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늘 시작이 가장 고통스러워." 버키는 말했다. 캄캄한 불 아래.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의 그림자가 때때로, 마치 버키의 눈꼬리에 멍울진 눈물처럼 보였다. 이순간 세상에서 가장 쓸쓸해보이는 버키 반즈는 둘도 없이 소중한 내 친구이므로, 나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가 외롭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슬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외로울 때 나도 그의 외로움을 느끼고 싶고, 그가 슬플 때 나도 그의 슬픔을 느꼈으면 한다. 그는 일렁이는 불을 향해 두 손바닥을 펼쳐 한파에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이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늘, 시작이, 가장, 고통스러워.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향해 귀를 최대한 기울였다. 버키. 나의 친구. 나에게 좀 더 말해줘.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줘. 내가 좀 더 널 이해할 수 있게 해줘, 그래서 내가 너에게 어떤 것이든 좋으니 액션을 취할 수 있게 해줘.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무겁게 다무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마음이 초조해서 저 창문 바깥의 한파를 향해 달려갈 것만 같았다. 버키,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저 무엇이든 좋으니 나에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널 위로하고 싶고 널 이해하고 싶고, 네가 있는 그곳에 내가 서 있고싶다. 그것이 너에게 있어 어떤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네가 나에게 그렇듯이.

 

 "스티비. 너 안색이 안좋아보인다. 오늘밤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추워. 너는 당장 담요를 한 장 더 덮어야겠어." 그리고 버키는 더 이상 내가 바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넌 너에 대해 더 말하기 보다 나의 겉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럴때의 버키는 나의 친구이지만, 그 전에 결국 나의 형이다. 때론 아버지이고, 또 어머니이기도 했다. 넌 그렇게 때로 자신을 버키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입하여 날 대해야한다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듯보였다. 스티브를 위해서, 난 스티브의 가족이 되어야해. 아버지가, 때론 어머니가, 때론 형이. 나는 대체 어떻게 말해야 네가 이해할지 늘 고민하고 있었다, 넌 네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날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에겐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듯이, 또한 버키 반즈가 있는거라고. 하지만 기어코 난로 앞에서 일어나서는 허둥지둥 이 선반 저 서랍을 뒤지며 새로 씻어서 넣어둔 담요를 기어코 찾아내는 널 바라보며 난 결국 오늘도 내가 가장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고마워. 버키." 그저 언제나 늘 너에게 너무 고마울뿐.

 

 버키는 환하게 웃으며, 그 웃을 때면 언제나 커다랗게 옆으로 긴 둥근 원같이 되는 입술을 하고서 나에게 다가와 담요를 크게 펼쳐 내 무릎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버키와 얼굴을 마주하며 버키가 웃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키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버키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었고 내 뺨을 쓰다듬는 버키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버키. 내 몸을 신경쓰기 전에 너의 몸을 신경써.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그저 버키의 웃는 얼굴과 함께 별 걱정을 다한다, 는 버키의 나를 안심시키려는 말. 나는 버키가 빨리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아까처럼 난로앞에서 양손을 펼치고 불을 쬐기만을 그저 비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같이 한파가 심한 날에는 나는 일을 하러 갈 수가 없고, 나는 그저 집에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의 벽돌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에 감기에나 걸리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버키는 내가 해야 할 몫의 신문을 팔고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전부 끝내고나서도 나의 오늘의 수입을 위해 나 대신 일한 것이다. 아마 버키는 이 한파속에서도 아주 먼 곳, 옆동네의 그 옆동네까지 가서 눈에 젖고 바람에 시달린 신문들을 팔고 돌아왔을 것이다. 돌아와 문을 두드리는 버키의 얼굴이 추위에 시달려 빨갛게 굳어 있었다. 어깨는 온통 젖어 있었고. 손발이 벌겋게 물이 들어있는데에도 한사코 괜찮다며 웃는 버키를 볼때마다, 나는 이제 우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는 늘 무언가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결국 말을 끝내지도 않고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아. 그래서 난 너의 위로조차 될 수가 없다. 내가 대체 네 옆에 왜있는 것일까. 짐덩이마냥 매달려 어째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한심한 몸뚱아리는 또 재채기를 하고, 재채기를 하며 허리를 숙이는 내가 걱정되어 버키는 기껏 돌아간 자리에서 다시 엉덩이를 든다. 아니, 아냐. 그러지 마. 일어서지 마. 괜찮으니까 난로앞에서 불을 더 쬐어, 버키. 제발. 

 

 버키가 날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으려고 입을 달싹이며 내앞에 무릎을 꿇으려하기에, 나는 그냥 먼저  

 두 손을 뻗어 버키의 

 버키의 목을 끌어안았다.

 

 버키가 순간 숨을 멈추는 것 같이 느껴졌다. 버키의 몸이 일순 싸늘해진 것도 같았다. 나는 그저 너를 끌어안고 너를 따뜻하게 덥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를 대신해 더욱 차가워져버린 이 몸을. 버키의 가슴에 이마를 대자 숨죽이고 있던 버키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버키의 몸전체를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난 괜찮아. 버키." "......" 버키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괜히 가슴이 뜨겁고 답답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체 내가 왜 네옆에 있는 것일까. 짐덩이마냥 매달려 어째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내 걱정을 하지 마. 하지 말아줘. 이 멍청이 버키. 내가 네 친구라면, 그래도 네가 날 네 친구라고 생각하고 날 아낀다면, 내가 널 걱정할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 "겨우 미열따위 나에겐 늘상 일어나는 일이잖아. 날 걱정하지 말고, 한파에 시달리고 돌아와 아직도 온통 꽁꽁 얼어있는 너의 몸을 녹이는 것에 집중하지 않겠어? 제발."

 

 "제발, 더 이상 내가 날 미워하게 만들지 말아줘. 버키."
 "......"
 "제발 난로앞에 가 다시 앉아. 몸을 녹이고 나에게 다시 말해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한거야? 버키."

 

 "무슨말이든 좋으니, 나에게 다시 말해줘. 내가 너의 말엔 뭐든 응응하고 뭐든 동조하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가 너의 편에 서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줘." 겨우 할 수 있는 게 말뿐이라도, 그나마라도 하고싶으니. 그렇게 말하는동안, 버키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러다 허공에 떠돌고 있던 버키의 두 손이 내 몸을 꽈악 껴안았다. 나는 버키의 커다란 팔안에 갇힌 채 눈을 꼬옥 감았다. 버키의 품이 너무나 차가워서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다. 이 언몸이 다 나때문이다. 버키가 숨을 내쉴때마다 버키의 숨속에는 한파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나는 버키를 더욱 힘을 주어 안았고, 반동처럼 버키도 나를 더욱 껴안았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꼭 몸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해져왔지만 아프다고 말하고싶지 않았다. 버키는 곧 나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목에 감고있던 나의 팔도 풀어내서, 내 무릎위에 포개어 올려주었다. 그리고 버키는 한동안 자신이 잡고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큰 손안에 다 잠겨있는 나의 작은 손과, 나의 얇은 손목을.

 

 버키는 다시 난로앞에 가 앉았다.
 나에게서 돌아앉았다.
 나에게 더는 버키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불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턱을 괸채로 한동안 등을 둥그렇게 하고 앉아 아무말이 없던 버키의 그림자가, 조금 가늘어지고 조금 길어질 무렵, 버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늘 시작이 가장 고통스러워."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버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스티브. 도망가지 마."
 "...응?"
 "......"

 

 "내 옆에서 떠나지 말아줘." 그리고 버키가 고개를 숙였다. 버키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그 고개위로 두 팔을 포개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이 아까의 버키의 쓸쓸한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왜 버키가 그렇게 쓸쓸한 눈동자를 하는지가 알고싶었다. 무슨 말이 하고싶기에 시작조차 어려워하는지가 알고싶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지 알고싶었다. 내가 도움이 되는지가 알고싶었다.

 

 "좋아해. 스티브."

 

 "아주 오래전부터, 널 좋아했어."

 

 "널 좋아하게 된 그 날이, 나에겐 모든 것의 시작이야. 이 말이, 그 시작조차 어려웠던 모든 이야기야."

 

 그래서

 

 그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너의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의 외로움의 이유를, 너의 쓸쓸함의 이유를 전부 알았음에도, 나는 정작 그토록 알고싶었던 너의 모든 걸 드디어 알게된 이순간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만 것이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넌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거의 어둠속에 갇혀 너는 그대로 어둠속으로 녹아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넌, 내옆을 지키고 싶기에, 그저 구부린 등줄기를 떨 뿐 어딘가로 가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무말도 하지않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너의 그 마음을 거절해버린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넌 이미 너의 모든 것을 날 위해 쓰고있는데 내가 그런 널 가지기까지 하면

 

 난 그렇게 나쁜 놈은 될 수 없어. 이 세상에서 너에게 가장 나쁜놈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건 바로 나야. 나라고 대답할거고 실제로도 그렇고, ...난 그래서 그게 너무 싫어. 그래서 난 때로 내가 싫어지고 말아. 버키 반즈. 그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가족의 대신이 아니라, 그저 버키 반즈이다. 그렇기에 나의 친구, 난 널 결코 나만의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 내옆에 붙들어 놓을 수 없어.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어쩌면 이것도 그저 나의 이기심인걸까. 
 난 이제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대체 무엇이 가장 널 위한 길인 것인지. 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날 외면하고 있고,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바람앞의 등불처럼 아주 가느다랗게 꺼져가는 소리를 낸다. "...내게서 멀리가버리면 안 돼. 스티브." 내게서 멀리가지 말아줘. 버키. 하지만 난 널 내옆에 붙들어 놓을 수는 없어. 나도 이미 꺼져버린 버키의 목소리처럼 조용히, 겨우 이 말만을 내뱉었다. "...응. 버키." 응. 버키. 응.

 

 고요한 밤.

 

 이 밤에, 그리고 우리 두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시작되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 done

월간브루클린 1월호에 투고한 글. 주제는 : 시작.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쓸쓸함과 정적에 대한 버키스팁.... 멸팁은 언제나 찌통이다 ㅠㅠㅠㅠ 아! 넘나 못쓴것.. 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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