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 01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빗소리가 아주 연했다. 우산위로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솜털같은 비다.

 

 나는 오늘부터 십대 청소년의 가정교사가 되어야 했다. 개인 가정교사는 사실 거의 이십년만이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것에 지난 십년동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자신이 생기질 않아, 한 삼일을 망설였으나 조만간 닥칠 생활고가 걱정이 되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일주일뒤에 시작하면 된다는 하워드의 말에 기대어 일주일동안 열심히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하였는데, 여전히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결국 진도가 나가지 않는 마음의 준비는 뒤로 밀어두고 문제집이나 교과서들을 꺼내어 예습복습이나 잔뜩 하기로 하였는데, 그것또한 어떨지. 오랜만에 십대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를 펼쳤기 때문인가 몇개의 개념에 대해서는 낯설기까지 하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 헤매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새삼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에게 정확하고 또렷하게 개념들을 설명하며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겠지... 할 수 있겠어, 스티브 로저스? 역시 자신은 없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강의실에서 그다지 많지 않은 인수의 학생들과 함께, 어쨌든 바람이 불때에나 느껴지는 먼하늘의 나무냄새처럼 맑고 소소하게 진행해 나갔던 나의 강의시간들은 적지않은 만족과 평화를 안겨주었었다. 그안에 나의 자신감과 나의 행복이 전부 담겨 있었는데. ...물론 그 소소한 시간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나의 한심함 탓이고, 그래서 난 다른 누구에게 더 이상 그 강의실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된 것에 짧은 하소연도 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는 것은 잘 알고있지만, ...어쨌거나 그런저런 이유로 개인 가정교사일을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스스로의 한심함을 정면에서 마주해야한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야하겠지. 나의 이런저런 혼란따위 오늘 만나게 될 학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내가 자신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좋아, 겉으로나마 자신없는 자신을 흘려서는 결코 안 될 것이었다.

 

 바람을 타고,

 빗줄기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나,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 벽돌의 담장은 높고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는데, 아카시아나무는 마치 덩쿨식물처럼 길게 담장아래까지 자라 있었다. 무성함의 극치였다. 나는 연하게 웃었다. 내가 웃음지을 때 입꼬리를 아주 약간만 당기는것을 보면, 피터는 언제나 희미하다고 표현하는데, 지금의 내 미소가 아마 그럴 것이었다. 빗줄기과 빗줄기를 우산으로 끊으며 아카시아꽃에 가까이 다가가니, 시간차를 두고 아카시아꽃의 단향이 코아래로 스미었다. 담장전체가 정리되지 않은 아카시아꽃의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코앞까지 다가가 보니 흰색에도 저마다 깊이의 차이가 있어서 눈이 즐거웠다. 그리고 꽃위에 맺힌 빗방울들은, 가감없이 전부 투명해보였고. 건강하고 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자연의 작품 '꽃들의 포개짐'과 '잎들의 겹침'을 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나의 자격지심따윈 아무래도 좋다. 단 한명의 학생이라도 소중하게 여기고, 오늘의 만남을 소중히 가꿔나갈 수 있기를. 스티브 로저스는 스스로를 좀 더 믿어야한다. 학생들에게 좋은 교수라 스스로 자청할 수는 없어도 언제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되뇌이었다. 난 괜찮다. 괜찮은 사람이다.

 

 담장의 끝이 보이는 가 싶더니, 아주 크고 육중한 철의 문이 보였다. 화려한 철문의 장식이 눈을 사로잡았다. 긴 담장의 끝이, 나의 목적지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꺼내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워드가 말한 주소지가 정말 여기가 맞았다. 이건... '사운드 오브 뮤직'이 떠오르는 시추에이션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잘못했다. 난 자신있다고 크게 외치며 걸어왔어야하는 건데. 그리고 확고하면서도 자상하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겉으로 보기에 오래되고 큰 저택의 대문같았으나 21세기식 초인종과 잘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들리면서 대문 위의 CCTV같은 것의 고개가 움직였다. 나는 괜히 긴장에 목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빗방울이 조금씩 더 굵어졌다. 나는 이마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끝으로 살짝 훔치며 발끝을 주춤였다. 눈으로 보기에 우산에 구멍이 뚫린 곳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어째서 안쪽으로 빗방울이 자꾸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늘 고민해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문제였다.

 

 검은 우산을 쓰고 저택의 정원을 빠른 걸음으로 돌아 걸어나온 것은 키가 크고 점잖은 얼굴의 노신사였다. "실례합니다. 하워드 스타크씨의 소개로 온 스티브 로저스입니다. 이 저택 자제분의 가정교사를 오늘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노신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빨리 그렇게 인사하고 고개를 가볍게 숙이자, 집사의 표정이 약간 이상해졌다. 작은 주름투성이의 눈이 조금 의아한 빛을 띤 것 같은 것은데, 나의 착각인 것일까. 아니, 아니다. 잘못본 것이 아니다. 노신사의 표정은 확실히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한 번 더 우산안쪽에서 떨어져 이마위를 구르는 빗방울을 훔쳤다. 인사의 어딘가가 이상했던가, 아니면 좀 더 체력좋고 젊은타입의 교사를 생각했었는데 내가 온 것이 의외였던 것일까... 나는 어깨아래로 축 처지는 가디건을 어색하게 위로 훔쳐올리며 소매를 쭈욱 잡아당겼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타고난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는 이제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일리가 없으니까.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골라도 품이 커서 아무 맵시도 나지 않는 것은 십대, 이십대를 걸쳐 완전한 체념의 길로 나를 인도했다. 그렇다, 나는 완전히 체념한 것이다. 체념한 뒤로부터는 남자다운 어떤 것을 갖고싶다는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 외모를 평가하는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괜히 가족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나의 질병들이나, 병원기록에 남아있는 나의 각종병명들에 대해서마저 전부 들켜버린 것처럼 지레 겁을 먹게 되기도 하고. 나는 더욱 몸을 움츠리다가, 노신사가 아래로 눈을 깔고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고선 어색하게 허리를 다시 폈다. 아니, 어쩌면 맞인사를 해야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노신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금방 알게 되었다. "네. 주인님께 이미 말씀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스티브 로저스님. 저는 스타크가의 집사인 에드윈 자비스라고 합니다. 자비스라 불러주십시오." 점잖은 얼굴만큼이나 점잖은 모습으로 노신사, 아니 노집사는 언제 동요했느냐는 듯한 태도로 무표정하지만 결코 딱딱하지 않은 얼굴을 한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아까전 집사가 한 표정을 그대로 짓게 되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듯 눈을 빛내며 약간 입을 벌리는 멍한 얼굴. 나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였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가, 하워드 스타크 그 친구의 본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단지 하워드가 내게 가정교사 일자리를 주기위해 그가 부탁을 한 친구 중 한명의 집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하워드와 하워드의 회사에서 만났던 그 날, 내가 말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그 멍청한 시간강사직을 그만둬서 난 정말로 안심했네, 스티브. 자네정도 되는 사람이 언제까지 구제불능 바보들을 상대하려는가. 차라리 집에서 노는 게 낫지.

 

- ...음, 하워드. 글쎄 그건... 뭐랄지. 사실 난 내가 그만둔 게 아니라 대학에서 잘린거고. 그래도 내 학생들이었던 것 만큼 바보라고 하는 건 듣기가 썩 좋지는 않네만.

 

- 나도 내 후배격인 학생들을 바보취급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네. 내가 바보라고 하는 것은 그 대학을 둘러싼 멍청이 꼰대들일 따름이지.

 

- ...하워드. 자넨 참 여전하군.

 

-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스티브.

 

- ......

 

- ......

 

- ...아, 내가 너무 시간을 뺏는군. 회사일이 바쁠텐데. 차 잘 얻어마셨네. 나는 슬슬 일어나보도록 할까.

 

- 아니아니, 잠깐 기다려줘 캡틴. 널 오라가라 멋대로 부른건 나인데, 용건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이렇게 제멋대로일순 없지. ...나는 단지 자네가 혹여 기분나빠할까봐 조금 조심스러웠던 거야. 내 말에 부디 기분나빠하지 않길 바라네. 난 자네가 일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고 있을거라 멋대로 생각했어.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자네를 그 머저리소굴 같은데로 보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런 하워드의 모습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할 말이 있음에도 바로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이라니. 사실 처음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하워드가 나에게 할 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하게 호응하는 것은 나의 질리지 않는 버릇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하워드의 망설임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잘하면 그가 오늘내에 말하지 못할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그를 초조하게 만들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가 멋대로 오라가라 하는 것에도 기분나빠 하지 않으며, 정말로 차 한 잔 달랑 마시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기분나빠하지 않기로. 스타크인더스트리를 구경하는 것만도 충분하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일자리에서 잘리고 지나칠정도로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약간 웃는 얼굴 그대로 하워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하워드는 나의 기색을 살피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더니 이내 짧게 숨을 내쉬고 눈을 깜빡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더욱 낮아져 발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자네가 가정교사를 한 번 해봐주었으면 한다네.

 

- ...가정교사를?

 

- 그래. 캡틴. 네가 기분나빠하지만 않는다면 난 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싶어. 그 멍청한 시간강사 일보다 모든것에서 훨씬 더 좋은 조건이 붙는 자리야. 시간도, 페이도, 하여간 표현가능한 모든 면에서 훨씬 더. 그렇지만 네가 스스로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남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만은 그대로이지. 이번에야말로 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교양과 인성, 인품을 위한 배려넘치는 교육을 할 수 있게 되는거야.

 

- ...하지만, 하워드. 아니, 날 생각해주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정말로 고마운데. 게다가 자네말대로 내가 지금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형편이기도 하고. 하지만 가정교사라니, 다수를 상대하는 것과 개인을 상대하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데다가... 학생때 했던 과외아르바이트 경험외엔 전무해서 솔직히 자신이 없네만.

 

-  자네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수 있을건데도 불구하고? 

 

- 아니, 결코 그렇지 않.. 

 

- 아니, 결코 그럴 수 있네. 

 

- ...어디서 그런 나 자신도 모르는 나에 대한 자신감이 나오는 건가...

 

- 캡틴을 이십년 이상 보아온 친구로써의 자신감이지.

 

- ....하워드, 자넨..

 

- 음?

 

-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하얗고 높은 담장의 바깥에서 보았을 때보다 저택은 훨씬 크고 넓었다. 저택을 360도로 둘러싼 정원도 크고, 아름답고. 잘 정돈된 조화로운 전체에서 여름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나는 자비스의 뒤를 성급하게 쫓지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천천히 걸으며, 투명한 빗방울 사이사이로 저택의 정원들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우산너머로 보는 타인의 집은 꼭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얼굴 표정을 마이페이스로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워드의 아들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만난적은 없지만 동기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워드 본인만큼이나 유명했다. 세계레벨의 천재 하워드 스타크의 재능을 전부 물려받은, 어쩌면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비교할 또래따위 존재하지 않은 어린 천재. 하워드와 같은 학부의 동기들이 늘 푸념아닌 푸념으로 하워드와 싸잡아 아들의 욕을 하곤 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넘기곤 하였는데, 그저 딱딱한 웃는얼굴로 그 잘못된 발언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에 대해서 늘 회의감을 갖곤 하였다. 그렇다고 정색하며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쉽게 할 수는 없었다. 하워드 앤서니 스타크라고 하는 지나칠정도로 완벽한 존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을 그저 몇마디 말로 풀어댈뿐인 별 의미 없는 그 행동들에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하워드의 존재가 개인의 질투를 자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거기에 그의 어린 아들까지 싸잡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정도로 하워드 스타크의 존재는 강렬하다는 것이리라. 그의 아들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먼저 현관에 올라선 자비스가 자신의 우산과 함께 나의 우산을 받아들으려 손을 뻗었고, 나는 집사의 존재가 솔직히 어렴풋하여 어떻게 대해야할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자비스가 이 집의 예의범절에 대해 잘 알테니 그를 거스르지 않기로 하고,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그에게 우산을 건네었다. 그는 현관의 문을 열자마자 역시나 대기중인 몇몇의 하인들에게 우산을 건네고는 나의 외투도 받아들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였다. 구둣발 끝에 빗물과 약간의 진흙이 흘러 더럽히는 것에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잘 정리된 현관 위로, 나는 한발을 채 내딛지 못한 채 그렇게 조금 주춤하고 있었다. 자비스는 그런 나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처음 본 그 부드러운 무표정 그대로였다.

 

 "토니도련님의 방은 이층의 중앙 왼쪽으로 첫번째방입니다. 타원형의 이층에서 제일 큰 방이라 금방 알아보실 수 있을테니 이쪽 중앙계단을 이용하시면 될겁니다."

 

 "...계단 위의 카펫이 너무 근사하군요. 신발바닥이 비에 젖어 있어서 카펫을 밟고 오르기가 좀 죄송스럽습니다만."

 

 "그런 것을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로저스님."

 

 "그럼 염치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자비스씨."

 

 그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나의 인사에 보답하는 집사의 태도는 아무 군더더기없이 말끔했다. 나는 갑자기 이 저택의 담장에 길게 내려와있는 아카시아나무들을 떠올렸다. 이 집사가 이 저택전체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아카시아들을 설사 담장밖이라 할지라도 팽개칠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질서하게 보였던 담장아래의 긴 아카시아들은 분명 이 집사 손에서 정돈되어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억속의 아카시아들이 달리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움까지 달리 느껴졌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간신히 희미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를 유지한 채 중앙의 가장 넓은 대리석의 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약간의 긴장감이 목아래에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발밑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카펫이 내 걸음에 따라 미세하게 주름이 지어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낡은 구두의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진흙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솔직히 너무 신경이 쓰이는데... 아니, 아니야, 스티브 로저스. 신경쓰지 말자. 이게 저분들의 일인거다, 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봐. 내가 계단을 마저 오를때까지 숙인 모습 그저 그대로이고, 우산을 받아들은 몇몇의 메이드들은 팔을 움직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저택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그러한 저택의 도련님을 위해, 추천을 받아 찾아온 사람인 것이다. 의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나는 이마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가마위로 쓸어올리며 고개를 똑바로 들어 이층의 앞을 바라보았다. 머리칼 끝이 에 젖어 눅눅해져 있었다.

 

 바로 보이는, 넓은 이층방에, 활짝 열려있는 문 너머로, 앤소니 에드워드 스타크는. 

 

 어쩌면 현관의 철문에서부터 자비스의 인도를 받아 정원의 가운데를 가르며 걸어오는 우산아래의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넓은 방의 한쪽면 가득한 창문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고, 비바람에 그의 오른쪽 어깨의 티셔츠 소매가 푹 젖어 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 아래에 있는 여러권의 난폭하게 쌓여있는 책들의 머리말들도 대부분 젖어 있었다.

 하얗고 얇은 창문보다 큰 커텐이 여러겹으로 나부껴 토니 스타크의 진한 갈색 머리칼과 함께 방향없이 날리었다.

 

 나는 당황하여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가-방안의 바닥에도 이루어 말할수없이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어서 구두바닥을 걱정해야했겠지만 지금 당장 비를 맞고있는 토니의 걱정이 먼저 몰려와 솔직히 바닥을 신경쓸 새가 없었다-손을 뻗어 토니가 밖을 바라보고 있는 창문을 서둘러 잡아 당겼다. 바깥을 향해 열리는 창문이라 몸을 최대한 밖으로 뻗어 문을 닫아야했고, 그와중에 얼굴의 대부분을 비에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쫄딱젖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정도로 비를 맞아, 나는 탕소리가 날정도로 급하게 창문을 닫은후에 바로 턱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비를 맞지 말아야지. 토니 스타크."

 

 가장먼저, 그에게 건넨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비를 맞지 말아야지. 토니 스타크.

 소년의 이름의 발음이, 입안에서 맴돌아 간지러웠다.

 

 또 젖은 머리칼이 이마아래로 흘러나와, 나는 나의 머리칼을 이마위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돌려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곧은 콧날과 그 아래의 약간 두툼한 입술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가슴이 콕하고 뛰었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 소년의 옆모습에서 젊은날의 하워드를 기대했던 것일까. 그 앳된 옆모습에서, 붉은 뺨과 진한 눈썹과 긴 속눈썹에서, 나는 하워드의 스무살때의 모습을 떠올릴수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하하하하. 오자마자 선생흉네네."

 

 "......"

 

 "당신?"

 

 단지 아름답게 생긴 눈동자가 데굴 구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나는 한동안 비죽이는 그의 입술만을 보고 있었던 것같다.

 파란 깊은 눈. 또래답지않게 지나치게, 차분하면서

 약간 슬퍼보였다.

 안타깝게도.

 

 

 

 

 

 

flower 02 

 

 집에 거의 도착할때가 되서야 빗줄기가 약해졌다. 왼쪽 어깨가 전부 젖어서 소매로 성의없이 쓸어내리며 우산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우산을 접어도 될 것 같아 냉큼 접으니 연약한 빗방울이 얼굴위에 톡, 머리위에 톡, 어깨위에 톡하고 떨어졌다.

 

 스타크가의 저택과 나의 집은 동네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버스를 타도 거리가 꽤 되는데다가, 사실 우리집 자체도 동네의 외곽이랄 수 있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리고서도 삼십분정도는 더 걸어야만 했다. 버스를 타는 것도 조금 긴 산책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지만, 아침출근시간을 늦출 수 있기를 바란 것은 그것때문이였다. 하워드는 돌아오지 않았기에 의논은 노집사, 자비스에게 하였고 자비스는 흔쾌히 편한대로 하라고 해주었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출근시간은 햇살이 약간 강해지는 오후가 되었고, 강의는 하루에 쉬는시간을 끼고 네시간, 나는 토니 스타크와 일주일에 세 번을 만나게 되었다.

 

 토니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 같다.

 

- 기본적으로 날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거예요. 스티브 로저스 선생님. 왠만한 것은 독학으로 습득이 가능하고, 아니 애초에 지금의 나에게 굳이 교사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일 수 밖에 없거든요. 당신이 나의 아버지의 친구라면, 나에 대해서 더더욱 잘 알지 않나요?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를 능가하는 천재라는걸.

 

 그것에 관해서 그러나 아무런 언급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스타크가의 상황에 대해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것이 없었고, 설사 아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언제나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의 사생활에 관련된 것이라면 범위는 더욱 좁아진다.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정도로 막되먹진 않았지, 스티브 로저스는. 그래서 나는 토니의 사납게 치켜뜬 눈썹이나 미소짓는 입술이 내뱉는 사나운 말투의 발언들이 별로 불쾌하게 여겨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얼굴을 바라보며 여전히 연하게 웃고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술을 비쭉이며 토니는 벌떡 일어나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넓은 방 안의 윗부분에 쉘터처럼 작은 다락방이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은 빼곡하게 책이며 잡동사니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넓고, 크고, 무질서하지만 성격이 드러나면서도, 아름다운 방이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가디건을 쓸어내리며 다락방에서 한 번씩 히끗히끗 보이는 토니의 갈색 머리칼을 향해 또 조금 피식, 하고 웃었다. 오늘은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리라. 뭐 어차피 오늘부터 당장 수업을 시작하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토니에게, 정확히는 토니의 뒷통수를 향해 짧게 인사하고 금방 그의 방을 나서고 다시 집사를 찾았다. 자신의 방을 쉽게 나서는 나의 뒷모습을 소년이 지켜보았는가 보지않았는가 하는 것은, 지금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또 톡, 하고 떨어진 빗방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사람이 없는 쪽 벽을 향해 우산을 두어 번 털어냈다. 우산에 맺혀있는 빗방울들이 벽에 부딪혀 빗살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손끝이 젖은 채 그대로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왠지 등줄기가 싸했다.

 

 토니 스타크는 동그란 어깨와 뾰족한 입술을 갖고 있었다. 연한 갈색의 피부는 뽀송뽀송해보였고, 맨들한 턱 아래로 곧은 목줄기는 토니 스타크가 앞으로 더 얼마든지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하였다. 눈동자가 큰 두 눈이 한곳을 고정하지 않고 쉴새없이 양쪽으로 흔들리며 산만했는데, 나는 그다지 그게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방을 가득 채운 여러 서적들과,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테크놀러지들. 꼭 토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를 정말 가르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에게 가르칠만한 것이 있는지조차. 어쩌면 정말로 나는 토니에게 교양과 인성, 인품을 위한 배려넘치는 교육하나만을 위해서 고용된 것이 아닐까. 아니아니, 더 솔직하게, 어쩌면 정말로 단지, 학교를 다니지 않는 토니 스타크의 실질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타인의 눈막음 정도는 가능한 명목상의 가정교사가 필요했던건지도. 솔직히 하워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맡게될 아이에 대해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고쳐주지 않은 것만으로, 나는 이미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뿐.

 

 "스티브! 왜 이렇게 늦어요!"

 

 나의 이름을 외치며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깨고 고개를 들어보니 집 문앞에서 피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낙엽부스러기가 겹겹이 쌓여있는 웅덩이 위를 젖은 발로 몇 번이고 차는 것을 반복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내가 피터를 데리고 그의 저녁을 챙겨줘야하는 날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작은 손을 번쩍 들어 마구 위에서 휘저으며 나를 반기는 피터에게 하하, 웃으며, 나도 손을 같이 흔들어주었다. 그래, 하워드의 의중이 무엇이든 그런 것은 별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가 권해준 일을 받아들였고, 오늘부터 그 일을 해야한다. 일주일에 세번씩, 한번에 네시간에 걸쳐.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 또래와 마찬가지로 다소 산만하고 침착하지 못한 피터이지만, 그래도 메이의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는 면모가 세가지 존재한다. 첫번째, 신발의 바닥이 심하게 더러워지면 현관밖에서 제대로 털고 집으로 들어간다. 두번째,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손,발을 제일 먼저 닦는다. 세번째, 식사시간이 될때까지 놀지 않고 소소한 심부름등을 성심껏 돕는다. 나는 피터가 부엌의 식탁주변을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혼자 분주해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내가 접시를 건네주면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거침없이 내며 식탁위에 탁탁 내려놓고, 수저를 찾아 꺼내어서는 또 소리를 내서 탁탁 내려놓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금방 다시 돌아올게요 스티브!"하고는 힘차게 밖으로 나가버린다. 또 무슨 즐거운 생각이 난걸까. 나는 웃으며 하고 있던 앞치마를 풀어 걸이에 걸어두고 빈접시를 채웠다. 아직 공기가 비에 젖어 있어 방안의 난로를 피웠고, 땔감들이 불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허공에 흔들릴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난롯불을 다시 눈으로 확인하기를 반복하였다. 불은 뭉친 채 같은 방향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투명한 불길속에서, 나는 또 오늘 낮, 나의 어린학생이 될 토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그래. 난 평범하게 역사학을 가르치던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역사학에 관련된 것들 외엔 아는 것이 그다지 없어. 그러니 토니, 음, 안소니 스타크 네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너에게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은 극단적으로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 ─그냥 토니라고 해도 돼요. 선생님. 미리 말해두는데, 난 브리태니커도 체임버스도 전부 읽었고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어요.

 

- 그거 굉장한데. 그럼 평범하지만 재미없는 학교 교과서로 공부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거겠구나. 잘됐다. 실은 나도 최근 그 교과서들을 다시 읽어봤는데, 졸음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몰려오기에.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나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 ...그냥 적당히 시간이나 떼우고 가란 말이었는데요.

 

- 음, 그래. 알았다. 적당히 알아서 시간 떼우고 돌아가는 방향으로 하마.

 

- 그래요, 그런식으로,

 

- 물론 너와.

 

- ! ......

 

- ......?

 

- 당신, 약간 귀찮은 타입이었군요. 하워드 스타크의 친구중에 당신같은 사람도 있는건가...

 

- ...? 지금 너, 아버지를 뭐라고 한거야? 토니, 아버지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선 안 되는거야.

 

- 그런것에 신경쓰는 사람따위 없으니 당신도 신경꺼줘요.

 

- 토니 스타크.

 

- 그것보다, 선생님. 왜 선생님 친구들은 선생님을 캡틴이라고 불러요?

 

- ......

 

- 네? 선생님.

 

 귓불이 간지럽다. 토니가 선생님이라고 일부러 힘을 주어 발음할때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손을 들어 귓불을 긁으면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인가. 사실은 전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  

 

 갈 길이 아주 멀 것 같다. 무슨 길인지조차 모르는 이 시점에서조차.

 그런 생각이 든다. 

 

 밖으로 뛰쳐나간 피터가 숨을 잔뜩 몰아쉬며 다시 뛰어왔다. 나는 피터를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피터의 양손에 가득, 메이와 우리집을 나누는 담장에 피어있는 붉은 장미가 들려 있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나에게로 뻗어 장미를 들려주려고 하는 것에 마음이 푸근해져서, 갑자기 스타크가에 관한 것이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래서 쓸데없는 생각들은 머리에서 전부 흩어져 사라지고 피터의 함박웃음만이 눈앞 가득 남아있게 되었다. 나는 손을 뻗어 피터의 두 손이나 팔에 장미가시에 긁혀 다친 상처라도 있진 않은지 확인한후, 다행히 아무 생채기도 발견되지 않은 것에 안심하며 그에게서 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찬장의 화병을 꺼내어 물을 채우고 장미꽃을 담았다. 하루종일 내린 빗물을 잔뜩 머금었는지, 장미꽃잎의 진한 색너머로 깊은 꽃향이 퍼졌다. 화병을 그대로 둘이서 식사를 시작할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달칵, 하고 화병이 식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요 스티브?" "오늘은 크래커를 넣은 크림스튜." 내가 만들 수 있는 메뉴중에 피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피터가 두 손을 높게 들며 와아-했다. 착한 아이다. 나는 피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지리지리하게 찔끔찔끔 쓰면서 5편안에 완결을 낼 생각이었는데 완전 까먹고 있었던ㅋㅋㅋㅋ글 ㅋㅋㅋㅋ 심지어 티스토리에 옮기지도 않았음 ㅋㅋㅋㅋ아 나새끼... ㅋㅋㅋㅋ

설정은 보시다시피 저렇습니다... 영토니를 잘 못써여 좀 더 잘쓰고싶당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멸팁이 너무 좋아서 좀 신나게 쓴 흔적이 보이넹 ㅋㅋㅋㅋ 멸팁 넘 좋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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