데. 토니는 미친듯이 뛰는 심장이 스티브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속에서 나에 대한 실망이 담겨 있으면 어떡하지, 경멸이 담겨있으면 어떡하지... 라고 외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저 건너편 기둥의 어둠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스티브 로저스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토니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니는 꼭 그렇게 생각하며 경직될 수 밖에 없었다. 토니는 스티브의 기억속에 있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심한 녀석. 당신이 꼭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아.
"토니."
"...스티브."
그리고 토니는 겨우, 스티브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구멍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쩍쩍 소리를 냈고, 토니는 꼭 지금 당장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이 꺼져버려도 지금 이순간보다는 더 두렵지 않을 것 같았으며...
토니는 스티브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하는 부탁을 들으면서 천천히 평정을 되찾아갔다. 토니는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말간 눈을 한 채의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토니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토니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절실한 지를 토니에게 알려주었다. 그래, 절실하지 않을리가 없지. 절실하지 않다면 나를 찾아올 리가 없겠지. 토니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와 컨디션으로 말을 시작했지만, 그래도 토니 자신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꼭 먼 곳에서부터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정말 내 목소리인가? 이게 정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인가? "캡. ...스티브. (그리고 토니는 절망했다. 그를 습관처럼 캡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스티브라는 이름으로 바꾼 자기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를 캡틴이지 않은 존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나다...) 타임머신 프로젝트는 이미 오래전에 종료된 프로젝트 중 하나인 걸 알고 있겠지?" 토니는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방금 내뱉은 한마디가 가장 힘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말을 하는 것이 버거웠던지, 말을 끝내자마자 목구멍에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따끔거렸다.
스티브는 가만히 손을 앞으로 포갰다.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대지 않고 곧게 허리를 펴서, 조금 아래인 앞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의 스티브 로저스 그자체였다. 토니는 자신이 알던 때보다 더 짧게 자른 스티브의 수그려진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귀뒤로 넘길 게 있을만큼 길었을 땐 환한 금색이었던 그 머리칼이, 짧게 자르니 마치 갈빛같은 색을 내고 있었다.
"동물실험 전에 폐쇄 된 프로젝트지. 나도 알아, 토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일순 토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토니는 그가 자신을 스타크라고 부르면 이순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질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자기자신이 얼마나 최악인가 하는 것도.) 시간은 결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다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고 그 프로젝트를 종료시키기로 한 것에 자네도 사인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배너도 사인을 했지. 박사 셀빅도 사인을 했고. 쉴드의 뛰어난 과학자들도,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도 빛보다 빠른 시간의 속도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인정했거니와."
"그렇지만 버키 반즈는 나와 같은 혈청을 보유하고 있지. 나와 그라면 빛과같은 속도를 견뎌낼 가능성이 제로인 것도 아니고."
"...아니. 그렇지 않아."
평소였다면 벌떡 일어나 그 무슨 미친소리야라고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는 그저 자리에 앉아 허벅지에 올려놓은 주먹을 더욱 꾸욱 쥐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팔부분이 부륻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모두의 눈을 피해 조용히, 자신과의 만남을 캄캄한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네가,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버키를 과거로 보내주고 싶어."라니? 토니는 스티브의 부탁을 듣는 내내 점점 더 담담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역시 겉으로만 그럴 뿐이고 속은, 속은 사실 있는대로 뒤집히고 있었다. 스티브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저 고통이었다, 그가 밉기도 하고 동시에 그에게 한 모든 짓에 대한 죄책감이 지독하게 토니를 눌러왔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버키 반즈라는 이름에는 도저히 증오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워, 그가 밉다고. 그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도 이렇게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데.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의 이글대는 분노를 자신의 주먹안에 간신히 가둬놓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아, 이럴때도 미소란 것이 나올수도 있는 거였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평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언제나 너였어. 토니. 그런데 지금은 내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군."
"...그러게.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응. 정말로 그래."
"...하지만, 토니. 나는 이제 단 하나로도 좋으니...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 그리고 스티브의 그 말을, 토니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한 채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눈을 질근 감고야 말았다. 그의 그 깊은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진실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탈옥하여 와칸다에 숨어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들었을 때 토니는 잠시 와칸다의 왕을 보았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세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냉동되어 있기를 선택한 버키 반즈에게는 다소 놀랍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티브의 말, 그 말들을 들으며, 토니는 어쩔 수 없이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담담한 얼굴에 자신 또한 점점 평정을 되찾아가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그 담담한 목소리 속에 스티브의 모든 슬픔이 녹아 있었던 거겠지. 스티브는 물론 마지막까지 울지 않았다.
와칸다의 왕은 버키 반즈를 위한 의사팀을 꾸렸고 그들은 윈터솔저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세뇌를 끊기 위한 연구에 온힘을 쏟았다. 그들이 내놓은 갖가지 해결책들을 한꺼번에 모아 단 한 번 버키 반즈를 냉동에서 다시 깨어나게 하기로 한 날, 물론 스티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금방 다시 깨어나게 할 거였으면 그냥 머리를 쳐 기절을 시켜놓을걸 그랬지, 우스갯소리를 하는 스티브의 입가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미세한 떨림을 못본척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 모든 실험은, 당연한 것이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하이드라는 21세기 지구가 가지고있는 모든 과학의 정수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고, 그들의 윤리를 뛰어넘는 끝없는 생체실험으로 이루어진 그 모든 발전이 때때로 부럽다고 어느 쉴드의 과학자가 툭 털어놓았던 것을 토니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버키 반즈를 깨운 것은 잘한 일이었다. 다시 눈을 뜬 버키 반즈는 눈을 감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든 의아한 행동양상들에 당황한 의사들은 서둘러 버키 반즈의 정밀검사를 시작하였고, 아, 그 날 스티브의 절망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어쩌면 버키 반즈는 이미 조금씩 무너져가는 댐과 다를 바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혹은 풍화하는 바위의 언저리였던가. 스티브는 그렇다면 왜 자신만은 이렇게 멀쩡히 백 년째의 날을 맞이해야 하는 가 의아해했다. 유리창 너머로 창백한 버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에게 둘러쌓인 채 눈이나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팔에 얇은 주사바늘로 이어진 긴 튜브관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때때로 "스팁은 어딨어요?"라고 묻고 또 물었던, 버키. 나의 버키.
버키 반즈의 인지장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버키의 인지장애는 보통의 치매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버키는 자신이 윈터솔저였던 것은 기억하지만 스티브 로저스의 현재의 모습에서 자신의 소중한 소꿉친구인 스티브 로저스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스티브와 현재의 스티브가 하나로 겹치지 않는 나날동안, 스티브는 무던히도 버키를 찾아가 "내가 너의 스티브야."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버키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니잖아. 스티브는 어디에 있지?"라고 반복하였고, 스티브는 처음으로 죽음을 반복하여 떠올렸다. 차라리 죽었으면. 차라리 죽었다면. 버키의 그 질문은 버키가 윈터 솔저였던 당시 스티브 로저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버키에게는, 스티브가 없었다. 지금의 버키에게는, 스티브가 존재했다. 하지만 버키의 스티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21세기에는 말이다.
그렇게, 버키 반즈의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게 된 스티브 로저스는, 많이 울었다.
혼자서.
다소 늦었지만, 스티브는 드디어 그 무엇도 자신을 막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지금 스티브의 울음을 멈출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더 이상 그것을 막고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티브는 자신의 방에서 그 어둠속에서 아주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때때로 눈물방울 사이로 버키,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스티브 로저스는 정말 브루클린에 있던 그 작은 스티브 로저스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버키가 좋아하던 그 작은 친구, 정말 버키의 바로 그 스티브 로저스 말이다. 스티브는 그 밤동안 정말로 버키의 스티브가 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전부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다른 것은 전부 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고, 문득 동이 터오는 저 먼 곳의 오렌지색 태양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멈춘 스티브는
역시 스티브 로저스였다.
버키의 스티브가 아닌, 그저 스티브 로저스였다.
그러므로, 스티브는 버키를 위해 모든 것을 팽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스티브는 현재(스티브가 해야 할 일, 스티브가 짊어져야 할 의무, 스티브가 늘 함께 있어야 할 많은 이들이 있는 이곳말이다.)에 남았고 버키와 함께 아득한 길을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스티브는 버키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스티브는 아주 많이 버키를 놓쳤고, 이젠 두 번다시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 단 한번만이라도,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그에게 줄 것이었다. 스티브는 꼭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버키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낼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를 찾아갔다.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 앞에서 담담하게 슬퍼했고,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앞에서 "...하지만, 토니. 나는 이제 단 하나로도 좋으니...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티브는, "난 버키가 원하는 걸 이루어줄거야. 그에게 그의 스티브를 돌려줄거야."라고 말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뜬 토니가, 스티브를 바라본다. 말간 표정의 그.
"...그의 스티브는 너야. 스티브."
토니는 하나마나 한 말을 했고, 그건 토니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닐세. 토니. 그의 스티브는 내가 아니야."
스티브의 담담하게 지어지는 미소를 보면서, 토니는 물론 자신의 발언을 바로 후회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오래전에 종료해두었던 프로젝트를 은밀히 가동시켰다. 비전에게 남아있는 자비스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로 폐기시킨 타임머신 프로젝트를 혼자 은밀히 재가동하고, 타임머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토니 스타크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이 걸리고야 말았다. 비전과 프라이데이가 그를 도왔지만 도저히 시가을 단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버키는 잠들어 있었다. 그를 냉동시키는 대신에, 그리고 물론 스티브가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쳐 기절시켜놓는 대신에, 와칸다는 몸에 이상이 남지않는 약물을 사용했다. 버키가 잠들어 있는동안, 스티브는 그와 함께 티 찰라가 준비해준 개인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은밀하고 긴 항해시간동안, 스티브는 잠들어 있는 버키의 얼굴을 오랜시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이. 그 어린 스티브가 널 보면 얼마나 놀랄까?" 스티브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어린 스티브가 이렇게 된 널 보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넌 그녀석의 마음을 과연 돌릴 수 있을까? 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스티브는 가만히, 가만히 버키의 이마를 쓸었고.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토니는 처음으로 자신없어 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티브에게 타임머신의 기능을 설명했다. 비전과 프라이데이는 각자의 목소리로 스티브를 말렸고, 물론 스티브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죽는다면 그걸로 좋아." 스티브가 극단적으로 그렇게 내뱉자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스티브를 쳐다보았고, 스티브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물론 자네들이 그를 죽이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도 나오는 거네." 토니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토니는 그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이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사 달리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토니는 그를 말리지 않을 것이었다.
동그란 구를 그리고 있는 커다란 타임머신은 높은 선반위에 올라가 있었다. 토니는 버키를 침대째로 그 선반위에 밀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구형태의 타임머신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며 가동을 시작했다. "스티브. 그를 저런 모습으로, 심지어 잠들어 있는 채로 그냥 보내도 돼? 물론 과거로 가는 충격에 잠이 깰거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게 뭔가 제대로 설명 하나도 해주지 않았잖아." 스티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멀쩡한 옷을 입혀주지도 않을 거고. 과거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나게 어리둥절하라고 하지 뭐. 이건 그에게 거부당해 상처받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괴롭히는 걸세." "...그래? 과연..." 그래. 과연. 토니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그리고, 타임머신이 완전히 가동되자, 순간 랩실안의 가득했던 공기가 한꺼번에 전부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0.1초.
그리고 0.1초가 지나자, 한꺼번에 전부 사라진 공기가 다시 공간에 가득 차올랐으며,
그리고, 버키 반즈는 없었다.
그가 누워있던 침대와 함께.
버키 반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이 낯선 곳에 와있음을 눈을 뜨자마자 알았는데, 그 낯선곳은 도리어 너무나 친숙한 곳이기도 하였다. 버키는 자신의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몸을 일으키면서도 대체 몇 번이나 눈을 감고 떴는지 몰랐다. 저 하얗고 탁한 하늘과, 공기 속에 녹아있는 비릿한 바다냄새와, 그리고 다소 질척거리며 더러운 거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버키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의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여전히 자신의 팔에 꽃혀있는 주사바늘을 뽑아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맨발이 닿는 순간, 아, 이게 현실이구나. 이게 꿈도 환상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키는 자신의 멀쩡한 오른팔을 그리고 기계가 달려있는 왼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맨발인 것과, 자신이 입고있는 하얀 환자복-은 위와 아래가 붙어있고 통이 넓어 마치 하얀 원피스처럼 보였다-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귀뒤에 딱 달라붙어 있고, 몇가닥이 그의 이마위에 흘러내려와 있었다. 아, 나는 그대로다. 그저 윈터솔저로 이용당한 그 세월도 거짓이 아닌 현실이 맞았다. 그 지옥을 겪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 버키 반즈 그대로가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고향에 서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그렇게 아무 것도 알 지 못하는 채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채로 멍하니... 그저 멍하니 있다가, 버키 반즈는 길 옆에 스티브 로저스가 신문뭉치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버키는 드디어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그래, 스티브. 스티브. 나의 스티브. 네가 있는데, 너를 만나는데, 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어. 그래서 버키 반즈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알 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 엄청난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과거의 브루클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몸과 덩치가 크고 한쪽팔은 떨어진 상처투성이의 그 버키 반즈인 채로 시간을 뛰어넘었는지도 도저히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눈앞에 스티브 로저스가 버키의 기억속에 있던 그 아주 작은 스티브 그 모습 그대로일 수 있는지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래도 버키는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버키는 드디어 스티브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버키는 더 기다리지 않고 헐레벌떡 스티브를 향해 뛰어갔고, 그에게 뛰어가는 길에 많은 것들이 버키의 맨발에 채였지만, 버키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버키는 눈앞에서 어지러이 흔들리는 자신의 갈색 머리칼에 때로 스티브가 가리어져지는 것을 원치않았지만, 너무나 정신이 없어 그 머리를 쓸어넘기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스티브는 문득 버키를 바라보았고, 그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되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버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버, 버키?!" 아, 나의 스티브. 스티브. 버키는 작은 스티브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가득 끌어안았다.
품안에서 따뜻한 것이 꼬물대며, 버키의 등을 가득 끌어안았다.
"세상에! 버키 너 어떻게 된 거야?! 군대 들어간지 몇 주 됐다고 이렇게나 커진거야?! 아니, 커진 게 아니고 좀 늙은건가? 왜 늙은거야 훈련이 그렇게 힘들어? 근데 너 복장도 대체 왜 이지경... 아니, 버키! 너 맨발이잖아! 대체 왜... ? ?!!! 악!! 버키!!! 너 팔이?!!!!"
"스티브, 스티브."
그리고 이 품안의, 이 작고 따뜻한 것이, 바로
스티브, 스티브.
바로 나의 스티브였다.
그것이 바로 버키 반즈의 스티브 로저스였다.
"...침대와 함께 사라졌어."
"...무사히 간건가? 토니."
"......"
"토니."
"...나도 몰라. 모르겠어. 제대로 된 실험도 거치지 않고 바로 보낸건데, 난들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렇군."
"무사히 원하는 과거의 시간대로 갔을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 어쩌면 산산조각이 난 채일지도 몰라. 어느 6차원이든 7차원이든 하는 곳에 잘못 전송되어서 영원히 그곳을 떠돌게 될지도 몰라!"
"그래. 그거면 됐어."
"스티브!"
"...자네들을 믿으니까 하는 소리야."
"버키는 자신의 스티브를 만났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리고 스티브는, 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주 고요한 눈물 한방울을 바라보며 토니도 더는 말할 수가 없어 입을 꽈악 다물었다. 예전이었다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었던 그 때라면. 그때라면, 나는 너의 그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었겠지. 너의 더할나위없이 괴로워보이는 등을 꽈악 끌어안아줄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그럴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토니는 그저 주먹이나 꽈악 쥐어야만 했다. 토니는 모든 것을 후회했고, 그저 모든 것을 후회하게 될거라는 것을 왜 진작 알지 못했는가 끝없이 절망했다. 토니는 스티브를 끌어안고 싶었다. 정말이지, 스티브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고요히 눈물 흘리는 스티브가 나지막히 "버키."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토니는 그저 다시 눈을 감았을 뿐으로.
- done
스른전력 76차 주제 [NOTHING] . 그렇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사실 낫씽입니다.
퇴고가 없습니다. 엉망진창인 부분이 많을테지만, 왠지 돌아보기가 싫으네요,
마음속에 간질간질하며 남아있던 것... 쓸까말까 하던 것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나는 스티브를 위해서 아직 흘릴 눈물이 많이 남았나봐요.
어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