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he with longing
저녁식사를 하면서 밥을 다 먹으면 산책을 나가자고, 버키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가 스푼을 거의 놓칠 정도로 놀랐던 것은. 브루클린으로 이사오고 나서, 버키가 처음으로 보인 관심이었다. 버키는 스티브와 함께 브루클린으로 건너오고 나서도 대부분 무기력했고 외부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며, 화초처럼 거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더랬다. 때로는 숨소리조차 느끼지 못했고, 스티브는 그럴때마다 냄새로 버키의 존재를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냄새로 주변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때로는 한치앞도 구분이 되지않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오로지 후각에만 의지한 채 헤매일때가 더러 있었으니까. 버키는 언제나 새것같은 철의 냄새와 희미한 피냄새가 났더랬다. 그리고 지금은 토마토스파게티와 연한 바질의 향이 난다.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리. 스티브는 반습관적으로 킁, 하고 냄새를 맡으며 버키와 자기 주변에 둥둥 떠올라있는 스파게티의 기름향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런 것에 위안받는 자기모습이 우스워서 저도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버키와 똑같은 향기가 나겠지. 나또한.
낮동안 내렸던 비가 금방 그쳤지만, 브루클린의 저녁밤에는 노을이 끼지 않았다. 단지 새파랗게 검어지는 하늘에 그림자를 머금은 구름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스티브는 마을의 주변에서 젖은 흙에서 나는 먼지의 냄새를 맡았다. 버키는 허공에서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짙은 밤색의 머리칼을 무뚝뚝하게 내버려둔 채, 앞의 어딘가를 보며 무작정 걷고 있었다. 빠른 걸음이다. 마을이 작아서, 아무리 낯선 곳을 헤매이더라도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브는 입을 꽈악 다문 채 앞장서서 마냥 걷고있는 버키를 굳이 가로막지 않고 그저 그가 가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저녁의 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켰고 스티브는 눈 어딘가의 주름을 찌푸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의 브루클린은 더 이상
스티브 로저스의 기억 속의
그 브루클린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스티브는 산보다 높은 곳에 만들어진 다리위 철도와 그 철도를 덜컹이며 지나가는 긴 기차가 뿜어내는 인공불빛과 철의 굉음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모든 스티브에게 조차 낯선 브루클린은, 그러므로 지금의 버키 뷰캐넌 반즈에게도 지나치게 낯선 풍경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에겐 낯선이란 단어조차 의미가 없었지.
그에게 브루클린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스티브는 앞서 걸어가는 버키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거의 소리없이 걷는 버키는 단지 가끔 비포장도로 위의 자갈들을 밟는 소리를 낸 것 뿐이다. 스티브는 물론, 그런 것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브루클린으로 돌아오면, 비록 스티브는 돌아온다라는 표현을 쓴다하더라도 지금의 버키에게는 생전 처음 온 것마냥 생경한 이 마을로 돌아오면, 혹시라도 버키의 옛날 기억의 부스러기라도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스티브는 그런 것을 기대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윈터솔저에 대한 책임은 물론 자기가 다 지겠다며, 브루클린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돌아오는 엄청난 비난과 의문들을 향해, 스티브는 또한 그렇게 말했다. 그 그리운 곳, 그러나 이미 낯설기만 한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결코 버키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그렇게 단호하게, 자신의 귀향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놓고, 이제와 이 처음보는 브루클린에 그리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리움이라니. 그리워질 것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스티브에게 익숙한 브루클린의 정경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건만. 역시 이 그리움은 거짓말인 게 아닐까. 스티브는 웃었다. "...바람이 다네." 먼지의 냄새를 머금은 바람에 귀밑머리가 흩날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훔치면서, 스티브는 입을 열었다. 버키는 흩날리는 밤색 머리칼 사이로 힐끗, 스티브를 돌아오며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자신을 바라보는 버키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함께 가지 않겠냐며 뻗은 스티브의 손을 당연히 잡지 않았지만, 버키는 거의 초점이 없는 눈을 하고도 순순히 스티브를 따라 브루클린까지 왔다. 브루클린으로 향하는 차에서 버키는 거의 아무말이 없다가,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누구를 죽이면 돼지?" 스티브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돼." 스티브의 그 말에 버키는 혼란스러웠음이 분명하다. 화가 난 듯, 슬픈 듯, 그러나 아무 표정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고있는 버키의 얼굴에서 스티브는 그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이 달다는 건 무슨뜻이지?" 그래, 마치 지금과도 같은 얼굴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들었을 때에 오는 혼란을, 버키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거의 기척없이, 그저 방 한구석에 세워져있는 화초처럼 숨소리조차 내지않고 굳어 있는 것이다. "기분이 좋다는 뜻이야." 그래서 스티브는 자신과 같은 냄새로 둘러싸인 버키에게 안심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그의 머리칼 끝에서부터 연해져가는 그 토마토소스의 향과 바질의 향을. 버키는 여전히 스티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그 목적지가 전혀 정해지지 않은 정처없는 산책을 묵묵히 따랐고.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라고 했지?"
"...그랬지."
제방 어딘가에 서서, 밤에 반짝이는 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버키는 더욱 강해진 강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스티브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조용히 버키의 옆에 서서 강의 바람에 한쪽방향으로 허리를 숙이고 흩날리고 있는 어둠속의 풀들을 바라보았다. 밤에 빛나는 풀들은 연한 녹색을 하고 있었다. 버키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운가?" 스티브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립기는. 이렇게 조금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서있어도 이렇게 바라보아도, 우리들의 고향이었던 그때의 브루클린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는데.
"70년이 흐르고. 이제 이곳은 그때와 같은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잖아. 심지어 이 강조차도."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오자고 한거지? 고향이라는 곳에 오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거라 기대라도 했나?"
"하하. 글쎄.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그럼 왜?"
"...이제 나도 모르게 되어버렸어."
"내 마음에 나도 자신이 없네."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오늘 처음 본-그렇게 느껴지는- 고향의 강가에 서서 스티브는 그렇게 약한소리를 내뱉어버린 자기자신을 잠깐 후회했다가, 곧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차피 옆에 있는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버키가 아닌가. 버키는 약한소리를 내뱉어 저도모르게 살짝 뺨이 붉어진 스티브의 얼굴을 어느새 바라보고 있었다. 버키는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키는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낯선 것도, 매우 익숙한 것도 같았고, 그 상반되는 두 개의 감정이 떨어질수도 없게 뒤엉켜있는 것을 어떻게 소화해낼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래서 버키는 점점 표정을 잃어버렸다.
"...넌 나를 버키라고 부르지."
"그래. 버키."
"하지만 난 버키였던 때의 나를 잃어버렸어."
"......"
"잃어버렸단 말조차 낯설어. 왜냐하면, 네가 아무리 버키에 대해 이야기해도, 난 그사람을 모르니까. 그 사람이었던 때의 나를 모르니까."
"...응. 그래."
"...항상 비교하고 있나?" 내가 잃어버린 버키와, 지금의 나를.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며 버키를 마주 바라보았다. 버키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눈 속에서 가끔 차오르던 혼란이나 곤란 같은 것들도 잠잠해져 있었다. 밤이 내려 버키의 얼굴이 드문드문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먼 곳의 건물들이 내뿜는 인공불빛들만이 간간히 빛나, 버키의 얼굴은 어둠속에서도 때론 붉거나 오렌지색처럼 보였다. 스티브는 버키에게 다가가 그의 철로 만든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스티브는 가까이 다가가 버키의 팔에서 나는 쇠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버키의 손을 잡은 스티브의 손가락이 끝에서부터 차가워져갔다.
"내가 옛날의 버키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키."
"......"
"그때와 너와 지금의 너를 비교하고, ...그때의 너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해?"
"내가 먼저 물었어. 네가 나에게 대답을 해주어야해."
스티브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네." 스티브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리고 피식하고 웃으며 버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때로 붉거나 오렌지색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어려워. 버키."
하지만 스티브는, 알아주길 바랐다. 그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그 옛날의 브루클린을, 그 옛날의 너를 더듬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왜냐하면 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잖아.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잖아.
네가 기억하지 않고, 나만 기억할 뿐인 그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그렇군."
버키는 스티브의 대답에 화를 내거나 실망하거나, 그런 기색은 없어보였다. 단지 고요했다. 스티브는 버키의 짙은 눈동자 속에서 혼란이 피어오르지 않은 것에 기뻐했다. 버키는 천천히 스티브의 손을 빼내었고 스티브도 곧 버키의 손을 놓았다. 버키는 "...돌아간다."라고 짧게 말하고 제방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밤이 되어도, 버키는 여전히 고요하고 거의 발소리를 내지않고 있었다. 스티브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스티브는 너무나 낯선 버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그의 옛날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풀을 먹인 말끔한 군복의 청결한 냄새도, 말할 때마다 늘 말꼬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던 말투도, 무엇보다 항상 깔끔하게 정리한 그의 올백머리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때의 스티브만이 볼 수 있는 각도의 얼굴도. 스티브는 웃었다. 하지만 버키, 변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그때와는 상당히 다르거든. 더 이상 너를 올려다보지 않는 내가 된 순간
그때의 너와 나란
것은
이미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리움의 냄새는 대체 무엇인가. 버키.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스티브는 또 한차례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 위에 강바람이 스쳐지났다. 스티브는 기차가 뿜어내는 인공불빛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감아도 한걸음, 앞에 서서 걸어가는 버키 반즈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거지?" 오늘 버키는 영 대답하기 힘든 것들을 묻는군. 스티브는 아무 대답도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버키에게 미안해졌다. "아직 아무 계획이 없는데." "그렇군." 버키는 순순히 납득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돌아오는 길 내내, 두사람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단지 낯선 브루클린의 밤의 길을 꾹꾹 밟으며 돌아왔다. 그들의 집은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을 켜놓고 외출하길 잘했다. 스티브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done
트위터 스른전력. 주제 : 그리움
외로워.. 외로워보여.. 왠지 둘 다 외로워보이는 글이 쓰고싶었는데, 진짜 스티브도 버키도 외로워보여서 내가 다 울쩍해졌음.(야)
그리워하는건지 그리워하지 않는건지. 스티브 본인도 종잡을 수 없는 자기자신의 감정에 대해 쓰고싶었다. 윈터솔저인 버키는 처음 써본 듯... ㄷㄷㄷ 어렵다. 밤에 대한 풍경에 냄새가 짙은 것은 내가 방금 산책을 갔다와 맡은 냄새를 그대로 쓴 것.
'marvel > 버키스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키스팁] GOODBYE, WENDY 15. 08. 26 (4) | 2015.08.26 |
---|---|
[버키스팁] なぜ 泣く 15. 07. 22 (0) | 2015.07.22 |
[버키스팁] 얼어버린 너를 따뜻하게 14. 12. 06 (0) | 2014.12.06 |
[버키스팁] Growing Pains 14. 10. 07 (2) | 2014.10.07 |
[버키스팁] In between 14. 10. 01 (0) | 201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