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구나. 그 모든 게 다 꿈이라니. 버키와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면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일까. 알콜의 힘에 현실과 영화가 뒤섞여 그런 꿈을 꾸었던 건지도 몰라. 아니면 너무나 얇은 내 팔뚝을 향한 반항심리에서 그런 꿈을 꿨는지도 모르지. 이미 한참전에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웬일로 스티브는 서둘러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여전히 이불속에 파묻은 채 무릎을 붙이고 세워 그 위에 상체를 기대고는 멍하니 침대와 허공사이의 그 어딘가를 바라보며 여전히 꿈을 곱씹고 있었다. 기나긴 밤을 곱절로 길게 느끼게 만들었던 그 총천연색의 꿈은, 오히려 그래서 더욱 짧게 느껴지는 하룻밤이기도 하였다. 그 꿈속에서 스티브 로저스가 그야말로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다 응집되어 있어서, 꿈을 꾸는 내내 귀퉁이가 달콤한 꿀로 터져버릴 것처럼 스티브의 마음이 팽팽해졌던 것이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다리를 안고있는 자신의 얇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비쩍 마른 팔은 얇은 새하얀 뼈위에 거죽데기 하나 붙어있는 것 마냥 볼품없었고, 파란색과 진한 붉은색의 핏줄이 그 시작과 끝만이 모호한 채 뼈위를 길게 이어가고 있었다. 아아, 하지만, 꿈 속에서의 스티브 로저스의 팔뚝은 이런 팔뚝이 아니었다. 그 늠름하고 두꺼운 팔. 팔 하나만으로 열 명이 남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티브는 꿈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을 무릎위에 기댄 채 얼굴을 붉히며 스티브는 쿵쾅쿵쾅 거리는 가슴의 기분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으니 금방 꿈 속의 모든 것이 눈꺼풀 안쪽에서 재생되었다.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어젯밤의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는 것처럼 스티브는 꿈속의 모든 장면을 리플레이했다. 파란색 유니폼에 둘러쌓인 그 몸이, 대체 어떠한가. 누구나 갖고싶어하는 육체. 그 누구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그 엄청난. 붉은색의 날카롭게 빛나던 그 커다란 방패는 어떻고. 그것이 스티브 로저스라니. 그게 나라니. 아아. 꿈 속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넓은 어깨를 펼치고 허리곧게 당당하게 서서, 이 품안에 드는 모든 것을 한아름, 내가 지켜주고 싶은데. 꿈 속의 나는 그럴 수 있었는데.
스티브의 헐거운 집 문이 아무렇게나 열리고, 버키가 들어왔다. 좋은아침. 좋은아침. 둘은 눈이 마주치자 마자 간단하게 인사를 하였다. 아침식사를 한아름 사들고 온 버키는 왠일로 이 시간에까지 여전히 침대위에 있는 스티브를 의아해했다. 스티브는 소리없이 문을 닫고 군모를 벗어 옷걸이 위에 올리고는 저기에서부터 의자를 하나 드르르륵 바닥을 긁다시피하며 끌고와 자신이 앉아있는 침대 바로 앞에 의자를 두고는 그 위에 걸터앉는 버키의 행동을 쭈욱 보고 있었다. 의자의 등을 앞으로 하여 의자위에 걸터앉는 버키는 자신을 바라보는 스티브의 시선 위로 자신의 시선을 겹치면서 의자의 등에 두 팔을 올리고 거기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른 아침의 버키의 얼굴은 깔끔했고 아주 멋있었다. 귀뒤로 빗어넘긴 머리도 근사해.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키는 얇은 입술 위에 가느다란 미소를 띄우며 살짝 눈빛을 흔들었다. 왜그래, 스티비? 무슨 일 있어? ...스티비라고 부르지 말아줘. 그동안 수백번, 수천번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면서 둘은 마주보며 살짝 웃었다. 버키는 그 와중에 내심 스티브를 걱정하고 있었다. 저 얇은 목 좀 봐. 잠옷속에 숨겨진. 목뒤로 도드라진 뼈가 그대로 척추로 이어져 얇은 가죽위로 형태를 드러내고 있잖아. 저기서 더 마르면 오히려 이 티슈쪽이 더 굴곡이 있는 편이 될지도 몰라. 이것봐, 이 티슈는 이렇게 올록볼록하거니와. 버키는 종이에 담아놓은 기다란 바게트를 하나 꺼내어 그대로 반으로 나누고는 한쪽을 스티브에게 건네주었다. 스티브는 잠시 주춤하다가 곧 빵을 받아들었다. 아침 훈련은? 군복을 차려입은 버키를 바라보며 스티브는 마른 목에 침을 한 번 삼키며 그렇게 물었고, 버키는 눈썹을 여덟 팔자를 한 채로 오늘은 오후. 그렇게 대답했다. 우유의 병뚜껑을 한 번에 뜯어내고 그것까지 건네주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병뚜껑을 뜯어주지 않아도 그정도는 나 스스로 할 수 있어. 벅.
이건 그냥 나의 오랜 습관이라서. 스티브. 너도 알잖아. 알지. 하지만 넌 나아닌 사람에게 이런 걸 해주지는 않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너 아닌 사람에게 이런 걸 해줘야 해. 그런 의미심장한 말은 제인에게나 해 줘. 제인? 제인 에어? 제인 페퍼? 제인 페티크루? 그녀도 아니면... 아, 제인 무어? 너 이... 스티브는 고개를 들어 뚜껑이 열린 우유병을 쥔 손 그대로 버키를 향해 휘둘렀고 우유는 그대로 버키를 향해 쏟아졌다. 버키는 크게 웃으며 손에 살짝 쏟아진 우유를 흔들어 털어내면서 미안, 미안이라고. 아주 약간 흘러내린 우유 너머로 스티브도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우유를 한모금 꿀꺽 마셨다. 버키는 입에 가득한 웃음 그대로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우유를 핥았고. 아아. 스팁. 이게 의미심장한 종류의 말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채면서, 내가 왜 그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닌 너에게만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눈치가 빠른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어. 버키는 킥킥대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언제나처럼 자신을 놀리는 농담어린 웃음으로 착각한 스티브는, 짜증을 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이불속에 파묻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버키. 지금은 이렇지만. 나의 현실은 이렇지만.
버키. 지금은 이렇지만. 나의 현실은 이렇지만. 그래도 난 꿈이 있어. 그리고 나는 언제나 나의 꿈에 관한 꿈을 꾸지. 내가 꾸는 꿈 속의 나는, 그야말로 남자중의 남자야. 최고의 남자. 특히 방금까지 꾸고 있었던 꿈은 이때까지 내가 꾸었던 꿈 중에서도 가장 최고야. 더할나위 없는. 무슨 꿈이었는데? 최고의 남자가 되어 가르보와 키스하는 꿈?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최고의 남자가 되어 모두를 지키는 꿈이야. 버키. 네가 입고있는 그 군복과도 같은거야. 그 유니폼을 입고있는 나는, 말그대로의 '히어로'가 되어 모두를 지키는 거지. 이 손안에 한아름 안기는 다정한 사람들을, 아니 이 나라 전부를. 바로 이 두손으로. ...그럴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키가 두 배는 되야겠는걸. 맞아. 꿈 속의 나는 정말로 그래. 심지어 어깨는 세 배 정도 더 넓은 것 같아. 그리고 힘도 보통사람을 훨씬 뛰어넘고, 아주 강하지. 나는 지프를 점프하여 뛰어넘었고, 장전되어 있던 총을 손으로 내려쳐 깨부수고, 심지어 날아오는 총알을 방패로 막아보이기까지 했어. 엄청 빠르게 달렸고, 열 명이 넘는 적을 한꺼번에 처부수고, 전쟁을 종횡무진 달리며 승리를 이어나아갔지...
모두의 가슴 속에서 빛나는 히어로.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이렇게 생생한데.
가슴 뿌듯할 정도로.
...농담은 그 정도로 해줘. 그리고 네가 너의 꿈을 진짜로 믿고서는 이상한 망토 두르고서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한다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줄 알아. 이건 협박이야. 알았어 스티비? 버키가 다소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스티브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넌 꿈 속의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 늠름한 콧대를 본 적이 없으니까. 스티브는 이불을 잡아끌고 도로 침대위로 누워버렸다. 뭐야, 먹자마자 바로 눕는거야? 소화 안 되게. 냅둬. 오늘처럼 현실이 재미없었던 적이 없었어. 난 다시 꿈속으로 돌아갈래. 그리고 다시 꿀거야. 다시 만날거야. 꿈 속의 나를. 그 용감한 표정을,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 두꺼운 허벅지와 단단한 발을. 늘 적을 향하고 있는 강한 두 주먹과 결연한 의지가 녹아있는 시선을. 베개에 머리를 뉘이고 떠올리니, 정말이지 다시금 눈꺼풀 안쪽에서 꿈 속의 스티브 로저스가 다시 피어올랐다. 어이, 정말로 자는거야? 버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버키. 아무리 너라도, 꿈 속의 스티브 로저스까지 놀려댈 수는 없겠지.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꿈 속의 나를. 꿈이라고 하는 것이, 타인과 마음껏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잠들기 직전의, 버키의 커다란 손이
이마를 쓰다듬는 것을 느끼면서
스티브는 감은 눈 안쪽의 눈동자를 파르르르 떨었다.
꿈이라고 하는 것을, 너와 마음껏 공유하고 싶어. 버키. 꿈 속의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넌 정말로 놀라워할텐데.
천천히 꿈 속으로 빠지면서, 스티브는 또 그렇게, 꿈속의 자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누구에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열심히 빌면서...
......
아아
꿈이구나.
그 모든 게 다 꿈이라니.
스티브는 눈을 깜빡였다. 천장위에서부터 가득 내려온 어둠 속에서 스티브는 시선으로 자신의 주변을 더듬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긴 시간동안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몇시간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째서 이런걸까.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더디게 간다. 스티브는 상체를 일으켜 이마를 짚고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식은땀에 축축하게 스티브의 손바닥을 맴돌았다. 티셔츠 안쪽으로 주르륵 흐르는 땀이 스티브의 등의 척추를 길게 훑고 지나갔다. 스티브는 이를 뿌득 갈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때마다 몸 전신이 쿵쾅쿵쾅하고 울렸다. 약간 비틀대면서 간신히 방의 문을 열자, 아주 환한 부엌에서 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던 토니가 스티브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 ...스티브? "
토니의 목소리보다 더 빨리 토니의 오른손이 다가와, 얼굴을 감싸는데
그제야 스티브는 자기가 울고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세상에. "
놀란 얼굴 그대로 스티브의 머리를 감싸안아주는데, 그러한 토니는 너무나 미지근했고 그 미지근한 감상에 기대어 스티브는 자신의 현실로 간신히 돌아왔다. 이게 현실이었다. 자신을 껴안아주는 토니 스타크가 있는 이 곳이. 그래. 이제는 잘 알고있다, 이 알고 있는 사실에는 조금도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 물론 꿈 속 어딘가를 헤매며 빙글빙글 돌아가던 머릿속도 이제 제자리를 찾았고. 그러나. 하지만 말이야. 토니. 스티브는 눈을 감아 눈물을 굴러떨어뜨리며 토니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하지만 나는, 사실은,
" ...돌아가고 싶..."
돌아가고 싶어.
꿈 속으로.
꿈 속의 내가 좋아.
꿈 속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네가 되고싶어 간절히 비는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토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잇눌린 소리를 내뱉으니, 돌이킬 수 없는 소원을 너무나 원하는 자신의 전신이 미친듯이 튀어올랐다. 간신히 현실의 토니를 붙잡아 현실을 놓지않고 있을 수 있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마저 전부 뿌리치고 돌아가고 싶어져. 그저 꿈속으로.
버키.
네가 있는 그곳으로.
아아 꿈이구나. 그 모든 게 다 꿈이라니.
너는 항상 나의 꿈 속에만 있구나. 내 옆에 있지 않고...............
- done
+ 헤매지 마라 스티브... 스티브가 헤매는 거 좋지만..<< 대체 왜 우리 스티브는 이렇게 고통받나요 우리 스티브 행복한 모습 좀 줘라...(마블: 그정도는 동인에서 알아서해(마블새끼를 주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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