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솔저. 또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남자는 자신의 텅 빈 가슴을 바라보았다. 빈 가슴을 브루클린의 차가운 바람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통과하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윈터솔저가 아님에도 또 누군가가 윈터솔저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익숙해,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차가운 바람. 차가운 벽돌. 차가운 바닥. 이 도시는 왜이렇게 차가울까. 원래 이렇게 차가웠을까. 원래란 무엇일까. 나는 이 도시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걸까. 남자는 정처없이 걸었다. 허무한 걸음걸음.
윈터솔저의 갑옷은 전부 벗어버리고 왔는데, 그래도 이 팔만이 여전히 무겁게 들러붙어 남자의 어깨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남자는 허리를 앞으로 숙인 채 왼팔을 감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길을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검은머리칼이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남자를 잠시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곧 시선을 거두었다. 수상한 남자와는 오래 눈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다. 브루클린의 밤길의 유흥을 즐기는 몇남지않은 젊은이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이 브루클린의 밤거리속에 결코 섞이지 못하고 붕 떠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그렇겠지. 시골일수록 더더욱 낯선 사람을 경계할텐데. 남자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이 밤거리 속으로 잘 섞여 들어갈 거라 생각했을까. 조금도 튀지않는 평범한 거리의 조형물 중 하나가 되어 이 밤에 잘 숨어있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었는데. 남자는 브루클린에서 별다른 일을 하고싶었던 게 아니다. 눈에 띄고싶었던 것도 아니다. 남자는 그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역시 아니다. 남자는 윈터솔저라는 이름에 큰 미련이 없었다, 그 이름을 버리는 것은 그 이름으로 불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텅 비어있는 가슴은, 이름없는 남자의 힘없는 눈동자를 뜻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찾아헤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브루클린에 왔다.
별 다른 게 하고싶었던 게 아니었다.
남자는 그저, 어떤 밤이 그리웠다.
브루클린의 한쪽 거리를 퍼레이드가 가득 채우고 있고, 밤하늘을 벚꽃처럼 수놓는 색종이가 팔랑이며 휘날려 마치 꿈만 같았다. 쉬지않고 돌아가는 메리고라운드와, 아주 빨랐던 몇 개의 기구들과, 그리고 색색의 풍선들과. 남자는 그런 것들이 보고싶었다. 붉은색 긴 스커트를 휘날리며 자신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여인의 부드러운 목덜미가 그리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을 무대위에서 공개하며 터지는 폭죽너머로 의기양양한 돈많은 젊은남자의 콧수염이 그리웠다. 귀를 찌르는 것처럼 날카롭고 톡톡 쏘는 퍼레이드 특유의 음악들이 그리웠다. 달콤하고 동그란 작은 팝콘이 그리웠다.
그리고, 남자는 왼손의 어긋나는 것처럼 삐그덕대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며 브루클린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다의 짠냄새와, 봄의 차가움.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 끝에 묻어나는 물방울이 그대로 남자의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자는 그가 그리웠다.
그가 그리웠다. 그 아름다운 퍼레이드의 밤에 그에게 기대었던 그 순간, 그 모든 알갱이같은 시간들이 전부 그리웠다. 팔을 뻗어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던 그순간을 떠올릴때마다 그저 가슴이 저렸다. 남자는 그의 작은 키와 좁은 어깨와,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그리웠다.
그는 반팔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셔츠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팔이 너무 앙상해서 스스로 거울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누군가가 내 마른 팔을 보고 안쓰럽게 쳐다보는 눈길이 싫어. 어느날은 레드와인 반병을 비우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남은 와인잔을 빼앗아들고 그것을 전부 마셔없애버리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다. 그가 술을 마시며 즐거운 듯 뺨을 붉히는 것을 보는 것은 늘 좋았지만, 비어가는 술병을 끌어안고 슬픈 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너무 싫었다. 그의 속눈썹이 젖어들어가는 것을 보다못해 왼손을 뻗어 그의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내면, 그는 언제나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리며 술김에 약한 소리를 한 자신을 부끄러워했었다. 다음날이 되면 언제나처럼, 아니 언제나보다 더 씩씩하게 굴어댔던 건 전날의 일 때문이었다. 남자는 일부러라도 힘차게 어깨를 펴고 일을 하러 달려나가는 그의 작은 뒷모습을 볼때면 늘,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었다. 불쑥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멀어지는 등을 움켜잡고 그저 한없이 품에, 품에, 안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간신히 충동을 참아내면 또 지독히도 외로워졌다. 슬퍼지기도 했다. 네가 돌아오기만을 거리를 떠돌며 그저 기다릴까. 아무것도 하지않고 그저 너만을 기다리는 바보가 되어버릴까. 그런 생각은 또 얼마나 많이 했던가. 남자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혼자 고통스러워했던 그 많은 심상들이 전부 그리웠다. 스스로가 품었던 감정들이 모두가 다 그리웠다.
그것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전부 빼앗겼다.
하지만 누가 빼앗아간거지.
난 누구에게 가야 그것들을 돌려 받을 수 있을까.
남자는 캄캄한 브루클린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와 둘이서 이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떤 말들은 금방 생각이 났고, 어떤 말들은 아무리 애써도 생각나지 않았다. 왼손에는 와인잔, 오른손에는 유행하는 노래가사. 스티브는 당시 유행하는 노래들을 띄엄띄엄 따라불렀다. 버키는, 스티브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나지막히 허밍하였고.
스티브. 넌 왜 노래 하나를 제대로 다 끝내질 못하냐?
스티브가 웃었다.
노래가사가 끝까지 생각이 안난단 말야.
나원참. 다음엔 노래가사가 적힌 카드라도 사줘야지 안 되겠네. 이 형님을 위해서 제대로 한곡정도는 완창할 수 있게 해두라고.
에이. 그러는 넌? 넌 왜 늘 내가 부르는 거 따라부르기만 하냐?
그거야 내가 형이니까.
멍청한 소리 작작하셔.
너야말로 의외로 입 험한 점 좀 고치라고!
됐으니까 이제 그만 네가 불러. 벅. 불러줘. 듣고싶어.
...헐, 어디서 배운거냐? 그렇게 귀엽게 부탁하는 거는.
어, 좀 귀여웠어?
응. 엄청 귀여웠어.
잘됐네. 그럼 노래 불러줘라.
아~~ 당했다~~.
I don’t want to set the world on fire
I just want to start A flame in your heart
I don’t want to set the world on fire
I just want to start A flame in your heart
캄캄한 밤속의 바다는, 거짓말처럼 고요해보였다.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스스로를 버키 반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 스티브
스티브.
네가 눈을 빛내며
나를
버키라고 부르니까.
그가 남자를 버키라고 부르니까, 남자는 하는 수 없이 기억속의 버키 반즈를 떠올렸다.
그가 부르는 버키 반즈로 돌아가고 싶어서.
-
바다의 끝이 환해져, 버키는 새벽이 온 것을 알았다. 새벽은 남색을 타고 왔다. 바다는 진해지고, 하늘은 연해졌다. 버키는 바다위로 깔리는 구름의 그림자를, 어느새 날아다니기 시작하는 갈매기를, 항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찬공기에 버키는 눈이 시렸다. 버키가 촉촉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려는데,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어서, 결국 눈을 닦지 못하고 다시 내려야했다. 왼손은 찬바람에 또다시 삐걱이며 기계임을 냈다. 버키의 눈썹을 타고 도르를 눈물이 떨어졌다.
스티브는 버키의 옆에 나란히 서서, 천천히 그의 뺨을 타고 아무 의미도 없이 반사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주었다. 버키는 아주 조금 고개를 움직여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수척해져 있었다. 버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버키는 그가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키가 자지않고 있었던 것만큼, 그도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며 버키를 쫓아온 것이리라. 버키는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스티브는 환한 금발을 이마위로 쓸어올린 채 바다바람을 맞고 있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버키 반즈 기억속의 그 작은 소년이 더 이상 아니었다. 넓은 어깨, 굵은 팔, 힘줄이 솟은 주먹위엔 영영 사라지지 않을 상처자국이 새겨져 있었고. 버키는 더욱 눈을 가늘게 했다. 이건 가슴이 뛰는 소리일까. 버키가 브루클린의 밤에 녹아들지 못하는 만큼, 스티브도 이제 브루클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도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이곳으로, 나는 왜 왔을까.
"버키."
"......"
아아
그래.
그것때문이다.
네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 이름을 부르니까.
날 그이름으로 부르니까.
그래서 나는 너의 버키 반즈가 되고 싶었다. 너의 버키 반즈로 돌아가고 싶었다. 윈터솔저란 이름을 미련없이 버린 것은, 너에게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너를 더듬으며 찾고 있었던 것은, 다 그때문이었다. 브루클린에 온 것도, 브루클린으로 네가 오길 바란 것도 결국.
버키 반즈는 스티브 로저스에게서 눈을 뗐다. 그리고 다시 끝없이 펼쳐진 바다쪽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새벽햇살에 한없이 반짝여 보석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나는 많은 감정을 잃었다." 버키는 중얼거렸고, 버키의 중얼거림은 브루클린의 밤을 타고 또한 새벽을 타고, 또한 사라진 90년전의 브루클린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스티브 로저스와의 일들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때의 감정들이 잘 생각이 나질 않아."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웃었는지.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너의 등을 배웅했는지. 왜 술에취한 너의 웃음을 보며 심장이 뛰었는지, 왜 눈물짓는 너를 보며 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는지. 그 마음들이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그 마음들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겠다.
"누가 나에게 그것들을 빼앗아간걸까... 스티브."
"......"
"내가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가 널 스티브라고 불러도 될까.
너는 이런 날 계속 버키라고 불러줄건가.
"......"
스티브가 눈물을 떨구는 것을
버키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눈물은 그의 뺨위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버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하지만 스티브는 그저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눈물 흘리고 있었다. 버키를 위해 자신이 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하얗게 빛나는 수척한 얼굴. 지쳤으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얼굴. 더 이상 브루클린에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넌 브루클린의 대지의 차가움도 바다의 부드러움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버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짚은 자신의 손등위에 이마를 대고 그 위로 눈물을 연거푸 떨구었다. "...되찾을 수 있어. 버키." 스티브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꼭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버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티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래, 되찾을 수 있을테지.
네가 곁에 있어준다면.
버키는 삐걱이는 기계음 소리가 나는 왼팔을 움직여, 스티브의 팔을 잡았다. 스티브가 강해져서 다행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기계팔로 아무리 힘껏 움켜잡아도, 스티브 로저스는 이제 부서지거나 하지 않으리라.
- done
월간브루클린 4월호에 제출했던 짧은 글. 메모장에 담아 메일 보냈는데 내가 편집을 실수했는지 글의 띄어쓰기가 ㅋㅋㅋ 중2병의 그것처럼 되어있다 ㅋㅋㅋㅋㅋㅋ
이제와 수정하기도 뭐해서 걍 두기로 함. 헹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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