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BER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갓 오브 썬더는 말했다. "또 만나자, 나의 지구 친구들."이라고. 양쪽으로 스티브와 토니가 있다. 그는 스티브나 토니의 얼굴보다 훨씬 두꺼운 팔의 근육을 들어올리며 그들의 어깨를 묵중하게 두드렸다. 그 호의에서 나오는 행동이 스티브를 기쁘게, 동시에 토니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스티브는 이런 식의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과 오랜시간 함께 있었고, 토니는 40이 넘는 평생 이런 타입과 사귀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둘의 가운데에 토르가 있어서 누구보다 안심하고 있는 것은 사실 토니 스타크였다. 토르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묠니르를 들고있는 팔을 위로 들어올리자 내심 덜컥하는 심장소리를 낸 것도 다름아닌 토니 스타크였고 말이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와 단 둘이 있게 될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텐션으로 그를 대할 지 여태껏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어느때처럼 부드러운 눈동자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스티브 로저스의 포커페이스에 불과하지도 몰랐다. 토니는 스티브의 자신이 볼 수 없는 깊은 이마의 너머로 자신을 향한 수많은 불만이 고여있는 방이 있을 게 분명하다는 추측을 거의 확신처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두려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단 울트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스티브 로저스의 눈동자가 때때로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은 거의 처음으로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쭈욱 이어져 온 미미한 아픔이었으니까.

 그리고 토르는, 토니의 속걱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데미갓답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지개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토니는 자신의 발치에 생긴 고대신의 동그란 자국으로 눈길을 돌린다. 토르가 사라지고 생긴 스티브와의 거리감이 실제의 물리적 거리보다 세 배, 네 배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그렇지만 금방, 어차피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스티브는 자신의 시선끝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할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토니는 스티브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까지 전부 볼 수 있지만, 스티브는 그러지 못할 것이었다. 치사하지만 별 수없지. 40 넘은 아저씨의 삶기술이란 원래 이렇게 치사한 것들 뿐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날 용서해, 캡시클. (언제나처럼 네가 날 받아줘. 제발.) 억지로 그런 생각들을 되풀이하며 간신히 바닥을 드러낸 용기를 끌어모아 고개를 들어보니, 스티브는 물론 방금전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표정으로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니." 스티브는 눈매를 가늘게 구부리며 서글하게 웃었다. 토르를 배웅한 것과 마찬가지로 토니를 배웅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니는 스티브의 그 상냥한 목소리에도 심장이 덜컥거렸다. 스티브의 이 얼굴과 이 미소가, 어쩌면 토르때와는 다른 그저 인사치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는 자신이 왜이렇게도 그의 표정변화를 두려워 해야 하는가 싶었다. 토르가 가버리면 스티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자신이,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자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졌다. 토니는 한숨을 쉬려던 것을 간신히 참으며 웃었다. 언젠가를 떠올리며 오른손이라도 내밀까 했다, 하지만 스티브와의 악수는 이제 견딜 수 없을만큼의 어색함 외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 나는 왜 그가 날 싫어하게 되는 것이 이다지도 싫을까.

 그가 나에게는 그저 겉으로만 웃어줄 뿐, 속으로는 나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마다 숨이 막힌다.

 나는 이렇게도 두려워하고 있어. 사방이 막힌 곳에 혼자 있는 것처럼 떨고있어.

 스티브, 나는 대체 왜이럴까.

 "...? 토니.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나?" 순간 미간에 희미한 주름을 그으며, 스티브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토니는 스티브의 하얀 얼굴에 떠오르는 희미한 동요를 읽었다. 그리고 자신이 스티브가 충분히 의아하게 여길만큼의 시간동안 아무말도 없이 그저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티브의 입가에 주름이 패이며 곡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일자가 되는 순간, 토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키스충동을 느꼈다. 상대가 여자라면 이미 키스하고 난 뒤 '하고싶어서'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아무렇게나 지껄여댔을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선글라스 안쪽에서 눈동자나 데굴데굴 굴리었다. 이쯤되면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다 기만이고, 토니 스타크는 토니 스타크가 왜 이러는지 이미 전부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다. 토니는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한 기분. 토니 스타크는 이미 이것이 어떨 때 오는 느낌인지를 다 알고 있었다.

 "토니..."

 "아, 저기."

 토니는 서둘러 스티브의 말꼬리를 낚아챘다. 선글라스밖으로 나갈만큼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고 최대한 어설퍼보이지 않는 동작으로 손을 움직였다. 스티브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한 번 더 묻거나, 혹은 무슨 일 있느냐고 묻거나 하는 걸 토니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었다.

 "이봐, 영감. 오늘 같이 술 한 잔 하겠어? 뒷풀이 비슷한 것 겸해서, 아니, 둘이서 뒷풀이란 건 좀 이상한가. 하여간 할 말도 이것저것 있거니와."

 "...?"

 "어때?"

 다소 갑작스런 권유였기 때문에 스티브는 또 조금 눈을 깜빡였다. 당황에서 오는 눈 깜빡임은 무척이나 느렸고, 그래서 낙타의 깜빡임을 연상시켰다. 부드러운 갈대같이 뭉쳐져 있는 금색 속눈썹이 그림자를 떨굴 때마다 스티브의 얼굴 표정이 흔들렸다.

 "그게, 저. 지금부터 트레이닝이..."

 "...맞다. 신생 어벤저들과 약속이 있다 했던가. 그럼 있다 밤에 마중차를 보낼 테니까 내 펜트하우스에서 만나는 건?"

 "......"

 "좋은 와인으로 준비할게. 기대해."

 "......"

 스티브의 입술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벌어지다 이내 다시 닫혔다. 그리고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리지." 스티브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는 것에 토니는 큰 안심을 느끼며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스티브는 뭐가 말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이 무엇이든 토니는 별로 듣고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도망치 듯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어 재빨리 어벤저스 본부의 부지를 벗어나면서도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는 스티브만은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문득 토니는 그제야 스티브 로저스가 술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이란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혹시 그 말을 하려고 했어? "젠장." 토니는 혀를 차며 운전대를 내리쳤다. 아, 이 공기의 차가움과, 마음의 서늘함. 아크리액터와 다름없는 위치에서 토니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스티브 로저스. 



 


 그러니까 이건. "이건 완전 사랑이잖아." 그래, 인정하자. 어쩔 수도 없으니까. 토니는 중얼거렸다. 이건 완전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그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이다지도 두려워지고, 그가 싫어하는 내 모습에 진저리가 나고. "내가 그 망할 노친네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다니..." 의외라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이 사랑이 꼭 예견이라도 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토니는 그것이 더욱 싫은 느낌이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가, 어쩌면 날 미워하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했던 그 아버지가 나를 위해 만들어놓은 지도를 찾았을 때의 그 끔찍할 정도로 기뻐서 어쩔수도 없이 비참해진 바로 그 기분이랄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세 번째로 채운 와인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네번째의 잔. 붉은색 액체가 둥그런 와인잔에 가득 채워지며 때로 찰랑였다. 와인병이 금방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너무나도 쉽게 다음 와인병의 코르그를 빼내었고.

 왜냐하면,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로저스가 원하는 사람으로는 될 수 없었다. 40넘게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무슨짓을 해도 바뀔리가 없지않은 가 말이다.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의 어떤 점을 싫어하는지 어떤 점을 평생 이해해주지 않을지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기는커녕 적어도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하려면 그 점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것도 말이다. 스티브는, 이해는 하고 있으리라. 토니 스타크의 이상과 삶을. 토니 스타크의 생각과 현실을.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설득되지 않는 것은, 스티브 로저스의 삶또한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상과 삶이, 그의 생각과 현실이. 토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스티브도 알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토니는 스티브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아니 그전에, 그가 진심으로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조차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지. 하하. 토니는 연거푸 와인을 들이부었다. 스티브를 마중하러 간 차는 -자비스가 몰고있고, 스티브는 텅 비어있는 운전석을 보며 조금 어색해하고 있으리라- 이미 오래전에 스티브를 태우고 펜트하우스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고, 토니는 갖가지의 치즈 플레이팅을 직접 준비하는 동안에도 와인마시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술은 술일 뿐이어서,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토니의 목을 타게 했다. 마시고 또 마셔봤자 마른 목이 축여지지는 않는다는 걸, 그러니까 주먹 쥔 손 안쪽에 고인 땀을 어떻게도 해주지 못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토니는 그냥 그 이해마저도 마비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술기운이 가차없이 차오르고, 토니는 목아래가 뜨거워졌다. 숨을 내쉴때마다 콧구멍 주변이 달아올라 호흡이 격해졌다. 토니는 또 와인을 마시며 생각했다. 스티브가 오면 무슨 대화를 해야할까. 울트론에 대해서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해볼까? 아니, 그래봤자 같은 것의 반복이야. 스티브는 그것만은 이해해주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이 평행하기만 할 뿐인 상황을 스티브는 싫어하지 않을테지만 그것이 계속 되면 역시 질리고 말겠지. 그럼 무슨 얘길 꺼내야 하나. 소코비아의 복구와 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헐크의 행방불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가장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쉬울까? 지구의 모든 구역을 뒤져봤지만, 심지어 맨틀과 내핵까지, 그런 데 그 초록덩치의 위치를 잡아낼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리들의 배너는 대체 어디로 간걸까? 설마 지구에는 없는 거 아냐? 그리고 이쯤에서, 하하하, 하고. 와인잔을 짠하면서 크게 하하하, 하고.

 현관에 부저비슷한 것이 울리고, 토니는 스티브가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문은 토니의 마중을 기다리지도 않고 열릴 것이고, 스티브는 물론 토니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펜트하우스의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미리 말해두었으니까. 토니는 양손에 와인잔 하나씩을 들고-붉은와인은 잔속에 채워진 채 또 찰랑, 찰랑하였고-스티브를 향해 걸었다. 토니는 분명히 똑바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는 크게 휘청이고 있었다. 발걸음이 걸음마다 불안하고 흔들렸다. 와인이 잔속에서 크게 출렁여 바닥에 조금 흐르기까지 할 정도였다. 토니는 자신이 이미 상당히 취했다는 자각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토니, 자네 엄청 취했군."

 "...하."

 토니와 마주친 스티브가 눈썹을 올리며 그렇게 말한 것은 그러니까 토니에게만 의외처럼 여겨졌고, 스티브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뺨과 이마가 붉은 토니는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어려보였다. 술에 취해 눈동자에 어린 물기때문에 더욱 그랬다. "......" 토니는 불만인 것처럼 아랫입술을 내밀며 스티브에게 한쪽 잔을 건넸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잔을 건네받으며 "자네는 더 이상 안마시는 게 좋지않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토니는 시끄러, 라고 말하려던 것을 또 와인한모금과 꿀꺽 삼켜버렸다. 스티브는 선 채로 와인을 마시는 토니를 바라보며 아아, 마셔버린다... 란 생각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캡시클이 날 싫어하니까 이러는 거야."

 "......"

 토니의 뜬금없는 말에, 스티브는 또 눈을 깜빡였다. 그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를.

 이윽고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또 언제나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자넬 싫어하지 않는다만?" 토니는 아랫입술을 내민 채 남은 와인을 전부 마셨다. 꿀꺽, 꿀꺽 하는 소리가 그의 목울대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미워하는 거거나." 스티브는 후후, 하고 웃어버렸다. "안 미워하네." 거짓말. 그건 거짓말이야. 토니는 또 휘청휘청하며 거실로 걸어갔다. 스티브의 말이 순순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토니는 스티브를 사랑해버렸다. 그래버리고 말았다. 토니는 휘청거리며 옆으로 긴 소파를 간신히 지나 코르그를 따놓은 와인 병들 몇 개를 헤쳐 아직 술이 남아있는 병을 겨우 찾아냈다. 스티브는 느린 걸음으로 토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토니가 언제 무릎이 꺾여 쓰러질 지 몰라 불안한 모양이었다.

 토니는 홱하고 몸을 돌려 스티브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런데 스티브의 잔에는 여전히 붉은 와인이 담겨 있었고,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노려보며 무언으로 책망했다. 나 원, 나 방금 왔다고?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스티브는 목넘김이 부드러운 와인이 불처럼도 얼음처럼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희미한 아쉬움을 느꼈다. 와인은, 와인이었고, 그래서 스티브는 눈을 깜빡였다. 와인은 와인이었지만 그것이 가령 물이라해도 스티브에게는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하며 빈 잔을 흔들었다. 토니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스티브의 비어있는 잔을 바로 채워주었다. 와인의 붉은색은 펜트하우스의 조명아래서 반사되는 듯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유리잔과 와인의 경계선은 황금처럼 지글거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제야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여전히 서서 휘청이는 토니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맛있어?"

 토니는 열이 오른 게 분명한 눈동자로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정말이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토니가 이렇게까지 취한 걸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맛있군." 스티브는 토니가 원하는 답을 해주고선 또 조금 와인을 마셔보았다. 이 정도의 거짓말 정도는 괜찮으려나? 이런 걸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겠지? 스티브는 휘청이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다소 휘청였지만 어쨌든 무사히 스티브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의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치즈도 먹어." 토니는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선 눈을 감아버렸다. 술기운이 단숨에 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어지러운 듯 잔뜩 찌푸려진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또 후후, 하고 웃었다. "대체 혼자서 얼마나 마신건가? 사람을 불러놓고서는." 살짝 책망하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스티브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스티브는 무릎앞으로 들고있는 잔속의 와인이 여전히 아름다운 빛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또 잔을 가만히 흔들었다. 이렇게도 부드러워 보이는 물이 또 있을까. "...아, 그립군. 술에 취한다는 감각..." 스티브는 빛으로 흔들리는 와인의 표면장력을 바라보며 자신이 무척이나 취하고 싶어했던 날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버키에게는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혼자 치뤘던 버키의 장례식날과, 페기를 다시 만났던 그 병원에서의 첫 날... 물론 21세기에 눈을 떴던 그 첫 날의 밤도. TV채널이 낯설었던 날과 스마트폰을 처음 쥐었던 날과,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탄환이 발사되는 총을 쥐었던 그 날에도... 스티브는 흔들던 잔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발아래에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머리는 마블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몸을 그대로 허물면, 입처럼 벌어진 바닥의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버리는 것 같은 그 감각. 스티브는 그 그리운 감각을 떠올리려 해보았다. 아무리 더듬어도, 마치 처음부터 스티브 로저스의 몫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떠오르지 않는 그 감각을.

 "...미안해."

 "......"

 토니의 목소리는, 이미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사람의 그것처럼 아주 나지막했다.

 스티브는 눈을 뜨고 다시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취했고, 그는 잠들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잠든 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어지러워 눈을 감고 있는 것일 뿐일까? 스티브는 알 수가 없었지만, 토니에게로 다가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을 그냥 모르는 채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뭐가 말인가?"

 토니, 뭐가 미안하나? 나를 불러놓고 혼자 먼저 술을 마셔버린 것이? 그래서 이렇게 대화도 하지 못할정도로 혼자 취해버린 것이? 아니면 어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그것도 아니면...

 스티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할 것 없네." 스티브는 자신이 지금, 이다지도 슬픈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을 어색해하며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이렇게 슬픈 것일까? 토니라면 설명해줄 것도 같았고, 지금의 스티브를 꼭 이해해줄 것도 같았지만, ...그렇지만 스티브는 토니의 어깨를 잡고 그를 흔들어 다시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하고싶지가 않았다. 토니가 그대로 잠들면 그것으로 좋았고,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일뿐이라면 역시 그것으로 좋았다. "나에게 사과할 건 아무 것도 없어... 토니, 그럴 필요 없어." 스티브는 거의 속삭이는 것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이 지끈거린다. 토니. 이 아픔을 너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너에게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아직은 두렵기 때문일까. 이 아픔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이.

 

 스티브는 잔 속의 와인을 전부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와인은 불도 얼음도 아니었다. 스티브의 긴 한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숨결은 이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스티브는 기도했다. 모두가 평안하기를. 그저 단 한순간이나마, 단 한순간이나마......







- done

 

토니가 넘 빨리 술에 취해버리는 바람에 리퀘내용이랑 조금 벗어나버렸어... 토니바보...☆ < 토니탓함

제목이 너무 안나와서 그냥 겁쟁이 토니 스타크 할 뻔했당ㅋㅋㅋㅋ

여러분 놀랍게도 세포가 리퀘박스에 받은 리퀘들을 잊지않고 있습니다..ㅎㅎㅎ 올해가 가기전에 다 쓰는 건 무리일 거 같지만 그래도 천천히 쓰고 있으니깐 기다려주십숑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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