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스팁] Wearing masks 15. 01. 17
Wearing masks
"...죽이네요." 스파이더맨은 창밖의 끝내주는 마천루의 숲에 넋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 면이 완벽한 유리로 되어있는 스파이더맨의 방은 캡틴 아메리카의 방과는 그 면적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태양이 창문안쪽으로 쏟아지고 있어 더욱 환하고 넓어보였다. 캡은 눈꼬리를 내리며 가느다랗게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있어 정확한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스파이더맨이 즐거워보인다. 방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고. "자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스티브가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하자 스티브쪽으로 고개를 돌린 스파이더맨이 방글방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짱이에요." 두 손을 유리벽면에 갖다댄 채, 스파이더맨은 그대로 천장으로 기어올라 갈 것 같은 기세로 상체를 흔들었다.
스파이더맨을 어벤저스에 영입시키고 겨우 이틀이 지났다. 토니 스타크는 스파이더맨을 불러 어벤저스 아이디 카드와 함께 어벤저스 맨션의 방 한 칸을 마련해주었다. 스파이더맨은 아이디카드는 냉큼 받았지만 방은 거절하였다. "어차피 전 들어가 살 생각도 없거니와,"그렇게 운을 띄우면서 스파이더맨은 나이에 걸맞게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어보였다. "아무리 어벤저스의 멤버라 해도 저의 기본방침은 변할 게 없을 거거든요." 아무리 그 상대가 히어로의 캡짱, 혹은 전설의 히어로라 할지라도 내가 이 마스크를 벗어 맨얼굴을 드러낼 일은 결코 없을테니까. 스파이더맨은 그렇게 말하는 내내 미동없이 허리를 곧추 세우고 서 있었다. 토니는 스파이더맨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스파이더맨에게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스파이더맨은 저도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말없이 무겁게 입을 다문 아이언맨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기 힘들었다.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고싶어서 좀이 다 쑤셨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어벤저스에 영입되는 것은, 그야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하지만 아무리 영광스런 일이라 할지라도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정한 일을 바꾸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아이언맨이 보기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듯한 스파이더맨. 새파랗게 젊은 히어로행세의 야경꾼이 기본방침이니 얼굴은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느니 잘도 말하는군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스파이더맨으로써는 정말이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토니가 스파이더맨을 상대하는 내내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캡틴 아메리카, 이때까지 팔짱을 낀 채 관망만을 하고 있던 스티브 로저스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서 토니의 마음을 살피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린 것이, 바로 이때였다. "자자." 어깨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면서, 스티브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웃음에 못지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무 날세울 것 없네, 스파이더맨. 토니는 원래부터 어벤저스 멤버들에게 맨션의 방 하나씩을 챙겨주는 사람이야. 필요하면 필요할 때 쓰라고 미리 필요없을 때에 챙겨주는 거지. 그 방을 어떻게쓰는가는 전적으로 자네몫인 거고. 그러니 그냥 받아두게." 그렇게 말하면서 스티브는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의 얼굴을 마주바라보던 토니는 찌푸린 미간이 그새 쑥쓰러웠는지 슬그머니 스티브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스티브는 똑바로 스파이더맨에게 걸어와 이번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토니의 어깨를 두드렸던 때와 마찬가지의 강도로, 그 상냥한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자네의 신념을 바꾸라고 말하지 않네. 아무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그렇지?" 스파이더맨은 그때 자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 것을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하다고 느꼈더랬다. 그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정말 백프로 내의지였던가? 무언가에,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캡틴, 그의 웃음에 이끌려 저도모르게 끄덕이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마치 자석처럼 나를 끌어들였다. 나는 속절없이 끌려가는 철과 같았고. 아무 저항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기류에 목까지 절어, 하지만 그것은 또한 너무나 상냥하고 거대해서 도대체 저항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고야 마는, 이런 것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좋은건지.
"그럼 스파이더맨, 편히 쉬게." 스파이더맨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이마를 유리창에 붙이고 우뚝 선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은 내심 무척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하며 고개를 돌려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어제부터 그 한결같이 사람좋은 미소를 얼굴에 띈 채 스파이더맨을 지켜보고 있었다. 캡틴이 보기에 고층빌딩의 뷰에 넋을 놓고 있는 스파이더맨으로 보였을테고, 그것은 정말이지 스파이더맨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부터 당신 생각때문에 이렇게 자꾸 정줄을 놓게된다는 걸,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스파이더맨 스스로조차도 아직 그 원인의 이름을 모르는 술렁거림을, 그에게 먼저 들키고 배길쏘냐. 스파이더맨은 머리를 긁적이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어제부터 한결같이 편한 복장의 스티브 로저스였다. 스스럼없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보이며 "나는 스티브 로저스라고 한다. 스파이더맨, 어벤저스에 들어오지 않겠나?"라고 스파이더맨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던 그 날의 스티브 로저스와, 편한 자켓 하나를 걸치고 있는 오늘의 스티브 로저스는 이상하게도, 크게 달라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진해서 스파이더맨의 잔처리를 맡아주었다. "지금부턴 내가 할테니 자넨 그만 쉬어, 응?" 그렇게 말하며 스티브가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지켜보는 스파이더맨의 가슴이 괜히 더 뛰었더랬다. 스파이더맨은 그 뒤 스티브에게 스타크타워의 어벤저스 회의실에 관한 설명을 이것저것 들었고, 오늘은 이렇게 맨션의 스파이더맨의 방에 안내를 받은 참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그동안 내내 다소 부산스러웠고 나이에 맞게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전부 드러냈다. 스파이더맨 스스로도 돌이켜보면 어지간히 정줄을 놓고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더랬지. 그러나 스파이더맨이 그러는 내내 스티브는 성가셔하는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고 그저 언제나처럼의 상냥한 태도로, 설명은 끊이지 않고 마치 자장가같이 부드러운 선율이 녹아있는 목소리로. 봐, 지금도. "그럼 스파이더맨, 편히 쉬게."라니. 스파이더맨은 더욱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스크를 뒤집어쓴 뒷목부분이 손가락 끝에서 조금씩 구겨졌다.
"ㅡ참, 상냥하세요. 캡틴. 상상이상이에요."
불쑥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그렇게 튀어나갔다. "진심이에요."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성급히 뒷말을 붙였지만 그 서둘러 붙인 말조차 마뜩치않다. 스파이더맨은 순간 심장에 차가운 칼날이 한 번 뚫고 지나간 것 같은 쎄한 바람을 느껴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본 스티브는 스파이더맨의 그런 말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슨 그런 말을. 과찬이 자연스러운 친구였군 이제보니." 그렇게 말하고 하하 웃는데, 어딘가 쑥쓰러워하는 것 같기까지 하잖아. 정말로 저런 사람이었던건가, 정말로 저런 사람이 있었던건가, 이땅에. 스파이더맨은 두 손으로 마스크의 목부분을 꽈악 움켜쥐고 저도모르게 턱위로까지 끌어올렸다. 스파이더맨의 턱아래에 걸려있던 스파이더맨의 마스크가 그의 두 손안에서 주름진 채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당신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얼굴을 드러내놓지 않는 애송이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게 도리어 편할 것 같지 느껴졌다. 거의 무상처럼 느껴지는 압도적인 신뢰는, 도리어 있을 곳을 불편하게 만들어. 난 별로 모범생인 것도 아니란 말이야, 집이든 학교든 히어로세계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얼굴을 보이고 말하라고, 당신처럼 당당히. 그렇게 말해요." 그렇게 말해줘요. 당신 말때문에라는 핑계 하나 어깨에 얹을 수 있게, 얼굴을 드러내도 나 스스로에게 당신때문이라 변명할 수 있게 그렇게 말해달라고. 스파이더맨은 입술위에 닿는 맨션 내의 부드러운 공기에 깜짝놀라 아랫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스티브가 그 떨림을 모르길 바랐다. 적어도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기를, 하고. 스티브가 부드러운 침묵속에서 가느다랗게 숨을 내뱉으며 소리없이 스파이더맨의 옆에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스티브 로저스는 스파이더맨의 마스크 끝을 양쪽 볼에서 움켜잡았다. 그리고 거의 말려올라가 스파이더맨의 윗입술까지 드러난 마스크를 위로도, 아래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단지 스티브 로저스는 가볍게 허리를 구부렴 스파이더맨의 왼쪽뺨에 자신의 두툼한 입술을 갖다대었다. 거의 닿았다는 느낌도 없이, 심지어 숨소리 한 번 흔들리지 않은 가벼운 입맞춤. 그 종이 한 장, 깃털 한올보다 더 가벼운 입맞춤에조차 숨내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스파이더맨은 딱딱하게 굳어 숨을 멈추었다. 스티브는 그런 스파이더맨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가까워진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며 생긋, 스파이더맨의 콧잔등을 향해 웃음을 날렸다. "푹 자게. 좋은 꿈 꾸고." 그리고는 커다란 손으로 딱딱하게 굳은 스파이더맨의 어깨를 두어번 내리치고 스티브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스파이더맨의 방문을 향해 걸었다. 걸음이 무척이나 빨라 스티브는 금방 방문을 열고 맨션의 복도로 사라졌다. 고급맨션은 문을 여는 소리도, 닫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수십초 후에야 간신히 자신이 숨을 쉬어야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는지, 스파이더맨은 천천히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스파이더맨은 반 무의식으로 오른손을 들어 방금 스티브가 선사한 굿나잇키스가 닿은 뺨을 감쌌다. "...믿을 수 없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스파이더맨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끝부터 덜덜덜 떨려왔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저 어린애에게 하는 듯한, 이웃집 아는 소년에게 하는 듯한, 심지어 자기조카에게 하는듯한 밤안부인사에 이렇게까지 심장이 삐걱거리면 안 되는 건데. 스파이더맨은 이를 딱딱 부딪혔다. 콧잔등에 걸려 마스크가 덜컥덜컥 거렸다. 바닥에 얼굴을 부비듯 허우적대다가 스파이더맨은 마스크를 전부 벗어버렸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마스크 하나조차 방해가 되어서. 하지만 역시 마스크를 집어던지지는 못하고 그대로 주먹쥔 손에 콰악 움켜쥐고 있다가, 스파이더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스크의 촉감이 사정없이 스파이더맨을 눌러댔다.
"아... 세상에 이런 반칙이 있어도 되는건가..."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심지어 귓불까지 새빨갛게 되어서. 피터 파커는 다시금 숨을 멈추었다. 갈비뼈까지 삐걱대잖아. 안 돼, 이러곤 못살아. 이러곤 제명에 못산다고. 이러다 캡이 오늘밤 꿈에까지 나오면 어떡하지. 피터 파커는 진심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가느다란 신음이 피터 파커의 방안을 가득 채웠다.
- done
이거슨 스파이더맨 애니를 보다가 생각이 나서 쓸라했던건데요. 한 한시간 정도 걸렸네요. 근데 쓰다보니 왠지 여기서 끊어버리게 ㅋㅋ 되었어요. 사실은 뒤에 얘기를 더 쓸 생각이었는데. 예를 들어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가 사이가 너무 좋아서 피터 파커가 막 대놓고 질투를 한다던가... 젊으니까여... 그런 걸 오히려 더 쓰고싶었던거거든여? ㅋ 근데 스파이더맨 애니 볼때 처음 어벤저스 맨션에 가서 아무리 당신들(어벤저스)앞이래도 마스크는 벗지않겠습니다! 라 하는 스파이더맨을 보고 감명을ㅋㅋ받았던거라 ㅋㅋㅋ 그 얘기를 써놓고 보니 그뒤는... 뭐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었어여... ㅋ
짧습니다. :) 썬샤인 스티부는 언제 써도 재밌어요. 영어벤저스들에겐 거의 숭배의 대상이기까지 한 스티브 로저스. 난 그런 대상으로써의 스티브 로저스를 쓰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물론 능욕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만...(뇨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