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to a... PINK

 

얼굴에, 차가운 한줄기 바람이 닿았다.

 

스티브는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한줄기 바람이 막 잠에서 깨게 한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스티브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 눈가로 굴러떨어지는 땀방울이 눈동자에 닿는 감각에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기억해냈다. 고개를 두어번 흔들어 땀방울을 떨구어내자,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칼들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져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얼굴 표면에 굴러떨어지는 땀의 감각이 제법 귀찮았다. 스티브는 두 손을 들어 얼굴 전체를 쓸어내린 후, 귀에 어지럽게 얽혀있는 머리카락까지 전부 이마위로 쓸어넘겼다. 젖은 채 덩어리졌던 머리칼 전체가 이마뒤로 넘어가 큰빗으로 한 번 쓸어넘긴 것같은 갈고리의 흔적으로 뒤통수에 안착했다. 스티브는 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곤란해질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단지 눈앞의 상과 움켜쥔 손안에서 맴도는 타격에만을.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렸고 곧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상이 이어졌다. 70년의 시간을 마악 뛰어넘고 난 후 눈을 떴던 그 직후와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래로 송두리째 쏟아져버리는 것 같은, 혹은 머리털부터 위로 솟구치는 것 같은. 스티브는 크게 어깨를 움직이며 순식간에 주변을 훑었다. 낡은, 벽위에 걸린 포스터가 거의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작은 체육관 그 한가운데에 서서, 스티브는 세번째의 샌드백을 내리치고 있었다. 맨손으로. 타격은 자신의 손 안과 샌드밴의 몸전체만을 훑으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단단한 맨손을 내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손위에 샌드백을 후려쳐 생긴 거친 흔적과 아주 작은 생채기나 붉어진 피부표면따위를 보면서, 스티브는 손전체를 조감하듯 훑었다. 그러다가 피식, 하고 웃는다. 그제야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기억해내고, 캄캄해진 눈앞마저 도로 선명해졌다. 참 샌드백이

 

샌드백이, 낯설었다. 이제는. 스티브는 후, 하고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땀이 목까지 흘러내렸다. 이제 이 샌드백이 데롱데롱 천장에 달려 흔들리고 있는 세평짜리의 낡은 체육관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낯선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세계에서 비죽 튀어나온, 혹은 혼자 덜렁 일그러진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존재인 그였지만, 그럼에도 이 21세기라고 하는 공간에 어느정도 적응이 돼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아직 여전히, 21세기의 대부분의 것들이 낯설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의 문을 나서면, 세상은 자신이 알고있던 모든 20세기와는 이미 확연이 다른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단한 무언가로 만들어진 복도를 넘어 자동으로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면, 큰 건물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트레이닝룸이 따로 있었고, 스티브도 몇 번 그곳을 이용한 이후로, 그곳이 자신에게 훨씬 잘 맞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 룸의 모든 기구들이 자신의 특화된 육체에 맞는 트레이닝을 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이 낡은 샌드백을 몇개나 부수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그렇다, 너무나 익숙한, 아주 안정적인, 이 20세기적인 체육관이 사실은 이 곳 - 쉴드 - 에서 가장 낯선 공간인 것이다. 스티브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쉴드안에 자신을 위하여 일부러 이런 곳을 만들어준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가끔 어색했다.

 

" 괜찮으십니까? "

 

" ...... "

 

스티브는 얼굴에 닿은 차가운 한줄기의 바람의 정체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정답은 예상대로 간단했다. 체육관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체육관은 낡은 모습을 흉내내고 있는 것치고 문소리 하나 내지 않고 깔끔하게 열렸다. 그것은 단지 스티브가 채워놓은 체육관 안의 가열된 공기에 차가운 공기가 퍼져, 스티브의 얼굴에까지 닿은 것이었다. 얇은 빛은 짜놓은 비단처럼 열린 문틈으로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며 쏟아졌다. 레몬빛에 가까운 복도의 빛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스티브는 체육관의 문을 열고 발을 한걸음 들여놓은 클린트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저도모르게 시선으로 더듬었다. 클린트의 키의 배에 달하고 그의 덩치의 두배는 커진 그림자가 직사각형의 레몬빛 안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단한 근육에 힘을 뺀 채로, 클린트는 비교적 가벼운 복장을 한 채 드링크를 담은 쟁반을 왼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스티브의 투명한 시선을 의식하며 연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그 웃음은 참으로 클린트가 선해보이게 하는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이, 클린트는 그제야 자신이 반쯤 밀어붙인 문의 한쪽면을 가볍게 주먹 쥔 손으로 통통, 두드렸다. " 실례했습니다, 스티브. " " ...괜찮아. " 그제야, 스티브도 클린트의 말에 응대했다. 조금 안심한 듯이, 클린트의 미소가 다시금 연하게 진해졌다.

 

" 가끔 이렇게 이용하신다고 국장님한테 직접 말씀 전해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번엔 트레이닝룸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까? "

 

" ...그쪽도 좋았지. 여기있다는 건 누구에게 들었지? "

 

" 식스센스한테 들었죠. "

 

자신이 말하는 말끝에 웃음을 담으며, 클린트는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어색하게 웃었다. 스티브는 그런 농담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인다거나 가벼운 미소를 띠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농담이 실패를 했다고 생각한 클린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한 번 더 곱씹었고, 역시 별로였다는 기분이 들어 허탈한 웃음끝에 쳇, 하고 혀를 차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는 쟁반을 들고 있는 손을 다시 한 번 위아래로 움직여 스티브에게 그를 위해 들고 온 드링크를 어필했다.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린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왼쪽발이 먼저 클린트의 그림자 속으로 성큼, 다가갔다.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자신의 발끝을 확인했다. 자신의 늘어진 그림자가 클린트의 그림자와 뒤섞이는 모습도. 스티브는 자신에게 뻗어져있는 드링크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 고맙네. 바튼요원. "

 

순간 클린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희미한 색으로 일렁이는 물선이 크게 한바퀴 회전한 후, 원래 사이즈로 돌아왔다.

 

" 아닙니다. ...아. 저기... 그러니까, 로저스. ...sir. "

 

버벅이며 당황하는 클린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간 앗차싶어 스티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들다가 만 드링크를 바라보다가, 드링크를 콱 움켜잡으며 쟁반위에 있던 손을 급하게 어깨옆으로 거두었다. 드링크는 아주 차갑게 식어있었다. 굳은살이 배겨 단단하지만 방금까지 열기에 휩싸여있던 손바닥이 급속도로 싸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무의식적으로 좌우로 당기다가 다시 클린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클린트는 약간 눈썹을 아래로 내린 채 스티브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더듬는 듯 하였다. 뺨이 약간 붉은 것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기세나 미소는 전혀 보이지 않고 조금 풀이 죽은 듯 했다. 아아. 스티브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자신의 실수다. 스티브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약간 적막해진 분위기 아래로, 간신히 다시 말을 내뱉었다. 실수는 만회해야만 했다. 그것도, 최대한 서둘러서.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고맙다는 말이야, 저기, "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결심한 듯이 혓바닥위로 발음을 굴렸다.

 

" ─클린트. "

 

" ...... "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어, 클린트는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쳤다. 스티브는 약간 곤란한 듯하면서 조금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눈썹을 일자로 하고 있었다. 입가에 어색하게 웃음을 띠우는 것 같기도 하였다. 땀에 젖은 듯 촉촉해진 얼굴 표면을 바라보며, 클린트는 눈썹을 장난스럽게 위로 올리며 조금 입꼬리를 당겼다. 클린트가 다시 웃는듯한 얼굴을 하는 것에 눈에 띠게 안심하는 기색이 느껴져, 클린트는 다시 웃으며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 음.. 별로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 군인이니까, 요원이라 불리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

 

" ...아니. 그러니까, 방금건 나의 실수다. "

 

" 하하. 네. ...음, "

 

그리고 머리를 한 번 긁적이다가, 클린트는 조용히 숨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쟁반을 왼쪽 옆구리에 고정하며 팔을 접었다. 그리고 약간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아래로 하여, 자신의 늘어진 그림자 위에 포개진 스티브의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클린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스티브의 약력을. 그는 20세기의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여전히 그때의 사고방식으로 이곳에 서 있다고 해서 그사람을 탓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말도 안 됐다. 그러니 그의 그런 태도에 상처를 받은 듯한 행동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클린트는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 그를 친근하게 스티브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었고, 그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클린트는 그림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겹쳐져 있는 그림자의 경계선이 이제 완전히 구분선이 불분명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또한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었다.

 

겹쳐져 있는 둘의 그림자는 연해서 꼭 속이 비칠 것 같은 먹색을 하고 있었다. 레몬빛의 복도의 빛이 점점 환하게 퍼져나갔다. 클린트는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티브의 말갛게 바라보는 눈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클린트는 자신의 표정을 의식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 ...음. 캡틴. 전 당신이 절 그냥 클린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고맙구요. 그게 사치가 아니라면, 네, 절 클린트라고 불러주세요. "

 

" 그래. 그러도록 할게. "

 

" 네. ─뭐, 당신에게 레골라스까진 바라지 않으니까요. "

 

" ...... "

 

뭐, 닉네임으로 불러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긴 하였다. 코드명이 아닌 제멋대로 붙인 닉네임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고 유쾌하니까. 그렇지만 그게 무리라면. 그래, 역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클린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뱉은 말을 끝내고 또 가볍게 웃었다. 입술이 얇아져 옆으로 길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눈썹 아래의 어느부분을 긁적였다. 손가락 끝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고, 단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레골라스라는 닉네임은, 들은 적이 있었다. 토니가 클린트를 레골라스라고 불렀다.

 

그 닉네임을 가장 먼저 내뱉은 것은 그러니까 토니 스타크였다. 스티브는 입을 다물었다. 토니가 생각나서였다.

스티브 로저스에게 있어서, 토니 스타크는, ─어려운 존재였다. 형용하기 힘든.

 

 

 

 

 

 

 

 

 

몇 번 다툰 것이나 의견이 맞지 않은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순한 그 이유때문이라면, 아니 그러한 이유에 관련된 감정의 소모는 이미 대부분 해소가 된 상태였었다. 특별히 그것에 관해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공공의 적이 그들을 뭉치게 했고, 스티브또한 말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아이언 맨'에 관련해서 가진 여러가진 얽힌 감정들을 그 뒤 토니의 행동들을 보고 스스로 해소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입싸움이나 태도로 불쾌하게 생각했던 감정들은 더 이상 스티브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언 맨, 토니 스타크는 좋은 남자라는 것을 스티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혀 군인 답지 않지만 - 물론 토니는 군인이 아니었고 - 전혀 정이 없는 남자인 것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더 이상 토니에게 빈정대거나 시비를 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가 스티브에게 이렇게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은, 오히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에 일어났던 일련의 일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의 집-스타크 타워- 재건설에 빠져있는 듯 하였고, 스티브는 몇날을 도시를 훑어보며 떠도는 것을 끝으로, 다시 쉴드로 돌아왔다. 21세기에 비죽 튀어나와있는 자신의 존재의 기타 귀찮은 부분을 잘 정리해줄 수 있는 곳은 쉴드밖에 없었다. 슈퍼솔져의 몸을 마땅히 의탁할 곳도 그곳외엔 없었다. 쉴드는 스티브가 돌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귀찮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것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기도 하였고 혹은 그 복잡한 생각에 뒤엉킨 머릿속을 해소하기 위해 충분히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기도 하였으며, 그대로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스티브는 무직인채로 시간을 하릴없이 보냈고, 쉴드안에서, 쉴드는 그런 스티브에게 어떠한 제약도 주지 않았다. 스티브는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의미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이 도저히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쉴드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리라. 곧 스티브는 쉴드-닉 퓨리-에게 쉴드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쉴드도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군인이니 아마 그와 비슷한 일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도. 자신을 받아준 그 날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쉴드는 준비해둔 무언가를 자신에게 쥐어주려 하겠지. 그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스티브는 그 낯설지 않은 일들을 낯선 공간 위에서 다시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땅에 서 있는 한 여기에서 살아가는 한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쯤이었다.

토니가 시시때때로, 쉴드를 찾아왔다.

 

찾아올 때마다 스티브를 찾았다. 스티브는 너무나 넓은 쉴드의 안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이해하는 장소에까지만 갔고, 행동범위가 자연히 좁아졌다. 아직 쉴드쪽에 별다른 언질을 하지 않고 여전히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였다. 처음에는 토니가 볼일이 있는 것은 당연히 쉴드일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스티브는 그다지 토니의 방문에 적극적으로 인사하는 경향도 없이 그를 보아도 스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 뒤, 토니가 스티브의 갈 길을 쫓아왔다. 그리고는 항상 왼팔을 먼저 뻗어 스티브의 어깨를 한 번 아프지 않게 내려친 뒤에,

 

" 어려운 것 없어? "

 

" ...... "

 

다른 말 한마디 없이, 늘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언제나 가장 첫마디로 내뱉는 것이 바로 " 뭐 어려운 것 없어? " . 말가운 눈동자를 하고 그렇게 묻는다. 스티브는 그 질문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21세기에 적응하면서 어려운 것이 없는가를 묻는 것인지 쉴드안에서 지내면서 어려운 것이 없는가를 묻는 것인지 부터가 잘 알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복도를 지나가는 길을 꼭 가로막고 왼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내려치면서 그렇게 묻는 토니를 내려다보며, 늘 스스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은 늘 조금씩 스티브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럴때마다 토니는 그다지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한 채 왼쪽 눈썹만을 위로 올려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대답을 못하는 나날을 보내며, 스티브는 토니가 조금씩 더 어려워졌다. 그러다가 어느날은, 그의 다문 입매를, 그것을 덮은 수염을, 수염 밑에 번뜩이는 맑은 메탈블루의 빛을, 순서대로 바라보고 있으려다가 문득, 스티브는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 ...여기 샤워기를 다룰 줄을 잘 모르겠어. "

 

" 샤워기 말이지? "

 

토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따라했다.

그뒤도 스티브는 약간 어눌하게 떠듬떠듬, 어려워하는 사람앞에서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등의 땀줄기가 눈에 잡히는 듯 훤하였다.

 

" 비틀즈가 대체 누구지? "

 

" 새로운 총들의 다루는 방법과 위력이 가늠돼지가 않아. "

 

" 그냥 퐁듀도 잘 모르겠는데, 초콜릿 퐁듀라는 건 더더욱 뭐가 뭔지...? "

 

그런 다양한, 스티브가 만난 '어려운 것'에 대해, 토니는 별다른 기색도 없이 단지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가끔 스티브가 내뱉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면서 스티브의 시선을 쫓았다. 스티브는 그의 쫓아오는 시선에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다 어렵게 어렵게 그러모아 내뱉은 말이 전부 끝나고 나면 " ...그게 다야. " 간신히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 말을 들은 토니는 여전히 말가운 눈으로 스티브의 금색으로 부서지는 머리칼의 어느 언저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 과연. " 하고, 곧 멀어지는 것이었다.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토니의 등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찌푸린 눈 그대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간신히 해방됨에 있어서의 안도감인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불편함에 마음이 조이는 건지 알 수 없을정도로 뒤섞인 감정의 한숨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로 그를 뿌리칠 수조차 없어서, 토니의 등이 굉장히 작아질 때까지 늘 그렇게 우뚝 선 채로 그의 뒤를 쫓고는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토니가 복도 너머로 가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고 나면 그제야 머리를 사납게 긁적이며 넓은 어깨를 아래로 떨구는 것이었다. 긴장이 목에 쌓여 딱딱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스티브를 피곤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토니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들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이내 블랙홀화 되어버렸다.

 

다음날부터, 차례차례, 토니는 들고온 것을 스티브 앞에 풀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교재들이거나 다양한 시뮬레이션 시스템이거나 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차근차근, 토니는 스티브가 토니에게 간신히 내뱉은 어려운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토니는 객관적으로 제법 훌륭한 선생이었다. 낯선 용어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20세기사람인 스티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21세기의 물건들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하였다. 사실 그는 처음에 스티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전에 스티브가 이용하는 것들 대부분을 그가 사용하기 쉽도록 그에게있어 익숙한 물건들로 바꾸어 놓았었다. 예를들어 토니는 몇시간만에 스티브 로저스 전용 샤워부스를 하나 만들었는데, 20년대 미군에서 사용하는 시스템 그대로의 샤워기를 재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토니는 그 샤워기를 다시 또 몇시간만에 원래 쉴드에서 사용하는 샤워부스로 바꾸어놓았다. 그러고는 " 아니 역시. 넌 20세기 사람이지만 20세기론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역시 최근 것에 익숙해지는 게 맞는거겠지. " 고 한 뒤에 스티브에게 최근 샤워기의 사용방법을 일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서 눈이 한곳으로 고정돼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어어어어하며 그의 말을 따랐고, 토니의 친절한 설명덕분에 짧은 시간안에 샤워기의 이용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번에 토니는 다양한 씨디와 레코드를 들고 나타났다. 비틀즈에 관련된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했고 다양했다. 그리고 레코드는 알겠는데 씨디가 뭔지 모르겠어서 또 거기서부터 토니는 스티브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지금 당장 리버풀로 달려가야하는건지 아니면 레코드가게로 달려가야하는 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멍하니 토니가 반복해서 틀어주는 'a day in the life'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또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 토니는 스티브가 내뱉은 모든 '어려운 것'들을 차근차근 알려주고 가르치기를 반복했다. 물론 토니가 쉴드로 찾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몇일이나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어달동안, 얼굴을 보지 않는 날보다 보는 날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 당신, 이렇게나 한가한가? "

 

어느날 결국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다.

 

" ...그런 건 됐고 빨리 눈앞의 교재에 집중해, 캡틴. 이런 것도 모르다니, 나라면 무지한 나자신이 너무 싫어서 어떻게든 돼어버리고 말 걸. "

 

지금 너때문에 어떻게 돼어버릴 것 같은 건 어쩌고. 정말 못참겠어서 터져버릴 것같은 머리를 뒤흔들며, 스티브는 산산이 부서지는 금발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남자는 용케, 오늘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조만간 또 찾아올 것이었다, 무슨 용건이든 가지고서는. 스티브는 눈을 빠르게 두 어번 깜박였다. 요몇달간의 토니의 노력으로 스티브는 그래, 지금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토니의 덕분으로, 감사하단 마음도 어느정도 생겼다.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친절은 불친절보다 더 뜬금이 없다. 무엇보다 토니는,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스티브에게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지 어째서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인지에 대해 정말이지 일체, 알려주는 바가 없었다. 토니 스타크-아이어맨은, 친하게 지낼 생각따윈 전혀 없었던 게 아니었던가. 캡틴아메리카인 나, 스티브 로저스하고는. 스티브가 생각하기에 토니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데, 스티브로서는 도저히 토니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주지 않는 답답함이 공기중에 떠다니고 있는 것이 정말이지 너무 싫어서, 스티브는 토니를 생각하면 피어오르는 해답없는 뭉개구름에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서 클린트가 스티브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헛기침을 하며, 아직 머리뒷끝에 남아있는 토니의 잔재들까지 마저 다 떨쳐버리고 말았다.

 

" ─그래, 클린트. 너도 가능하다면, 날 다시 스티브라고 불러줘. "

 

" 영광입니다. 스티브. "

 

" ...음, 그리고 말이야. 저기, "

 

" 네? "

 

" 그 레골라스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너에게 물어도 괜찮을까? "

 

" 아. 레골라스를 모릅니까? "

 

클린트는 그렇게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자신의 멍청한 발언에 스스로를 욕하고 말았다. 당연히 모르지, 그럼 알겠나. 스티브는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클린트는 바보같은 말을 내뱉었다고 사과하며 " 그럼 지금 쉴드의 노는 홀을 하나 빌려서 같이 보지않겠어요? DVD. 저도 워낙 팬인지라 몇 번을 봐도 처음 보는 것처럼 재밌게 잘 볼 수 있거든요. " " 음, DVD란 말이지? " 그건 뭐지라고 묻지 않아도 클린트만 따라가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겠지. 스티브는 그저 다시금 또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클린트가 아주 조금 앞장서 가는 복도의 길을 따르며 스티브는 그제야 클린트가 가져다준 드링크로 목을 약간 축였다. 차갑고 단순한 얼음알갱이의 맛. 목구멍의 벽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시원했다. 스티브는 묵묵히 클린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고, 두사람의 겹쳐진 그림자 위로 클린트의 띄엄띄엄 이어지는 수다가 - " 역시 보르미르가 최고죠. 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눈물이 날 때는 왕이 귀환할 때라는 건 저도 이견 없지만요, 그래도... " - 가느다랗게 쌓였다. 스티브는 머리위로 지나는 레몬색의 희미한 빛사이를 둘로 갈라, 그 사이를 걸어갔다.

 

커다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스티브는 다시 떴다.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인기척이 느껴져, 왼쪽 어깨 너머로 멀지 않은 곳에 클린트가 있는 것을 알았다. 스티브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오프닝의 화려한 글자움직임에 부신 눈을 다시금 깜박이며, 결국 입을 열었다.

 

" 저기 말이야, 클린트. "

 

" 네 스티브. "

 

" ....토니 스타크 말이야, 그사람. 혹시 나에게 하는 요새의 태도,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있어? "

 

" ....... "

 

클린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르며, 적당히 내뱉을 수 있는 말을 고르는 듯 머뭇하다가 타이틀 시퀀스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신의 말을 적절한 타이밍에 밀어넣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 아니요, 그다지. " " ...... " 클린트의 말에 스티브는 그래, 그렇겠지. 알 리가 없지. 정말이지 참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토니 스타크.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도 클린트와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조금 어지러운 듯한 영상에 집중해야하는 것을 깨닫고 스티브는 단지 턱을 조금 들어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멈추었다. 클린트만이 슬쩍 스티브의 뒤통수를 그의 자리보다 몇칸 뒤쪽에서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 웃고 말았다. 입으로 빈정대거나 앞에서는 농담어린 말을 내뱉는다거나 약간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스티브를 조금 놀린다거나. 토니 스타크의 언행정도는 클린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의 그런 태도를 그저 액면가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테지. 하지만, 사실 여기 있는 (혹은 여기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라고 하는 인물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은 오로지 스티브 로저스 본인 뿐인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무척이나 ┐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역시나 당신뿐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사실 토니 스타크도 예외일 수는 없는 거라는 것도. 클린트는 미소띤 얼굴 그대로 의자의 등받이 뒤를 향해 몸을 깊게 뉘였다.

 

 

 

 

 

" ...지금 뭐하는거지? "

 

토니는 여러명의 쉴드요원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자칫 그의 행보에 관해 알고있는 요원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쉴드의 요원 몇 명을 협박하여 쉴드전체의 CCTV까지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 요원덕분에 토니는 한 명이 아닌 둘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코드명 호크아이로 하루동안 전세를 낸 쉴드의 어느 홀 하나는 크고 원탁형이었다. 그러고보면 쉴드요새의 홀은 원탁형이 많았다. 언젠가 훔쳐보았던 쉴드요새 내부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토니는 쉽게 둘이 있는 방을 찾아내었다. 토니는 후, 하고 숨을 내뱉고는 문 앞에서 잠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토니는 스티브에게 오늘 설명해주려 하였던 다양한 퐁듀의 종류와 먹는 방식에 대해 미리 예습을 해야했기에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거기다가 오늘따라 일이 계속 쌓여 처음에 오려고 예정했던 시간에 크게 벗어나 이렇게 밤이 되어서야 겨우 쉴드에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토니는 오는길에 퐁듀로 유명한 식당하나를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이 아니고 셋인 것은 좀 예상밖이긴 하지만, 스타크 공업의 토니 스타크가 예약한 테이블에 예고없이 의자를 하나 더 두어야한다고 식당측에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싫어하거나 거절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토니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자동문은 열리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열렸다. 홀 안은 아주 어두웠다. 그리고 홀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딧이 'Into the west'의 bgm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피지 위에 그려지는 얼굴과 지워지는 얼굴의 반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토니는 눈썹을 찌푸리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몇 개 되지 않는 의자 위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두 사람 지금 뭐하는 거냐고? "

 

" 아, 토니. "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아는척하는 클린트의 눈동자가 일렁일렁하고 있었다. 이게 뭐... 지금 반지의 제왕3 보면서 우는 거야? 토니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밤눈이 밝아 그대로 보고있었던 클린트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눈가를 닦았다. " 아.. 역시 왕님이 귀환하시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감동이 다르네요. " 대체 뭐라는 건지... 토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클린트에게서 눈을 떼고 그를 지나쳤다. 헉, 클린트의 어깨 옆편에 쌓여있는 저것은 설마 DVD박스세트... 그렇다면 지금 앉은자리에서 1부터 3까지 내리 다본 거? 러닝타임 아홉시간 반 이상? 어이없... 스티브는 두사람의 말소리가 들려도 미동도 하지 않고 스크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클린트가 슬그머니 눈아래를 훔치는 것이 시야아래로 보였지만 무시하고, 토니는 왼손을 뻗어 스티브의 오른쪽 어깨를 두드렸다. " 캡틴? " " ...... " " ....!!! " 스티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고, 그러한 스티브 또한 여과없이 굵은 눈물 두줄기를 줄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토니는 흠칫하며 스티브의 어깨를 두드린 손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눈동자로 멍하니 토니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눈물을 닦아낼 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아직도 잘못 건드리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터질 듯 한 모양새였다. 토니는 당황하며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내는 스티브를 앞에 두고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렸다. 이런식으로 스티브의 눈물을 보게 될줄은? 이런식의 눈물은 좀 더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보려고 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뭐를 해야할 거 같기는 한데 뭐를 해야하나, 손수건을 건네야하나 이대로 스티브의 동그랗게 구부러진 등을 세게 안아버려야하나..?! 혼자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진 토니를 내버려두고, 클린트는 눈물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스티브에게 말을 건넸다. " 내가 말했던대로죠? 스티브. 너무 좋지않아요? " " ..!!! " 그리고 스티브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토니의 목이 더욱 빠르게 클린트쪽으로 돌아갔다. 뭐, 스티브!? '스티브'라고!?? 어떻게 저렇게 친근하게 호크아이주제에 스티브라고?!!(너무하군..) 토니의 아랫입술이 열려 파르르 떨리거나 말거나, 스티브의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조용조용히 흘러나왔다. " ..그 말 그대로다, 클린트. 정말 최고로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 적잖이 감동받아 스티브의 목소리는 목 안에 꽈악 눌린 채 흘러나왔다. 그와중에 토니는 다시금 스티브의 입에서 나온 '클린트'라는 발언에 또 놀라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지만.

 

그뒤로도 조금 더 훌쩍이고 난 다음에야 겨우 숨을 내쉬고 눈물을 멈춘 스티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꼬리 끝에 남은 눈물을 닦아냈다. 고개를 들어 약간 부운 눈으로 토니를 바라보니, 어이쿠 토니의 인상이 가관이었다. 있는대로 찌푸려진 미간 위로, 솟아난 힘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왜 화났지 이사람? 스티브는 순간 당황하여 목뒤를 긁적이며 말을 더듬었다. " 어, 어 왔는가 토니 스타크. 내가 인사가 좀 늦었지... " " ......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간 토니가 손을 들어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토니의 굵고 단단한 손가락 끝의 손톱만이 반딱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티브는 무뚝뚝하게 놀리는 왼손이 자신의 눈가 어딘가를 가볍게 훔친뒤에 멀어지는 것을 깨닫고, 토니의 손가락 끝을 눈으로 쫓았다. 토니의 손 끝에는 눈물로 떨어진 금색의 속눈썹이 붙어 있었다.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토니는 뭔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후,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손가락 끝을 다른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빨갛군... 그런 얼굴을 내가 아닌 남앞에서.. "

 

" ...어? 지금 뭐라고 했... "

 

" 다음엔 내집으로 초대하지. 내가 진정한 홈씨어터가 무엇인지 가르쳐줄테니까. "

 

" ...하아. "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복잡한 친구 앞에서 머리가 또 혼란스럽고 조금 답답해진 스티브였지만 그는 그냥 토니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너무나 불쾌해보였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으로선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스티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토니의 어깨너머로 클린트가 소리내지 않고 배를 끌어안고 있음을 보았다. 배를 끌어안은 채 어깨를 떨면서 몸을 접고 있어서 저건 웃고있는건가...? 싶어서 대체 무엇때문에 저렇게 웃는 건지가 알고싶어졌지만, 스티브는 화가 난 듯한 토니의 얼굴 앞에서 감히 클린트에게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은 열심히 토니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토니는 dvd가 어떻고 쉴드의 시스템이 어떻고 요새의 블루레이가 어떻고 자기 집에 있는 영화관보다 더 영화관다운 무언가에 대해서 끝없이 말을 잇고 있었다. 아... 정말, 어려운 존재다. 형용하기 힘든. 스티브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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