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스팁] On The Breeze 15. 05. 09
(어벤저스2:에이지 오브 울트론 에 대한 지대한 스포가 함유된 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 어벤저스2 엔딩 이후의 이야기라고 보시면 됨. 스포가 싫으신 분들은 읽기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도망치는 것 처럼 보였다, 고 완다는 말했다. 그녀는 상대방이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를 생각하며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부분이 다소 모자른 소녀였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예의를 배우기 힘든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였으니까. 그런 건 앞으로 점점 변할 수 있는 거야. 나타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완다가 노골적으로 보여준 토니 스타크를 향한 혐오를 가만히 참아주었다. 스티브의 짧은 배웅을 끝으로 토니 스타크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어벤저스 본부를 빠져나갔다. 최신형 자동차의 바삐 구르는 바퀴소리는 나타샤가 들어도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토니의 목소리같았다. 모순이었다. 이 어벤저스 본부의 대부분의 지분은 당연히 토니 스타크에게 있었다. 부동산이 아니니까 지분의 개념을 적용하는 건 우스운 일이고 토니 또한 본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보이지만, 하여간 그것이 어벤저스건 쉴드이건, 존속을 위해서는 토니 스타크가 도저히 없어서는 안 됐다. 그의 재력 그의 기술 그의 명성 그의 영향력, 그 어떤 것도 없어선 안 됐다. 그런 그가 두 번 다시 이곳에 오고싶어하지 않는다니. 나타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완다의 비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삐 사라지는 토니 스타크의 차의 엔진소리는, 내심 나타샤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그에 대해 그런식으로 말하지? 완다 막시모프?"
"캡."
토니의 배웅을 하고 들어온 스티브가 완다에게 그렇게 물었다. "...캡틴 아메리카." "어째서?" 완다는 저도모르게 목을 경직하며 다소 긴장했으나, 나타샤가 보기에 스티브는 완다의 날이 선 말에 화가 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그저 평소와 마찬가지로 선량하게, 도리어 조금 완다를 연민하는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완다의 의중을 묻고 있었다. 완다는 스티브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높이 턱을 빼고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스티브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깊게 잠겨있는 채 오로지 완다만을 비추었다. 완다는 소코비아의 밤하늘, 짙은 밤이 내리기 전에 나타난 하늘의 감청색 빛깔을 떠올렸다. 파란색이 밤에 물들어갈 때의 색이 스티브의 눈동자 속에 있었다. 혹자는 바다를 떠올릴 것이다. 저 눈을 보며. 어린시절 보고 자란 것들의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 보석처럼 빛나는 것, 눈속에 빛이 박힌 것처럼 눈이 부신 것,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릴 것이 분명했다. 완다는 스티브의 눈속에 박혀있는 자신을 향한 연민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처음이었다. 타인의 동정에 스르르 마음이 풀린 것은. 완다는 갑자기 그 어느때보다 피에트로가 보고싶어졌다. 그리고 그의 완전히 차가워진 몸을 껴안고 몇날며칠을 밤새워 울었던 것과 아무상관없이,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넘쳐나는 눈물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토니 스타크를 비난하면서도 그래서, 완다는 이상하게 마음이 화로 타오르지는 않았다. 완다는 스티브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 남자가 망쳐버린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캡틴 아메리카."
"그런가?"
"그리고 토니 스타크 또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해요."
"그의 마음을 읽지 않아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거죠. 이런건." 자신이 망쳐버린 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수습하려고 하는 거다. 완다는 딱히 토르의 배웅을 간단하게 끝내고, 또한 본부를 아주 잠시 둘러보는 시늉을 한 뒤, 금방 다시 돌아간 토니 스타크의 마음을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그다지 보고싶지도 않았다. 그의 존재가 본부의 어딘가에서 느껴질 때마다 완다는 도리어 몸을 숨기었다. 허공에 공기보다 가볍게 떠 있는 채로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 토르가 복도를 걸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를 뒤쫓다가, 완다는 그저 몸속에 숨어있던 토니 스타크를 향한 불꽃 하나가 불쑥 솟아나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그녀가 토니에게서 몸을 숨긴 이유였다.
"...자네는 그남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자네의 머릿속에 박힌 토니 스타크란 글자가 자네의 트라우마가 된걸세. 하지만 그 토니 스타크란 글자는, 결코 토니 스타크 본인이 아니야."
"아, '토니 스타크'는 확실히 어디에도 박혀있죠. 소코비아의 벽이라면 어디든."
"막시모프..."
"난 그를 알아요."
스티브는 곤란한 듯 머리색과 똑같은 눈썹 사이를 조금 찌푸리며 눈을 깜빡였다. 일그러진 눈매 속으로 파란 눈동자의 절반이 감춰지면서 스티브의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그 위에 드리워진다. 완다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보는 스티브의 얼굴에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눈동자 속에 가지고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저 금발속에 감춰진 생각들은 무엇일까? 읽어보고 싶다. 완다의 눈이 완다의 무의식을 넘어 빨갛게 빛이 났고, 나타샤가 그것을 눈치챘지만, 완다의 살짝 벌려진 입에서 그녀가 지금 스티브의 마음을 읽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읽었다. 나타샤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단지 입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야, 중재해야 될 정도의 수위도 아니고. 어차피 화제는 관심없는 빅가이가 아니던가. 나타샤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팔짜을 끼고 슬며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사람의 말소리는 선명하게 잘 들리지만, 두사람의 사이에 끼지는 않으리라는 태도였다.
완다는 한걸음 물러나는 나타샤의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가, 곧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곤란해하는 기색을 어느새 지우고 다시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위로 커다란 유리창 너머의 오후의 햇살이 퍼졌다. 완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완다의 긴 속눈썹이 자신의 뺨에 닿는 느낌은, 이 평온한 오후에는 그야말로 간지러움 그 자체였다. 이런 햇살은 소코비아에는 존재하지조차 않았었는데. "당신도 그에 대한 내의견에 동조했었잖아요. 로저스. 내 말을 듣고 흔들렸고, 그길로 바로 토니 스타크를 막기 위해 달려나갔죠." 완다는 더욱 빠르게 눈깜빡임을 반복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란 건 아직 완다에게 조금은 버거웠다. "당신의 방패또한 몇 번이나 토니의 앞을 막았잖아요."
스티브는 완다의 말을 막지 않았다. 완다는 길게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새빨간 입술이 예쁜 모양으로 다물어지자, 그 위로 스스로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무거운 침묵이 내려왔다. 스티브는 완다의 입술에 걸려있는 그녀의 침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의 절망을 스티브는, 솔직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삶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던 절망은, 그 모습은 그야말로 스티브 로저스의 삶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스티브가 삼십여년, 아아 아니다, 구십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절망 속 그 어딘가에 완다 막시모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스티브는 결코 어색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이 말을 그녀에게 하면 그녀는 스티브에게, 오만한 말 하지말라고 화를 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자신이 오만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막시모프."
"......"
그녀의 말이 맞았다. 스티브는 토니와 늘, 반목한다. 반목을 반복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말들을 서로가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 말에 결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유까지도. 그리고 또한 그녀의 말이 맞았다. 스티브는 완다의 의견에 동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토니에게 달려가 아니나다를까, 그가 한 짓에 또 화를 내고 또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또, 그에게 방패를 던졌다.
"그래, 분명 자네 말도 맞지만, 완다..."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토니 스타크. 그 사람에 대해.
내가 그것을 너에게 말해도 될까.
말 해도 된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조리있게 말할 자신도 없거니와. 스티브는 완다의 작고 좁은 어깨에서 손을 치우고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토니 스타크에 대해 변명을 하고싶은 것도, 그를 좀 더 잘 이해해달라고 하고싶은 것도 아니지만.
"완다. 자네는 우리 모두의 뇌를 휘저어 우리에게 보고싶지 않은 것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지. 추궁하는 것이 아니야. 다시 기억해 보라고 말을 꺼낸거야."
"......"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우리가 본 환상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어. 토니 그사람도 어쩌면 그랬을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사람이 그 날 자네가 보여준 환상에 대해 말한 것을 들은바가 없네."
"......"
"나에겐 아무말도 해주지 않았어."
그가 자네가 보여준 환상에서 대체 무엇을 봤는지. 그 환상이 토니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왜 그가 그토록 모든 절차를 무시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그저 비밀, 비밀로 삼고, -모두에게 거짓을 말하며 혼자 일을 그렇게 서두르게 되었는지. 왜 결국 고립되어버릴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갔는지. 무엇에 그렇게 초조해했는지. 아무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허탈해하지 않고, 그저 눈을 빛내며 자신의 각오만을 다시 다져나갔는지를.
"그는 무언가를 봤어. 그의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무서운 것을."
"......"
"틀림없이 그것은 그를 둘러싼 모든 세상,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 ...우리들이 관련된 어떠한 환상이겠지. 그의 신경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였으니까, 틀림없이 미래에 관한 어떤 것이겠고,"
"아, 나는..."
"하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나눠주지 않았던 거야... 무엇을 두려워하고있는지 보여주지 않은 거라고. 타인에겐 뻔뻔하게 어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신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는 입다무는 그 행각을 어떻게 말할 생각인지. 그저 웃으며 치즈버거나 먹으러 가자고 뻔뻔하게 나올 생각이신가. 스티브는 피식 웃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웃음이 꽤 쓰게 흘러나왔다. "그의 그런 점을 인정해주고, 자네도 슬슬 사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만 할거야."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완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완다의 어깨가 뜨끈뜨끈해져 있었다. 스티브는 완다의 다소 표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 위에서 토니 스타크를 읽었다. 완다는 토니 스타크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난 수많은 순간의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가 갇혀있던 동안 봐왔던 벽에 박힌 토니 스타크도 틀림없이 그녀의 작은 머리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 되고 있겠지. 스티브는 눈썹을 구부렸다. 왠지 갑자기 무척이나 토니가 가엾게 느껴졌다. 타인의 마음을 그러나 어쩔 수 있겠어.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거두라고 명령할 수 있겠어. 그렇기에 토니 스타크는 완다가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그 이름이 희망이 되듯 또 누군가에게는 그 이름이 절망이 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캡틴 아메리카라고 결코 예외이지 않겠지. 나도 알고있어. 그러므로 토니, 나는 때론 자네가 가엾다가도 그 가여움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돼. 나 자신을 동정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있게 돼.
그리고 그저, 자네가 보고싶어져.
그저 그 이름이 못견디게 그리워지고.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완다를 바라보며 웃었다. 완다는 그 웃음에 이끌리듯 눈을 흔들었을 뿐 미소를 띄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웃는 얼굴을 보고싶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채 두사람을 번갈아가며 보고있던 나타샤는 스티브를 향해 크게 미소지어주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스티브는 그녀를 향해서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타샤는 웃는 얼굴 그대로 눈주름을 잡으며 더욱 웃었다. "그 사람 위로해주러 가는거야 캡?" 스티브는 늘 그녀에게 정곡을 찔렸을 때의 표정을 오늘도 어김없이 짓고서는 뭐라 대답하기가 곤란해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럴만한 주제가 되던가? 내가 아니어도 위로해 줄 미인이야 그사람 옆엔 많을텐데." 나타샤는 웃으며 스티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신만한 미인은 물론 없을거야." "그거 설마 칭찬이야? 설마 아니겠지?"
당연히 칭찬이지. 오늘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세큐리티 요원들에게도 내가 말해줄테니까. 나타샤는 스티브의 등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여전히 우뚝 선 채의 완다의 등뒤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위에 손을 올렸다. 방금전의 스티브처럼 말이다. 완다는 나타샤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단지 점점 멀어져가는 스티브 로저스의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셔츠밖으로 등을 반으로 가르는 그의 척추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완다는 그 척추를 타고 움직이는 스티브의 피, 근육, 그의 생명의 모든 것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는 보석인가요?" 완다의 의문형이 귀여웠다. 나타샤는 저도모르게 풋하고 웃었다. "모두에게? 아니면 그 빅가이에게?" 물론 모두에게. 물론 그 사람에게도. 나타샤는 입술을 오므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고, 나타샤의 귓가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토니 스타크는 의외로 울고있지 않았다. 사실 스티브 혼자서 생각했던 거였다. 혼자 어둠속에 남은 토니는 분명히 울고 있으리라고. 아니면 술을 마시고 있거나. 어쨌든 조명을 키우지 않은 것 하나만은 스티브가 분명히 맞추었다. 토니는 어둠을 더듬으며 다가오는 스티브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 좀 위로해줘." 토니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토니는 그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가 스티브 로저스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그래서 깨달을 수 있었다. 혼자 자신의 차를 몰고 그렇게 빨리 사라졌지만, 그래도 스티브가 자기를 찾아와줄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날 좀, 당신이." 화내지말고, 무언가에 대해서 묻지도 말고, 그저 내가 벌린 두 팔 사이로. 스티브는 소파에 걸터앉아있는 토니 스타크의 온몸에 내린 어둠을 바라보며, 언젠가 보았던 고향의 하늘을 떠올렸다. 고향의 하늘은 때로는 너무나 소중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그저 전쟁터의 흔한 밤하늘처럼도 느껴졌었고, 사람을 죽이고 난 후의 하늘은 핏빛처럼도 보였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구멍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지금 토니 스타크의 머리위로 내린 텅 빈 어둠을 바라보며, 그 어둠의 구멍속으로 자기가 뛰어든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그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의아심이 들었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 너는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었지, 토니 스타크를 향한 자신의 연민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래서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토니. 난 자넬 위로 하러 온 게 아닌걸."
"난 그저 당신이 보고싶어서 온 거야."
그리고 스티브는 선 채로 토니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기위해서는 충분히 허리를 굽혀야했다. 토니는 벌린 두 손으로 스티브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꼽 언저리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아니, 역시나 그 흐느낌은 그의 울음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신음처럼 내뱉는 그의 거친 숨소리가 스티브의 두꺼운 몸을 울렸고 스티브는 자신의 몸이 점점 뜨거워짐을 느꼈다. 토니의 목소리에 몸이 울릴때마다 스티브는 더욱 토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스티브의 입술위에서 토니의 머리칼은 몇 번이나 버석이며 스티브를 상처입혔다. 스티브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토니의 닿는 모든 곳에 키스했다. 스티브의 입술은 상냥했고, 부드러웠다. 토니의 귓가나 목덜미를 스치는 스티브의 입술만큼 부드러운 것은 없었다. "스티브..." 토니의 양팔에 힘이 들어가 더욱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맞닿은 피부에서 느끼며,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더 힘을 주어 토니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냥한 것이 보고싶어. 토니. 자네는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거야. 그리고 좀 자기를.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토니의 목소리에 이끌려, 도리어 스티브가 조금 눈물을 흘리고나니, 눈속이 시큰하고 따끔거렸다. 스티브는 눈안쪽에 고여있는 열기를 주체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한밤중에 나타샤에게 전화가 왔다. 깊은 잠에 빠진 토니는 스티브의 손을 꽈악 잡은 채 깨지 않았다. 스티브는 나타샤에게서, 완다가 알려준 토니의 환상에 대해 전해들었다. 그러나 완다가 그녀에게 정확한 영상을 묘사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토니의 환상은 토니가 품고있는 가장 큰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다고. 스티브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타샤는 전화를 끊기 전 스티브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당신이 본 환상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지? 스티브는 전화를 끊었다. 끊은 전화기에서 한참 인공 조명이 깜빡이며 흘러나왔다. 스티브는 다시 베개위에 머리를 뉘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둠으로 완전히 뒤덮힌 천장을.
그래. 토니. 그게 맞았다. 환상은 우리가 품고있는 가장 큰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과 춤을 추던 영상은 앞으로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야. 내안에서. 페기. 그 무엇보다 가장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가슴에 남아야할 장면이, 이제 반복되는 슬픔으로 내 안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넘쳐흐르겠지. 토니. 당신도 이런가. 지금. 몇번이라도 되풀이되는 환상 속 고통에 잠식될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또 그렇게 잠을 설치게 되고, 또 그렇게. 스티브는 고개를 돌려 잠들어있는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이 토니의 잠든 얼굴을 비추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토니의 뺨을 쓰다듬었다. 토니. 우리는 언젠가 또 다시 선택을 하게 되겠지. 우린 틀림없이 갈림길의 양쪽끝에 서 있을 것이고, 서로에게 손을 뻗지조차 못한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면서.
하지만 그래도
잊지 마
잊지 말아줘.
나에 대해서.
물론
너에 대해서.
그러니까 우리에 대해서 말이야... 스티브는 다시 눈을 감았고, 그와 동시에 토니와 깍지낀 채의 손가락에 스르르 힘을 빼내었다. 눈을 감으니 귀가 더욱 예민해졌다. 스티브는 자신의 심장소리와, 더불어 토니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제안의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done
영화를 보고 난 후 극중 캐릭터들의 환상에 대해 꼭 이야기해보고싶었었는데... 뭐 이렇게 되었음. 뀽. 토니 힘내라..<
사실 이거 쓰기 전에는 완다랑 스티브랑 대화할 때 옆에 있는 게 나타샤가 아니라 피에트로로 할려고 했었다. 피에트로 왜죽었냐 ㅠ 그래서 내가 쓰는 어벤2 내용엔 다 퀵실버가 살아있는 것처럼 ㅋㅋㅋ 쓰려구 ㅋㅋㅋ 했는데 ㅠㅠ 흑 뜻대로 안 되더군... 다음에는 꼭 퀵실버를 쓰고싶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