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BYE, WENDY

(스티브TS)

 


(1)

 웬디, 솔직히 말해서 본명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쭈욱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의 이웃 중 하나였던 그 작은 소녀를 누구라 할 것없이 웬디,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조차도 그녀를 웬디라고 불렀으니까. 스텔라는 그 아주 어릴때부터 보아왔던 나이가 셋, 넷정도가 어린 소녀에게 늘 그렇게 묻곤 했었다, "혹시 내가 널 웬디라고 부르는 게 싫다면, 네가 그 너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란다면. 난 언제든 너를 부르는 이름을 바꿀 생각이 있어." 그것은 스텔라 로저스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냥함에서 발현된 배려였고, 물론 웬디라고 하는 계집애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는 배려였다. 소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는 외모에서 나온다고 믿고있는 아이였고, 자연스럽게 오직 그것만이 세상의 가치라고 믿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작은 소녀는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요정과도 같은 발음이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고 그것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을거라고 했다. 웬디의 어딘가 가시돋힌, 그리고 스텔라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에는 스텔라는 기분나빠 하지 않았다. 스텔라는 어릴 때부터 쭈욱, 누군가의 가치관을 무시해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가 웬디의 본명을 잊어버린 것은 또한 그런 마음의 발현이었다.


 그런 웬디가 동네에서 가장 이름 나 있는 버키 뷰캐넌 반즈를 노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만보면 늘 버키의 옆에 붙어있는 스텔라 로저스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것이고. 사실 스텔라가 버키에게 붙어있는 것 만큼이나 버키가 스텔라에게 붙어있으려고 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눈동자 위에 외모의 순위를 매기는 필터를 씌운 웬디에게는 그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버키는 동네의 어떤 청년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개구장이 같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이 겨우 스텔라 로저스 같은 사람과 늘 함께 다니려고 할까? 웬디는 절대로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동정해서. 그 작고 연약하고 늘 병을 달고다니는 사람이 불쌍해서. 그저 소꿉친구라는 작은 연 하나를 끊지 못하는 것은 그 연약한 언니의 새하얀 안색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웬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웬디는, 버키 뷰캐넌 반즈라고 하는 남자의 마음 속에 스텔라 로저스라는 사람이 어떤 형태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그야말로 조금도 알지 못했다. 왜 버키가 매일 밤마다 스텔라의 풍성한 금발을 쓸어내리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드는지를, 왜 버키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먼저 스텔라의 건강을 걱정하는지를, 왜 버키가 늘 앞서 걸어가는 스텔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굿모닝."하고 웃으며 인사하는지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웬디는 버키가 자기와 섹스하던 날에도 그렇게 조금의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자신의 외모와 자신의 몸이 버키라고 하는 수컷을 사로잡았다고만 생각하고 말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웬디는 또래보다 훨씬 빨리 성숙하게 되었고, 그 풍만한 가슴과 늘씬한 다리로 몇명의 별볼일 없는 남자들을 홀렸다. 웬디는 남자를 알아야 최종적으로 자신과 어울리는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서슴없이 첫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웬디는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자기가 버키를 유혹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디를 안으면서도, 버키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키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웬디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을까?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웬디는 수많은 버키의 힌트들을 그저 전부 놓쳐버리고 말았다. 자기 자신의 매력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웬디. 너는 예뻐. 널 좋아하는 남자들을 분명 많을 거고, 널 갖고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겠지. 하지만 난 아냐."


 웬디는 버키의 거절의 말을 그저 상투적인 의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먼저 유혹하는 여성들에 대한 예의같은 튕김이라고 생각했다. 웬디는 진하게 칠한 붉은 입술을 내밀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오빠, 난 그 무수한 남자들보다 버키 오빠가 제일 좋아."


 버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키는 예고도 없이 자신의 방에까지 쳐들어온 웬디에게 화를 내지않고, 그저 질렸다는 듯한 표정만 하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며 목을 긁적이는 막 잠에서 깨어난 버키 뷰캐넌의 눈가의 주름이, 웬디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웬디는 이게 틀림없는 나의 첫사랑, 입술을 내밀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웬디.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괜찮아. 금방 나에게 빠지게 만들어줄게. 자신있으니까."

 "아니. 그렇게 될 일은 없어. 그런 날은 오지 않아."


 그리고 어느새 버키의 가랑이 사이에 앉아, 웬디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버키의 하반신에 밀어붙였고, 아침이라는 것도 있어서 버키는 웬디의 부드러운 살이 닿는 것만으로 바지가운데를 단단하게 하고 말았다. 하지만 버키는 자신의 하반신이 어떻게 변하건 동요 한 번 하지 않은 채, 그저 조금 차가운 눈동자로 웬디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웬디는 버키의 그 차가운 시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버키가 보여주는 신체의 변화에 기뻐하며 웃었다. "이것봐. 역시 날 좋아하는 거지." 웬디는 버키의 신체의 변화를 자신을 향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다시 한 번 버키에게 긴 한숨을 내뱉게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몸만 바라는 거야." 버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버키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말로 안고싶은 여자는 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몸과 마음을 두 개로 나누며 살아가는 자기자신에게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웬디는 그런 버키를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설사 버키가 웬디의 몸에 푹 빠진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웬디가 말했던 것처럼 버키가 정말로 그녀에게 푹 빠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빠진다'가 아니라는 것을. 버키 뷰캐넌 반즈의 마음은 이미 그 남자의 가슴속에는 없다는 것을. 웬디는 두 팔을 뻗어 버키의 목에 감고 그대로 버키와 밀착했다. 웬디의 자신이 넘치는 생기있는 미소는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버키는 키스를 해오는 웬디를 그래서 뿌리치지 못했다. 버키는 틀림없이 쌓여 있었다. 성적으로 몸이 답답한 상태이기도 했다. "몸뿐이어도 괜찮아. 곧 몸뿐이 아니게 될테니까."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하며 다시 키스해오는 웬디의 몸은 정말로 부드럽고 여기저기의 살집이 말랑해서, 감촉이 너무 좋았다. 버키는 그녀와의 키스에 집중하려 저도모르게 눈을 감으면서, 그러나 머리로는 또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버키는 늘 스텔라의 생각 뿐이었다. 웬디는 어째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이렇게 버키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몸을 겹쳤으면서, 버키의 심장이 뛰는 것이 왜 자기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버키는 웬디의 풍성한 금발을 손가락에 휘감으며 사실은 스텔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스텔라. 지난 밤도 자다가 갑자기 깨는 일이 없었기를. 호흡이 곤란해지거나 열이 오르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를. 네가 소중하다는 나의 마음이, 네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안았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일이 없기를.


(2)

 애초에 버키가 스텔라를 안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꼭 스텔라를 부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미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성장이 멈추고, 이제는 웬디같은 자기보다 어린 여자애들보다 작은 몸집을 하고 있는 스텔라를, 버키는 어느날부턴가 도저히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서질까봐. 으스러뜨릴까봐. 그 얇은 손목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꽈악 잡는 것만으로도 스텔라의 손목에는 버키의 손자국이 빨갛게 남는데, 그 이상 어떻게 힘을 주어 끌어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닿을 듯 닿지 않는 듯하게 품는 것외에 버키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텔라에게 그 마음을 말해버린다면, 스텔라는 오히려 웃으며 버키의 이런 생각을 상냥하게 감싸줄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니까. "바보같은 소리. 사람은 쉽게 부서지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스텔라는 오히려 버키를 강하게 안아 오겠지. "난 부서지지 않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버키는 꼭 이미 들은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스텔라를 부술 것 같다는 두려움은 어디까지나, 버키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발현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스텔라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버키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감정이었고, 버키는 그런 자기자신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버키안에서 스텔라는 여자가 되었을까. 버키는 스텔라의 벗은 몸을 꾸고 난 아침에 흘린 정액의 불쾌한 감촉이 트라우마가 된 게 분명했다. 그 날의 몽정을 경계로 버키는 한동안 스텔라와 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버키는 스텔라 모르게 그녀를 생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마음이 사랑으로 변하지 않았던들. 내가 너의 몸에 욕망조차 갖지않게, 너를 안는 꿈조차 꾸지 않게. 차라리 우리가 진짜 남매라면 좋을텐데. 친구를 더럽혔다는 죄책감이, 죄책감으로 인해 다른 여자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곤 하던 그 수많은 밤들이, 버키 뷰캐넌 반즈를 더욱 작아지게 만든 것이다.


 친구를 더럽혔다는 죄책감은 곧 스텔라의 건강을 스텔라보다 더 챙기는 행동으로 발전했다. 버키는 스텔라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스텔라가 가지고 있는 모든 병명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읊조려댔는지 스스로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버키는 스텔라의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결국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또한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가는 격한 행위임에 분명했으니까. 그것은 정말로 좋은 제동이 되어주었다, 버키에게 제동을 걸어주는 좋은 이유. 버키는 한번씩 터질 것 같은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정도로 멀리까지 튀어오를 때에도, 그녀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자기가 왜 그녀의 몸을 위에서 마음대로 짓누를 수 없는가를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버키는 스텔라를 자기자신에게서 지켜줄 수 있었다. 대신 버키 뷰캐넌의 불건전한 감정은 다른 여자의 육체위로 쏟아졌지만. 웬디도 결국은 그 중 하나였다. 버키는 웬디의 풍만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더듬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스텔라의 빈약한 가슴을 상상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하얄 것이다. 속살은 부드럽고 조금 까슬하고, 주름 하나 없겠지. 완만하게 둥그런 가슴 아래에는 브래지어의 가느다란 선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버키는 그녀의 하얀 살 위에 남아있는 브래지어의 흔적 위에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버키의 입술이 그 충혈된 살 위를 스칠 때마다 가느다랗게 신음하는 스텔라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도통 갈 수가 없었다. 버키가 사실, 진짜로 안고 싶은 여자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파, 오빠." 웬디의 가슴을 더듬는 버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그러니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버키는 웬디의 가슴 위로 땀방울을 흘리면서 웃었다. 버키 뷰캐넌 반즈. 넌 어디까지 더 떨어질 수 있을까. 넌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 거야. 이대로 시궁창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는 올라오지 말아버려. 웬디에게 총을 맞고, 스텔라가 혐오어린 눈으로 노려보면 그게 바로 완벽한 날이겠지. 그리고 버키의 비틀린 웃음소리를 들은 그 날에야, 겨우, 웬디는 아주 가느다란 의아함을 느꼈다. 아주 조그마한, 위화감을.


(3)

 스텔라였다. "뭘 보고 있어?" 판매해야 할 오늘자의 신문을 가슴에 가득 끌어안은 채, 스텔라는 가게의 쇼윈도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버키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좁은 어깨를 감싸면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스텔라는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쇼윈도쪽으로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버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버키의 얼굴은 원래의 나이보다 묘하게 더 들어보였다. 단단한 턱과 곧은 목선, 풀이 죽은 듯한 뺨. 스텔라는 왠지 버키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응? 왜?" 버키는 스텔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여 스텔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미소를 짓는 버키의 얼굴은 스텔라가 늘 알고있는 버키 반즈, 그대로였다. 버키는 상냥했다. 스텔라를 향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고는 스텔라에게 바짝 얼굴을 다가가기 위해 일부러 한 팔을 가게의 쇼윈도에 기대다시피하고 있었다. 스텔라는 그런 한결같은 버키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스텔라는 버키가 지금 무슨 고민이 있어 힘들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무엇이든, 절대 자기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을거라는 것 또한. 스텔라는 어릴때부터 버키의 단호한 입매를 늘 보아왔다. 아주 어릴 때 얼굴이 엉망이 되어 나타났을 때에도, 버키는 절대 스텔라에게 얼굴이 그렇게 된 원인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나중에 마을사람 누군가에게, 연약하고 가난한 스텔라를 뒤에서 놀려대는 상급생에게 싸움을 걸어 버키가 엉망으로 맞았다는 사실을 스텔라가 알게 될 때까지, 아니 스텔라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버키는 절대 스텔라에게 단 한 번 자초지종을 알려주는 일도 없이. 그때부터였다. 스텔라가 버키를 닦달하지 않게 된 것이. 단지 스텔라는 그냥 혼자서 버키를 걱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걸. 그럼 물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나혼자 널 걱정하는 것정돈 괜찮잖아. 그정돈 해도 되잖아.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버키의 밤색 두 눈에 가득한 고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쭈욱 지속되어온 일이었지만, 스텔라는 그것에 관해서 그동안 단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단지 스텔라는 혼자서 조용히 걱정만 하고 있었다. 널 그렇게 괴롭히는 것이 무엇일까.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결코 풀리지 않는 고민이 대체 뭘까. 버키. 네가 나한테 조금만 알려준다면. 네가 나에게 힌트를 준다면. 스텔라는 그저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아니긴. 뭐 보고 있었잖아. 갖고싶은 게 있어? 뭔데?"

 "으응, 그냥."

 "말해봐. 이런 일 별로 없잖아, 너. 뭐야, 뭔데? 저 가방? 저 모자? 저 레이스?"

 "아냐 아냐, 아니야."


 스텔라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버키를 말렸다. 버키는 왠지 신이나서 쇼윈도 창에 진열된 물건을 일일이 꼽았다. "저거? 저 목걸이? 저 리본?" 평소 물욕이 별로 없어, 무언가 갖고싶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스텔라를 버키는 거의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본 스텔라의 모습은 버키에게 참 낯설었고, 하지만 그 낯설음이 버키는 결코 싫지 않았다. 버키는 자연스럽게 바지주머니에 손을 밀어넣고 자기가 갖고있는 지폐의 갯수를 은근히 세고 있었다. "아, 혹시 저 반지?" 그리고 연신 아니아니, 곤란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면서 아니라고 반복하던 스텔라도, 진짜 자기 마음에 두었던 물건을 버키가 찝자 저도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아, 저기." "......" 그리고 스텔라의 그 반응을 버키가 놓칠리가 없는 것이었다. 버키는 씨익 웃으며 스텔라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저 은반지?" 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 얼굴이 얼마나 필사적이던지. 귀여워. 버키는 주먹을 쥔 손으로 스텔라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스쳤다. "바보." 그리고 버키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문이 열릴때의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스텔라의 귓가를 스쳤다. 스텔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버키는 기세좋게 들어간 가게 안에서 종업원과 벌써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스텔라는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가게의 창문 너머로 가게의 안쪽을 쳐다보았다. 종업원은 웃는 얼굴 그대로 쇼윈도에 진열된 반지를 집어들면서, 스텔라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스텔라는 그거에 더 얼굴이 불타오르고야 말았고.


 버키는 한 손에 은반지를 쥔 채 가게를 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버키의 얼굴도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바로 낄거라 케이스는 따로 받아왔어." "......" 스텔라는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어떤 다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기뻐할수도, 의아해하며 왜 그런 걸 사왔냐고 할 수도, 어느쪽의 모습도 보일 수가 없었다. 버키는 그런 스텔라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 버키는 자신의 손을 뻗어 스텔라가 그 손위에 손을 겹쳐오길 기다렸다. 스텔라는 붉어진 뺨위로 입술을 꽈악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버키는 미소짓고 있었다. 눈가가 조금 붉어져서, 버키도 어딘가 쑥쓰러워보이는 것이, 스텔라의 가슴을 뛰게 했다. "~." 스텔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버키는 자신의 손위에 겹쳐진 스텔라의 손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버키의 손 위의 스텔라의 손은 너무나 작고, 하얗고, 신문을 나르다가 자주 베여 거칠하고. 버키는 은반지를 들어 스텔라의 손가락이 끼웠다. 이 반지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버키는 솔직히 지금 이순간에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버키가 살면서 가장 큰 소원을 비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너에게 남김없이 전부 다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거리낌없이 지금, 내가 사준 반지를 끼고 있는 너의 손가락에 키스하면서 너에게 사랑해라고 말할텐데. "...이쁘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버키는 그저 그 말 한마디를 겨우 내뱉고야 말았다. 스텔라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부터가 하얗고 어디부터가 붉은색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마워." 그리고 스텔라가 속삭이듯 그렇게 말하는데, 버키는 저도모르게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대로 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너의 고맙다는 인삿말로도 난 왠지 이제, 모든 것이 충분해졌어. 그래. 스텔라. 난 그것으로 충분해.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4)

 "어째서?" 그리고, 웬디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 가게앞, 그 가게의 앞에서 버키의 손 위에 손을 포개고 있는 여자가 자기가 아닌지가. 왜 버키에게서 반지를 받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여자가 자기가 아닌지가. 웬디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나 자기가 잘못본 게 아닐까 되새김질을 했다. 그 과정에서 웬디는 몸을 숨기고 있던 벽에 손톱을 세워 긁었고 웬디의 손톱이 전부 상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웬디는 지금, 그깟 손톱의 아픔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웬디는 아까부터 벽에 숨어 둘을 훔쳐보고 있었다. 버키가 스텔라를 위해 반지를 사고, 버키가 직접 스텔라의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어주는 그 모습을. 그리고 웬디는 분노에 차서, 왜 분노에 휩싸였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여간 도저히 분노가 감당이 안 되서, 이대로 화가 나서 전신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웬디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어째서 스텔라? 어째서 그녀? 어째서 내가 아니고 그 작고 못생긴? 웬디는 주륵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이를 꽈악 깨물었다. 이 모든 것이 웬디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웬디는 그동안 느꼈던 희미한 위화감, 작은 균열속에 어렴풋하던 무언가가 버키가 스텔라에게 반지를 주는 장면을 봄으로써 뚜렷해졌음을 자각했고, 그러나 그 자각을 애써 뿌리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버키 오빠가 내 위에서 허덕이면서 사실은 날 보지 않았다는, 그런 일이 있으려고. 그럼 그의 그 무수한 땀방울은, 그의 그 가느다란 신음들은, 콘돔속을 채우던 그의 정액들은 다 뭐란 말이야. 웬디는 생각했다. 동요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무언가의 착각이다, 동정에 의한 선물이다. 생각에 헛점이 있는 것을 깨달을 새도 없이, 웬디는 그저 스텔라에게서 그 반지를 빼앗으면 모든 일이 끝날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점점 꼬리를 물자, 이제 더 이상 빼앗는다는 생각조차 없어져버렸다. "그래. 돌려받으러 가자. 스텔라 언니에게." 빼앗는 게 아니라, 돌려받는 거라고. 그건 원래 내거였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웬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웬디는 조금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웬디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송두리째 싫어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웬디는, 스텔라의 손을 낚아 채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빼려하였다.


 스텔라는 물론 웬디의 손을 뿌리쳤다.


 웬디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스텔라는 보았다.


 웬디의 오른손이 스텔라의 뺨을 내리쳤다.


 스텔라는 아무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텔라는 단지 눈을 깜빡였다.


 아아, 웬디는 너무나 아파보였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웬디의 충혈된 붉은 눈에서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면서, 스텔라는 꼭 웬디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인 것처럼 느껴졌다.


 스텔라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피맛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웬디를 향해 웃어보였다.


 웬디는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텔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처음으로 스텔라 로저스가 어째서 버키 반즈의 사랑인지를 깨달았다.


 웬디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5)

 하지만, 너는 나의 귀여운 동생인걸. 사랑스러운 웬디. 웬디는 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주었다면서, 버키를 향해 그녀의 은반지를 보여주었다. 버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 버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슬퍼보인다는 것을, 웬디는 이제야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버키 오빠는 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정말 난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을 수가 있을까. 버키 오빠는 늘 이런 표정이었는데, 늘 이런 슬픈 표정이었던 건데. 웬디는 차마 손가락에 한 번도 끼지못하고 단지 주먹속에 꼬옥 쥔 채로 들고있던 스텔라의 은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그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반지를 버키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고 싶었지만, 이제 버키는 그런 걸 허락해주지 않겠지. 나에게는. 웬디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오빠가 돌려줘. 언니에게." 버키는 은반지를 외면한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카페의 어두운 조명과는 다르게, 아직 한낮의 거리는 묘하게 밝아보였다. 사람들마저 빛 속에서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고. "...그걸 어떻게 돌려줘." 버키의 목소리는 아주 슬프게 들렸지만, 하지만 웬디를 탓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웬디는 쓸쓸하게 웃었다. 원망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한톨도 있지 않았던 거였다, 그러니까. 나에겐. 하지만 버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웬디에게. "미안하다." 버키가 그렇게 사과한 것이다. 웬디는 저도모르게 주륵 눈물을 흘렸다. 아아, 사실은 그말은, 제일 듣고싶지 않았는데. "그럼 키스해줘." 웬디는 마지막 오기로 그렇게 말했다. 버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웬디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고마워." 웬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키의 그림자가 버키의 몸보다 더 빨리 웬디에게서 멀어졌다. 웬디는 비어버린 버키의 자리를 바라보며, 입술 안으로 속삭였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내가 버린 내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와야겠지. 하지만 좀 더 오랫동안, 웬디로 있을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사실은 사실은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계집애라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웬디로 살고싶었어.


 하지만 스텔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텔라는


 그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이름을 불러주겠다 했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혹시 내가 널 웬디라고 부르는 게 싫다면, 네가 그 너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란다면. 난 언제든 너를 부르는 이름을 바꿀 생각이 있어."


 그런 사람이라서, 버키 반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서.


 웬디는 반지를 집어들어, 버키가 단 한모금도 입대지않은 맑은 물이 담긴 투명한 컵 속에 집어넣었다. 반지는 퐁당, 하는 소리조차 내지않고 유리컵의 깊은 곳까지 빠져들었다. 웬디는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은반지는 투명한 물 속에서 반짝반짝하게 빛이 났고, 그것은 꼭 잘게 깨어져 있는 유리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녕." 웬디는 빛나는 은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웬디는 그리고, 지난날의 모든 것에 조용한 안녕을 보냈다.


 



 


 


 


 

 




- done

 

 버키도 아니고 스텔라도 아니고 웬디가 주인공인..ㅋㅋㅋㅋㅋ 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하지만 전 제삼자의 시선을 쓰는 걸 사실은 좋아합니다. 잘쓰지는 못하지만 말이에요. 이번글도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나 혼자 쓰면서 재밌기는 되게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쓴 게 아까워서 웹공개합니당 ㅎ 완성도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여요 흑.

 

그러나저러나 버키..ㅋㅋㅋㅋ 버키가 왜이렇게 개싯키처럼 ㅋㅋㅋㅋ 되부렀나 버키야 너이자식 힘내라고 ㅠㅠㅠㅠ 버키팬여러분 죄송합니다 ㅎㅎㅎ 스텔라 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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