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스티브가 어벤저스들을 속이는 이야기(2)

반년만이야..ㄷㄷㄷㄷ 1편 계절 겨울 ㄷㄷㄷㄷ

 

다음날 토니 스타크는 서둘러서 쉴드의 병원으로 향했어. 스티브가 보고싶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이었지. 스티브가 너무 오랜시간동안 사람을 걱정하게 만든탓에 토니는 지금 완전 걱정쟁이가 되어 있었어. 평소에 스티브의 신변을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던 것만큼 최근 요 며칠동안의 그의 실종은 토니에게 정말 커다란 병을 안겨주고야 만거야. 토니는 차를 장난아니게 밟아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연신 지난밤에 역시 병실에서 자는거였어 돌아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직 아침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에 병원 문을 연 토니의 얼굴을 보며 의료진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토니의 "왜 뭐, 내 이쁜이 보러 왔는데 왜." 란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지. 토니의 평소기행이야 뭐 쉴드사이에서도 워낙 유명하거니와, 토니 스타크가 차지하는 쉴드 내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토니의 발걸음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어. 지난밤동안 스티브의 병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 늘 그랬듯이 캡틴은 누구보다 얌전하게 있었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있었으니까. 토니는 자기에게 따라붙는 간호사에게 지난밤의 스티브의 조용한 상태에 대해 전해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 그럼 슬슬 퇴원시켜도 되겠네. 이제 닉 퓨리가 뭐라하던지간에 걍 퇴원시키고 집으로 데리고 가야지. 한동안 둘이서 꽁냥대지 않으면 이 마음이 풀리지 않아. 토니 스타크는 병실의 문을 벌컥 열었어.

스티브 로저스는, 자지않고 있었지.

토니는 좀 놀랬어. 반듯하게 침대에 앉은 채 스티브는, 토니가 문을 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릴뿐이었는데에도, 왠지 모르게 그 모습에 심장이 삐걱거렸어. "스티브? 왜 벌써 일어났어?" 토니가 간신히 그렇게 말을 내뱉은 건 자기쪽으로 고개를 돌린 스티브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지. 토니는 애써 술렁이는 가슴의 동요를 누른 채 스티브에게 다가갔어. 뭘까? 이 위화감은. 어젯밤에조차 느끼지 못한, 이 낯선감각은. 그냥 착각인걸까. 스티브는 다시 웃으며 토니를 바라보았어. - 그냥 눈이 좀 일찍 떠졌네.

- 그러는 자네야말로 이렇게 이른시각에 여기까지 웬일인가.
"웬일은 뭐. 당신 걱정되서 잠이 안오길래, 그냥 와버렸지."
- 저런. 잠을 못잔건가. 나때문에 미안하군.
"됐어. 당신 얼굴 보고싶어 안달복달 하는 거 보단 차라리 새벽부터 부지런히 엑셀을 밟아대는 게 나은까. 어디보자. 얼굴 좀 봐. 그래. 혈색좋네."

토니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뻗어 스티브의 턱을 살풋 잡고 자기쪽을 쳐다보게 했어. 스티브는 반항하지 않고 토니의 오른손이 시키는대로 고개를 돌렸지만 어딘가 어색해보였지. 토니는 어제보다 훨씬 나아보이는 얼굴색-아니, 오히려 지나칠정도로 상기되어보이는-을 보며 안심했어. 건강이야 나쁘지 않아보였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안좋아보이기도 했거든. 어딘지 모르게. 다행이다. 그럼 이제 닉 퓨리한테 들키기 전에 잽싸게 우리들의-사실은 나의- 캡틴 아메리카를 빼내가보실까. 말리부의 저택으로 잽싸게 튀어서 거기에다 꽁꽁 숨겨놔야지. 그리고 닥터 배너를 불러서 캡틴의 뇌에 대한 정밀검사를... 응?

"...어라?"
- ? 왜그러나, 토니?
"......"

순간 토니는 자기가 잘못본 게 아닐까,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스티브의 턱을 잡고있는 손가락을 옆으로 돌렸어. - 토니? 스티브는 다시 한 번 토니의 이름을 불렀지. 토니는 험악하게 눈을 부릅뜨고 방금 자기가 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어. 잘못본게 아니었어, 그건, 그건 틀림없는 키스마크. 토니는 순간 숨이 막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스티브의 목을 사납게 움켜잡았어. - 토, 토니?! 스티브는 캑캑대며 뒤로 쓰러졌지. 토니는 거의 침대위로 뛰어오르다시피하며 스티브를 위에서 짓누르고 다시 한 번 스티브의 턱을 옆으로 젖히게 해 그의 목줄기를 확인했어. 그리고 몇 번을 봐도, 몇 번을 봐도, 몇 번을 봐도 그것은 키스마크였어. 스티브 로저스의 목줄기를 따라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흔적. 그것은 어젯밤엔 없었던, 토니 스타크가 아닌 누군가가, 스티브 로저스에게 남긴 흔적이었지.

"너..!!!!!"

토니는 머릿속이 새카맣게 되어버렸어. 아주 새카맣게 되어버렸지. 토니는 시선으로 누군가를 찢어죽이는 경험을 바로 지금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 설마 스티브 로저스를 찢어죽이고싶단 기분이 드는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본적 없었는데. 토니 스타크의 오른손에 목을 눌린 채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고 있었어. 토니가 무엇때문에 화를 내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은 투명한 얼굴. 토니는 이를 뿌득 갈았어. 스티브의 목을 쥐고있는 이 손에 더욱 힘을 가하고싶은 것을,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참았지.

"...너 이게 뭐야."
-...? 뭘말하는 건가. 토니 스타크.

스티브의 목소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지막했지. 토니는 머리끝까지 뻗쳐오는 열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어. 눈속으로 불꽃이 튀어올랐지. "이거 말야!!! 너 목줄기에 이거!! 당신 어젯밤 누군가와 함께였던 건가!?!!!!"

왜 내가 아닌.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어째서 당신이.
너무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튀어올랐고, 하지만 그 어떤말도 토니는 온전히 말로 만들어낼 수가 없었어. 너무 많은 단어가 한꺼번에 앞다투어 토니 스타크의 혀위로 튀어올랐고 토니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차례차례 내보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만거야. 단지 목줄기가 계속 떨리면서, 눈에 보이는 걸 부정하고 싶단 생각만, 하지만 역시 보이는 게 진실이라, 그저 그 바보같은 생각들만 망연하게 되풀이하게 되는 거였어. 어째서 당신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왜 내가 아닌.

대체 누구와.
왜 어째서.

스티브의 눈동자는 너무나 평온했지.

-어떻게 알았지? 어젯밤에 내가 섹스한 것을. 자네 눈치가 참 빠르군. 그런 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보를 갱신해야겠어.
"뭣..!!"
-어젯밤에 스파이더맨이 날 좋아한다고 말해서, 그대로 함께 밤을 보냈네. 좋아한단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스티브는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빌런 스티브의, 우습지만 솔직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었지. 빌런 스티브는 자신이 완벽한 스티브 로저스라고 생각했고, 완벽한 스티브 로저스라고 운운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자기자신이 그저 스티브 로저스인건데, 그런데도 묘하게 어딘가 조각 하나가 빠져있는 듯한 감각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 마음은 생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너무나 불안했고 그 불안을 없애고 싶어서 죽을지경으로 초조했지. 그런 와중에 스파이더맨에게 들었던 '좋아해'란 말은- 그야말로 빌런 스티브의 마음을 울렸고, 뱃속을 따뜻하게 만들었어. 머릿속이 하얗게 될정도로 엄청났던 그 충격에 빌런 스티브는 전신이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자기자신에게 빠져있었던 '조각'이었다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지. 온전한 스티브 로저스이기 위해서라도 빌런 스티브는 그 깨달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고백하며 훌쩍이던 스파이더맨을 유혹하여 그대로 밤을 함께 하고 만거야.

그러니까, 빌런 스티브는
여전히 모르는 거였지.
자기자신에게 빠져있는 '좋아해'란 것이
누가 스티브 로저스에게 안겨준 조각인 것인지를.
(그 조각은 결코 피터 파커가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토니는 스티브를 위에서 짓누르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어. "왜, 대체 왜! 왜!" 스티브는 토니가 가하는 미세한 통증에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의아해했지. - 이유라면 방금 다 말했네. 이미 이유를 다 밝혔는데 왜 자꾸 '왜'라고 묻는건지. 스티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

토니는 오른손을 들어 그대로 스티브의 뺨을 휘갈겼어. - ...!! 스티브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지. 토니는 쉬지않고 한 번 더 스티브의 뺨을 후려갈겼어. - 그만..!! 두번, 세번쯤 되자 더는 맞아주지않고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움켜잡고 그대로 토니를 뒤로 밀어버렸지. 몸의 체력, 팔의 악력으로 따지자면 스티브가 훨씬 토니보다 월등했으니까, 토니는 그대로 뒤로 밀려나버렸어. 스티브는 화끈거리는 양뺨의 지끈거림을 참으며 토니를 노려보았다. 동료, 어벤저스, 라이벌, 토니 스타크, 폭력을 썼던적은 단 한 번도 없음. 정보가 잘못입력되어있을리가 없는데, 지금 눈앞의 토니 스타크는 너무나 낯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토니 스타크다.

스티브는 눈을 크게 떴어.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 스타크는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고, 그러나 그의 그 일그러진 눈동자는 스티브를 향해

배신자

라고 외치고 있었지.

배신자라고?
그리고 빌런 스티브는 그 너무나 낯선단어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 스티브는 갑자기 심장이 쿵쾅뛰었지. 어째서? 스티브 로저스는 단 한 번도 '배신자'로 불려본적이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왜 갑자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토니 스타크는 그대로 굳어버린 스티브 로저스를 내버려두고, 병실을 나가버렸어.



토니는 그길로 스파이더맨을 찾았지. 스파이디는 전화너머의 토니의 분노로 가득한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이건 자신이 자초한, 자신이 짊어져야하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토니에게로 갔지. 스파이더맨은 토니가 자기를 마구마구 팰거라 생각하고 더욱 고통을 각오하고 있었어. 하지만 토니는 의외로, 피터를 보는 즉시 주먹을 날리거나 하지 않았고, 하지만 피터는 도리어 토니의 그 고요함에 더 두려워지고야 말았어. 겉으로는 그저 의자에 앉아있는 채였지만, 눈이 이글이글, 냉정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거든. 피터는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고 저도모르게 "죄송해요.."라고 내뱉어버렸어. 그 말을 내뱉자마자 피터는,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얼간이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겠지. "'죄송하다'고 말할 근성이었다면 애초에 남의 것에 손을 대질 말았어야지." 그래서, 그래, 정말이지 토니가 내뱉은 말이 그야말로 정답이었지. 피터는 절망했어. 죄송하단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고,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수습할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저 차라리 토니 스타크가 자기를 엉망으로 패버렸으면 좋겠다 싶기까지 했어.

"그가 유혹한거야?"
"...보스, 제발. 난 정말 무슨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제발.."
"나야말로 앞으로 너와 무슨말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묻는 말에 답이나 하고 꺼져. 스파이디."
"...내가 먼저 고백했어요. 당신과 그사람의 키스장면을 훔쳐보고, 마음이 너무 격해져서, 나도모르게 고백해버리고 말았더니. ..그랬더니 그사람, 그사람이..."

토니는 눈썹을 꿈틀댔어. 그리고 눈을 감았지. 울먹이는 소년의 얼굴을 엉망이 되도록 패버리고싶은 충동을, 토니는 간신히 참고 있었어. 토니는 생각했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정줄을 놓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쉬지않고 생각에 매달렸어. 아침에 스티브가 말 한 그대로였어. 그러니까, 유혹은 스티브쪽에서 한거란 말이지. 토니는 머릿속이 너무 아파서, 화가 너무 나서 두통이 와서 손을 들어 이마를 연거푸 눌렀어. 스파이디의 훌쩍이는 소리에 더욱 짜증이 났고 그야말로 난폭하게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 하지만 토니는 생각을 해야했어. 그저 화가 난다는 이유로 모든 걸 깽판치고 그럴 수는 도저히 없었어. 토니는 어떻게든 스티브가 바람을 핀 이유를 생각해야만 했던거야.

토니는 너무나, 입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피터, 어젯밤의 그사람,"
"......"
"그 사람,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흑..."

"그 사람이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던가?" 토니는 자기가 내뱉은 말이 자기가슴을 후벼파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지. 스파이더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고 있었어. 젠장. 울고싶은 건 나야. 빌어먹을. 토니는 혀를 찼어.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모두 다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면서.





그때였지. 어벤저스의 경고음이 울린 것은. 시내 한복판에 전신에 폭탄을 감은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나 아무나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단 통신이 어벤저스들에게 들어왔어. 토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언맨 수트를 입으며 단숨에 사건이 터진 거리까지 날아갔어. 스파이더맨도 훌쩍이면서도 자신의 코스츔을 입고 건물사이를 날랐지. 그들이 거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대부분의 어벤저스들이 자리에서 작전을 기다리며 몸을 숨기고 있었고 아이언맨은 하늘을 날면서 지상을 바라보며 이미 민간인들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이 감은 폭탄성분을 분석하기 시작했지. 그때 아이언맨은 순간 숨을 멈추었어. 아직 작전이 채 내려지지 않아 숨어있는 어벤저스 사이에 저 방패는, 저 코스츔은, 저 뒷모습은. 그래, 그건 틀림없는 캡틴 아메리카였어. 아이언맨은 눈을 깜빡였어. 가슴이 찌르르르 아파왔지. 시간이 흐르고나니 어느새, 분노같은 건 전부 사라지고, 아이언맨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만이 묵직하게 그를 덮치기 시작했던 거야.

빌런 스티브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째서 토니 스타크의 커다란 눈이 슬픔으로 일렁이면서, 스티브 로저스인 자기자신을 향해 '배신자'라고 말하고 있는 지를. 스티브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면 자신이 결국 스티브 로저스일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두렵기까지 했어. 그는 평생 이런적이 없었어, 언제나 한 번 '통과'한 존재를 완벽하게 카피하며 그 누구에게도 존재를 들키지 않고 살아왔었는데. 근데 어째서 이번만은 그게 쉽게 되지 않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빌런 스티브는 의아했지. 심지어 마음이라는것이 이렇게 약해지는 것조차도 의문이 들었어. 인간이란 이렇게 약해빠졌는데, 조그마한 불안으로도 마음이 이렇게나 흔들릴만큼, 근데 대체 어떻게 내가 훔치지 못한 '조각'을 여전히 품고 있을 수 있는거지? 이 스티브 로저스라고 하는 존재는 이상하다. 어째서 이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그렇게나 약한 주제에. 틀림없이 내가 빼앗지 못한 그 조각안에 있는 것이다, 토니 스타크가 그 눈동자로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고 어벤저스의 경고음이 울렸고, 스티브 로저스는 그 경고음을 듣자마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어. 그 소리가 뭔지 스티브는 이미 알고 있었어. 시민이 위험에 처할때마다 항상 듣는 그 소리. 그 소리를 들을때마다 늘 스티브 로저스의 심장이 떨리곤 했지, 걱정과 연민으로. 또 고통받을 누군가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또한 그들이 삶의 희망을 잃기전에 어서 그들을 구해내야한단 생각으로 온몸을 지배받고.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며 병실에서 뛰쳐나왔어. 스티브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지. 그리고 자신의 수트와 자신의 방패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 물으면 될지 고민하며 병원을 헤집었고, 그 답은 의외로 빨리 찾아낼 수 있었어. 마침 닉 퓨리가 병원에 들렀었거든. 그렇게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 유니폼과 방패를 들고 현장에 누구보다 빨리 나갈 수 있었지.

현장의 모두는 캡틴의 컴백을 감탄했고 환영했고, 물론 캡틴의 컨디션을 걱정했어. 캡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나를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인질로 잡힌 시민들을 걱정하라고 말했지. 거리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 몸을 숨긴 채, 스티브 로저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되짚었어. 시민들의 안전확보, 거리의 규율확보, 테러리스트 진압. 캡틴은 마치 그린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작전을 어벤저스에게 알렸지. 그리고 그들은 캡이 원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하게 캡의 작전을 따라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해나갔어.

아이언맨은 허공에서, 갑자기 날아왔지.

캡틴은 바로 자기 눈앞에 있던 테러리스트들이 허공으로 붕 떠서 그대로 지상에 처박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으로 아이언맨을 쫓았어. 아이언맨은 수트를 입고있었고, 쉘헤드를 하고 있었고, 당연히 그래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 캡틴은 잠시 생각했어. 그는 아직도 나를 그런 눈을 하고 보고 있는걸까.

그 슬픈 눈.

스티브는 순간 무너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어.

어째서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 거지. 이곳에. 스티브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꽈악 눌렀고,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였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스티브 로저스'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통제가 되지 않는 거지. 이 존재는.






"...저게 뭐야." 거리에서 일어난 소란과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총의 조준렌즈로 상황을 지켜보면서 버키가 뿌득 이를 갈았어. "저 망할 카피캣이. 완전히 니흉내를 내고 있잖아." 버키의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도리어 마음이 진정되었는가, 멸팁은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처음 찾았을 때보다 훨씬 더 냉정하게 망원경너머로 캡틴 아메리카를 바라볼 수 있었어. 멸팁은 정말 동요했었어, '그'가 '캡틴 아메리카의 유니폼'을 입고있는 것에, 심지어 저 '방패'를 들고있는 것에. 숨이 막힐정도로 슬픔이 밀려와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 감정에 사로잡혀 손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지. 하지만 멸팁은 곧 자기보다 더 자기일처럼 현재의 상황에 분노하는 버키의 목소리를 듣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어. 정말 친구란 좋은거군. 멸팁은 희미하게 웃었고.

"그렇군. 상황판단력이 아주 뛰어난데. 객관적으로 보고있으려니 캡틴 아메리카란 남자는 정말 쓸만한 놈이야."

아까까지만해도 백짓장같은 얼굴이었으면서, 어느새 농담할 여력까지 있고. 버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음을 지으려하다가, 곧 다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짧게 혀를 찼어. "닥치고 담요를 더 당겨 덮기나 해." 멸팁은 결국 소리를 내어 키득거리고 말았지. 정다운 브루클린의 버키가 생각날정도로, 버키는 멸치가 된 스티브에게 헌신적이 되어있었어. 그건 정말 70년전의 그다운 행동과 말들이었지. 하지만 지금-윈터솔저로서 상당부분 기억의 링크가 끊어진-의 버키는 그런 자신이 다소 낯설었지. 멸팁은 상냥한 말을 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낯설어 어색해하는 버키를 전부 다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서 웃을 수 있었지. 멸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요를 더 당겨 자신의 몸을 가렸어.

아이언맨은, 쉴새없이 하늘을 날고 있었지.
언제나처럼 눈부신 몸을 하고.

아아.
멸팁은 하늘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어.

저곳에 당신이 있어.

"...버키. 저기 저곳에 있는 캡틴 아메리카는, 정말로 완벽한 '캡틴 아메리카'이지 않나?"
"그래봤자 카피캣이야."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어.

"글쎄. 버키, 내가 지금 이자리에 없다면, 내가 너를 찾아가지 않고, 그래서 너도 지금 나의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지금 저 거리의 캡틴 아메리카를 봤다면, 그래도 저 존재를 '카피캣'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
"아닐거라고 난 확신해. 저건 누가봐도 캡틴 아메리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는 훌륭한 카피캣이 아니야. 그는 그저, '스티브 로저스'야."

그리고 그것이 그런 생물이라는 것을 스티브는 이미 알고 있었어. 그것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때, 그가 자기를 통과할 때 스티브 또한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것봐, 거리의 난동은 캡틴 아메리카의 전두지휘하에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해 낸 어벤저스팀에 의해 빠르게 정리가 되고 있지 않은가. 테러리스트들은 전부 폭탄이 수거된 채 묶여 총구아래 고개를 떨구고 있고 누군가는 조금 다쳤겠지만 인질들 모두 무사해, 거리는 다소 더럽혀지고 망가졌지만 저것들도 금방 복구될테지. 멸팁은 눈을 감았어. 분명 자기가 저곳에 있었어도, 저렇게 했을 거였어. 저곳의 캡틴 아메리카가 행한 작전을 그대로 자기도 생각해냈을테지.

"...버키. 어벤저스회로에 비밀로 잠입해 지금의 출동명령을 듣고 내가 굳이 이곳에 오자고 한 건, '그'가 어떻게 하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어. 난 생각했지. 그를 죽일거라고. 그가 내 모습을 훔쳐 무언가에 해악을 끼친다면, 설사 그가 내 모습을 훔친 채 죽어버린다 해도, 그래서 내가 영원히 캡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그를 죽여야만 한다고."

멸팁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어. 너무나 작은, 너무나 홀쭉한, 뼈마디마디가 전부 드러나 있고 한줌도 되지않을 것처럼 얇은 자신의 손목을.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알고 싶었어. 그리고 결과는 보는대로... 그는 완벽하게 '캡틴 아메리카'를 수행했어. 그는 정말로 이때까지의 나로- 이때까지의 '스티브 로저스' 그 모습 그대로 앞으로를 살아갈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는 기꺼이 방패를 들어 거리로 나왔고, 시민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기 위해 방패를 높게 들었어... 그는 히어로의 삶을 살거야. 그것은 분명 다른 삶을 선택하지 않을 거야."
"...너 무슨 말을 하는거야?"

버키는 총의 렌즈에서 눈을 떼 자신의 친구를 노려보았어.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버키는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에 못견딜정도로 화가 났지. 버키는 으르렁대며 멸팁을 찢어발길 것처럼 쳐다보았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고?!" 저도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 친구를 바라보며, 멸팁은 희미하게 웃었어.

하지만 벅. 버키. 이친구야.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든 저 '캡틴'을 잡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원래대로 돌아올거란 확신을 대체 어떻게 가질 수가 있겠어. 저것이 죽는다고 내가 원래대로 돌아오리란 보장이 없고,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단지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그저 죽여없애는 짓을 하려고 하는 건데.

내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를 빼앗겠어.

"...그가 이대로 '스티브 로저스'여도, 세상에 아무 위험이 없다면, 난 기꺼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 하지마! 죽여버린다!!"

버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어.
멸팁은 다시 눈을 감았어.

감은 눈 안쪽에서, 언젠가 코앞에서 보았던 토니 스타크가 떠올랐지. 그 상냥한 얼굴.
그 상냥한 눈.
그 장난스러운 입꼬리를,

이젠 나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토니.
토니.





그런 생물은 처음이었지.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존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는 법을 알지 못했어. 그 존재를 죽여버리면 과연 스티브 로저스가 빼앗기전으로 돌아올까? 그건 아무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은 그냥 행하기에는 너무나 큰 모험이었지. 그를 잡아서 족쳐서 스티브를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할까? 그또한 통할지 의문이었어. 애초에 이미 모두에게 '캡틴 아메리카'인 그 존재를 '잡는'다니 그게 그렇게 수월할 리도 없었지. 물론 스티브 로저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강한 존재. 버키혼자 용쓴다고 잡힐 사람이지도 않거니와. 멸팁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러므로 답은 나오지 않았어. 적어도 그가 '나쁜 존재'가 되려하지 않는 마음이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혹여 그가 스티브 로저스로써 나쁜짓을 저지른다면 해악을 끼친다면, 스티브는 물론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그를 없애려했겠지만, 멸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그는 정말로 살아갈 뿐이니까. 죽지않기 위해 살아가려고, 자신이 빼앗은 모습 원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가 앞으로 쭉 '스티브 로저스'여도 괜찮지 않아?
그가 계속 캡틴 아메리카여도.

"...그거 진심인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버키는 한심한 질문을 되풀이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히 진심이겠지. 그렇게 겪고와서도, 그를 여태 몰라. 그 꼬맹이. 남을 위해 살아가는 그 소년을.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는 그대로 컸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 어린시절과. '이 세상에서 캡틴 아메리카를 빼앗을 수 없다'니. 버키는 자신을 바라보며 또 희미하게 미소짓는 멸팁의 얼굴에서 그 어린시절의 소년스티브를 읽어내며, 어쩌지못하고 그저 불쾌한 듯 어슬렁댔어. 그리고 몇 번이고 바닥을 찼지. 스티브를 향한 울분을 스티브에게 쏟아낼 수 없으니, 물건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됐어. "미안해." 사과하지 마. 그 말도 안 되는 생각들 때문에 나에게 사과하지 말라구. 난 절대 인정 못해. 절대 용서 안 해. 무슨일이 있어도 널 원래대로 돌려보내고 말거야. 저 빌어먹을 카피캣을 패죽여버리고 널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라구. 넌 누가 뭐래도 캡틴 아메리카야. 넌 누가 뭐래도 너 자신이야.

대체 너보다 더 그것이 어울리는 존재가 어디있지.
넌 어째서 그렇게도 너 자신을 몰라. 너의 빛나는 마음을.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에, 버키는 멸팁의 멱살을 덥썩 잡았어. "...토니 스타크는??" 마치 불쾌한 무언가를 씹어발기는 것처럼 버키는 한자한자에 힘을 주어 말했지. "그자식은 눈치챌 거 아냐. 너네둘은 연인이잖아." 스티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다가, 곧 뺨을 붉혔어. 어라 버키가 어떻게 알았지;;; 그건 나름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누구보다 정보전에 뛰어난 나였는데 살인머신으로 이용당하기 전엔. 그렇게 둘은 눈으로 말을 몇마디 주고받았고 곧 스티브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솔직히 저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그라고 해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할' 예정이야. 그가 나를 구분해내지 못해도, 나를 눈치채지 못해도."

단지 슬플뿐이다. 계속. 그가 나에게만 보여주던 그 웃음을 이제 저것이 보게 된다는 것이.
'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르겠지.
내가 주지않은 것이니까, 그건.

"...대체 뭐를 위한 연인이야." 하여간 마음에 안드는 자식이야. 버키는 멸팁의 멱살을 놓고 그대신 번쩍하고 멸팁을 안아들었어. 이 건물 옥상으로 이동할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어깨에다 멸팁을 기대게하고 그대로 그를 안아들은 거였지. 멸팁은 자기가 걸어올라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걸린다며 일축하는 버키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한손에는 멸팁을, 한손에는 장총을 든 채 버키는 옥상건물을 내려가기 시작했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보고나서,"
"......"
"그런 멍청한 말은 적어도 그러고나서 하도록 하지. 물론 난 절대 그 미련한 생각엔 반대하지만,"
"...버키,"
"어째서 이렇게 멍청해진 거야? 넌 무모하고, 위험하고, ...그래도 멍청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거냐?"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스티브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입술을 우물거렸어. "...나라고 해서 마음약해지는 경우가 조금도 없다곤 생각하지 말아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 그럼 어쩌냐 긍정적인 척이라도 해야될 거 아냐. 버키는 하, 하고 혀를 차면서 계단을 내려갔어. "바보같은 말은 토니 스타크를 일단 만나고 나서 해. 먼저 그에게 접근한다. 아니, 쓸모없는 토니 스타크 말고, '어벤저스'에게 통째로 말이야." 버키는 입술을 당기며 비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어. 윈솔이 된 이후로 거의 안웃더니 꼭 그를 놀릴때에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멸팁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






사건이 진압되고, 테러리스트들이 연행되고, 거리의 봉쇄와 뒷정리는 관활경찰들에게 맡기고, 토니 스타크 구호재단에 연락해서 파견나오게 하고. 토니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 스티브는 멀찍이서 그것들을 바로보고 있다가, 곧 고개를 돌렸어. 어벤저스들 몇몇이 뭉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곳에 낄 생각은 들지 않았지. 그리고 아주 멀찍이 떨어져 어둠속에 몸을 숨긴 스파이더맨이 캡틴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흘끔흘끔 시선을 던졌지만, 캡틴은 그것에도 신경쓰고싶지 않았어. 왠지 지치는군. 이게 피곤하다는 것인가.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며 방패를 등에 맸지.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지치는 건지. 몸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은데. 빌런 스티브는 '마음이 축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

"스티브."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아이언맨은 캡틴의 앞을 가로막고 섰어. -...... 캡틴은 아무말도 하지않다가, 문득 입을 열어 공치사를 했지. 자네몫을 잘 해줬네. 아이언맨. 역시 훌륭하군. 자네의 활약이 사건의 빠른해결로 끝이났어. 토니는 스티브의 그 의미없는 모든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 토니는 쉘헤드를 열었어. 스티브는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지. 토니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스티브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어. "...스티브. 할이야기가 있어." 하지만 이곳에선 말고. 어디선가,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어. 토니는 두 팔을 뻗었지. 스티브는 두 팔을 자기쪽으로 뻗은 토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아, 안기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했어. 스티브는 천천히 토니에게 다가갔고 토니는 스티브의 허리를 끌어안아 다시 허공으로 뛰어올랐지. 어느새 아이언맨의 쉘헤드가 닫혔고, 토니는 끝까지 스티브를 바라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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