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darling

(이 글은 중편커미션으로 쓴 사장님토니x사원스티브 au입니다. 히어로요소는 없습니다. 커미션 공개허락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쪽입니까?"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스티브 로저스의 동기로, 스티브와 그는 똑같이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입사한지 이주도 채 안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남자의 위치나 스티브의 위치나 다를 것이 없고 심지어 (스티브가 알기로는 신입들의 콤비를 짤 때 금방 친해질 수 있게 비슷한 연령대사람들을 붙인다고 하였으므로) 둘이 연령마저 가까운 듯한데,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는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눈 그 날 이후로도 계속 쭉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이렇게 존댓말을 쓰는 것일까? 일부러 거리를 만들기도 하고, 일부러 더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것 같고. 하지만 대체 어째서 당신이 이렇게나 예의를 차리는 상대가 다름 아닌 나인 것일까. 다른 동기들한테도 이러면 모를까, 딱히 그러는 것 같지도 않던데. 스티브는 자신의 어깨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있는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런 의문을 품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스티브가 이제 슬슬 말놓지, 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자리에선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넘기고선 결국 계속 존댓말을 지속하는 이 동기의 남자. 진한 색의 곱슬한 머리가 귀 아래에 딱 붙어있는 풍채 좋은 남자가 한 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어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물론 이 거리는 다른 이유때문에 생겨난 거리일 수도 있다. 동기라는 존재를 라이벌로 해석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해석하며 살아간다는 걸, 스티브는 결코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 무턱대고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역시 썩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닌지라.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쪽이냐고 굳이 묻느냐면 말이지만, "별로네요." 별로였다. 스티브는 하여간 그렇게 스티브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동기 남자를 향한 속마음을 최대한 숨기고 그가 꺼낸 화제에 대한 대답을 했다. 어느 쪽이냐고 굳이 묻느냐면 말이지만, 스티브 로저스는 토니 스타크가 별로였다.

 물론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로저스(와 이 데면데면한 스티브 로저스의 동기이자 콤비인 남자)가 이번에 취직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를 말하는 것으로, 즉 그들의 최종보스이다.

 최종보스, 사장님, 이란 뜻은 스티브 로저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리라. 그런 사람을 별로라고 말하는 게 과연 괜찮은걸까? 아무리 상대가 말을 먼저 꺼낸 화제라고 할지언정? 스티브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 그게 내 진심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턱을 쓱쓱 문지르고 말았다. 왜냐면 어차피 스티브 로저스는 상대가 누구든 속마음을 숨기고 거짓말로 대강 말을 꾸며대는 그런 행동은 하질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말을 좀 순화할 순 있겠지. 뜬금없이 이주 전에 뽑아놓은 까마득한 신입한테 '너 별로임'이란 소리를 들은 사장님 생각도 좀 해보라고.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며 동기를 다시 바라보았다. 동기는 어딘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스티브가 이해하기로 그 표정은 놀라움, 경악, 헐 큰일났다... 하는 모먼트에 좀 더 가까웠다. 너까짓게 감히 사장님을 별로라고 말하다니, 참 나 어이가 없네 아무리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하는 뭐 그런류의 표정을 지을거라 예상했기에 스티브로써는 좀 예상밖의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너무 막말을 했나? "아니, 별로랄까... 음. 그냥 불편한 분이랄까요? 이해가 안 된달 지, 나와는 안맞는 분이겠다... 싶달 지."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토니 스타크가 별로다.'라는 명제를 어떻게든 조금쯤은 순화시키려 했지만, 스티브가 말을 하면 할수록 모든 말들은 결국 '역시 별로다'로 귀결되었다. 차라리 말을 그만하는 게 낫겠어. 스티브는 그제야 어설프게나마 입을 다물었다. 기분탓인가, 동기와의 거리가 아까보다 더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주 내내 같이 회사 일을 배우며 적응해나가면서도 결국 말을 놓지 않아, 스티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게 된 상대다. 이제와 또 새로운 한 뼘의 거리가 더 생겼다고 해서 뭐 새삼 불편한 일이 더 생기려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스티브도 역시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람과 다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대놓고 거리를 느껴본적은 거의 없었던 스티브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짧은 대화가 있었던 휴식시간 후 일을 하는 내내 동기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기 때문에 더 눈치를 살피게 되었고 말이다. 그는 어쩌면 토니 사장님의 팬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입사한 사원치고 그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 없을 테지만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스티브에게도 토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스타크 산업, 최첨단 시설, 모든 분야의 인프라망, 압도적인 정보량과 인터넷의 장악, 전기와 건축, 공업과 조선. 어린나이에 스타크왕국을 이어받아 지금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앉아있는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건 당연히 영광으로 여길만한 일이고, 자신의 명함에 새겨진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로고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스티브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이력서를 넣는 것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조금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그 모든 것과, 개인으로써의 토니 스타크, 인간 토니 스타크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스티브에게는 말이다.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이상하게 얽히기 시작한 토니 스타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볼수록 스티브는 점점 더 토니 스타크란 사람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애초에 말단인 자기가 회사의 사장님과 얽힌다는 것 자체에도 따라가기가 버거웠고, ...그 뒤에 벌어졌던 수많은 토니 스타크의 기행에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스티브가 있었다. 무려 그 스티브가 '별로임'으로 퉁쳐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것치고 (물론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도) 나이가 많은 두 사람은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묘하게 특별 취급을 받았는데, 그 특별취급 중 하나가 원래 2인 1조로 콤비를 짜 한 명의 직속선배에게 일을 배우는 시스템이 두사람에게만은 적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스티브는 자기와 남자 동기에게 각각 한 명의 선배가 붙어 맨투맨으로 일을 가르쳐주는 것에 조금 당황하였다. 스티브를 가르치던 선배가 "우연히 인원이 남아서 그런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라고 말했지만 역시 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끔씩 데스크너머로 동기를 바라보면 동기는 마치 자기가 선배인 양 선배의 등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또 다른 특별취급도 있었는데, 여기가 중요했다, 그것이 바로 토니 스타크의 시중이었다. 스티브는 토니 스타크의 '시중'이란 단어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정말로 식겁을 하고야 말았다. 시중이라니, 토니 스타크와 저 토니 스타크의 비서라는 사람도 시중이란 단어가 정확히 뭘 뜻하는지 알고는 있는건가? 지금 나보고 회사에 출근하면 저 사장님 '옆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심부름이나 하라는' (feat.네이버 사전) 거냐고? 물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시중이란 단어만큼 과격한 일을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사장님 토니 스타크에게 점심을 가져다주라는 것이 시중의 전부였던 것이다. 물론 사장님이 점심시간에 회사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만 말이다. 스티브는 회사에서 일을 배우는 와중에도 틈틈히 짬을 내서 사장님의 갖은 시중을 들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에 일단 안심했고, 점심값은 사장님이 회사에 있든 없든 무조건 한 달분으로 정산해서 준다는 것에 두 번째로 안심을 했다. 이과계와는 정반대의 전공과 적성을 가지고 있는 스티브가 이러한 산업계 회사에 취직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에는 '돈'이 컸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회사에 다니는 이주 남짓동안, 스티브는 거의 매일 사장실이 있는 빌딩의 꼭대기층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거의 매일 토니 스타크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근데 말이야,

 사장님 토니 스타크는 너무 바빠서 점심을 제대로 못 챙겨 먹는다더니?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기 위해 몇 명이나 있는 비서들도 제대로 회사에 있을 수 없을 때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비교적 한가한 신입사원한테 점심 심부름을 시키게 된 거라더니? 토니 사장님도 회사에 있는 날이 거의 없고 중요인사들과의 점심약속이 있는 날도 많으니 그렇게 매일같이 점심을 준비할 필요는 없을 거라더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도록 하고, 하여간 그렇게 이주가 지난 오늘, 정신없이 회사일을 해치우고, 잠시 가지게 된 휴식시간에 동기가 슬쩍 건네는 "스티브씨는 우리 보스를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토니요, 토니 스타크. 사장님. 벌써 이래저래 이주가까이 얼굴을 보는 건데, 많이 친해졌죠? 미남 두 사람이니 정말 투샷이 그림같겠어요. 그래서, 정말 어때요 사이? 응? 툭 까놓고 말해서 좋다 싫다, 어느쪽입니까?" 란 질문에 스티브는 "별로인데요."라고 대답하고야 만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아침동안이었고, 어느덧 열두시가 지나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물론 오늘도 어김없이 토니에게 점심을 건네러 사장실에를 향해야 한다. 스티브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기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어딘가로 정신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는지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지를 않았는데, 여전히 표정이 착잡해보였다.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도시락과 토니분의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두 개의 도시락을 들어 흔들면서 다른 손으로는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도 역시나, 토니 스타크의 제1비서에게서 온 문자가 반짝거리며 새로 도착한 자신의 존재를 스티브에게 마음껏 어필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문자가 어떤 내용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 것 같았지만 어쨌든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자의 문자를 확인하니 점점 더 어제의 내용을 복사/붙여넣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듯 했다. '오늘도 사장실로 도시락을 들고 가주세요. 스티브. 토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와 거의 다를바가 없는 문자거든. 스티브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러니 동기들과 친해질 틈이 있을 리가 없지..." 일부러 거리를 만드는 사람과도 다른 어린 동기들과도 제대로 점심 한 끼 같이 해본적이 없으니. 스티브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눈을 내리깔며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그러한 스티브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의 최상층으로 가는 동안, 아까 못했던 말을 마저 하기로 하겠다. 조금 길어지게 되겠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그렇게 동경하던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취직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써의 토니 스타크는 '별로임'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이다.

 비서에게 전해들은 바대로, 스티브는 점심 시간에 제일 먼저 일어나 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복리후생쪽에서도 물론 뛰어났고 사내식당은 전 사원을 상대로 무료로 주어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일단 자신의 사원증으로 밥을 제공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철식판에 음식을 받아 사장실까지 운반하는데에는 무리가 있다 싶어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뚜껑이 달린 반찬통에 일일이 음식을 받은 후 쟁반에 그것들을 담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장실로 바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는 다행히 붐비지 않았고 스티브는 스프가 식지 않은 것에 안심하며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그리고 물론, 토니 스타크는 사장실 안에 있었다. 스티브가 점심을 가져다주는 첫날부터였다.

 스티브가 생각하기에, 이 날은  토니 스타크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만남은 스티브의 입사날. 그가 단상에 서서 CEO로써의 연설을 하는 모습을 단상아래 신입사원들을 위해 준비 된 의자에 앉아 경청한 것도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여간 그래서 오늘이 토니를 만난 두 번째가 될 것이었다. 처음 단상에서 연설을 하던 그를 봤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만, 토니 스타크는 정말 토니 스타크였다. 스티브가 그간 무수히 많은 매체를 통해 접했던 바로 그 토니 스타크 말이다. 토니는 어느 뉴스, 어느 기자회견, 어느 잡지, 어느 TED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쑥했다. 스티브는 잘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그럼에도 그 브랜드에 결코 눌리지 않은 강한 파워의, 정말이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미남 말이다. 장식이 적은 모던풍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고도 멋있어보이는 각도로 다리를 꼬은 채 책상에 두 팔을 올리고 있던 토니 스타크는 안경너머로 진한 브라운 눈동자를 빛내며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 왔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소지으며 '여, 왔어?'라고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다! 스티브는 방금 '들어와'라고 말한 것이 정말 토니 스타크 본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오싹함을 느꼈다. 팔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 물론 이 소름은 긍정적인 의미로 스티브에게 활력을 불어주었다. 토니 스타크는 멋있었고, 이 멋있는 사람을 사장으로 모시고 있다니, 왠지 감격이다. 기대했던만큼의 사람이다. 역시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취직하길 잘했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점심을 가져다주는 시중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을 것 같아.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닫았다. 한 손으로 들고있던 쟁반이 흔들리지 않도로 손과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하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장님. 점심을 들고 왔습니다."

 "그래그래. 어서 가져와. 이리, 이리로."

 사장실이 넓어서 처음에는 토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한걸음한걸음 다가가니 선글라스 너머로 토니 스타크의 표정을 비교적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토니는 묘하게 기대하고 있는 듯 한 얼굴이었다. 아랫입술이 설렘으로 실룩이는 것을 보며, 스티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점심이 기다려졌나?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다. 일 하는 남자는 많이 먹어야지. 스티브는 토니의 책상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둘러보다 제일 물건이 적은 한쪽에다가 쟁반을 내려 놓았다. 토니는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움직여 스티브가 쟁반을 내려놓은 위치로 의자의 바퀴가 구르게 했다. 스티브는 의자에 일어나지 않고 움직이는 토니를 바라보며 또 희미하게 웃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다 드시고 그대로 두면 제가 나중에 올라와서 그릇들을 가지고 돌아갈 테니까요."

 반찬의 뚜껑을 열려고 하며 스티브가 그렇게 말하자, 스티브가 가지고 온 음식들을 묘하게 기대에 찬 눈으로 둘러보던 토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 그리고는 쟁반을 내려놓고 뚜껑을 다 연 것에 만족하며 돌아가려는 듯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 스티브를 향해 손을 뻗고서는, 스티브의 손목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왜 가?!" "네...?" 왜 가냐고? 손목이 잡힌 스티브가 의아하여 눈을 깜빡였다.

 "왜... 가냐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점심을 배달만 해주면 할 일은 끝나는 것 아니냐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자, 어느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토니가 도리어 스티브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설마 당신, 내 몫만 들고 왔어?"

 "...네, 그런데요."

 "...뭐라구? 하이고, 나 원 참."

 "당연한 걸 뭘 묻기까지 하느냐는 표정이네. 대체 어디서 전달이 잘못 된 건지. 이봐요, 스티브씨. ...스티브. 비서에게 이건 나, 토니 스타크의 점심 시중이란 소리 제대로 들었지?" 어,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설마 회사 사원들 이름을 다 알고 있진 못할 텐데? 토니 스타크가 금세기에 둘 없다는 수준의 천재일지언정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소속된 사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들의 이름을 다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아, 명찰인가? 스티브는 목에 걸어놓은 끈 끝에 달아놓은 회사 신분증에 박아놓은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사진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네. 그러니까 사장님이 점심시간 때 회사에 있는 날에만 점심을 가져다주면 되는 거라고..." "그래. 제대로 잘 전달받았네. 그런데 스티브,"

 "스티브, 어째서 그 점심시중에 '토니 스타크와 같이 점심을 먹는다'가 포함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 거야?"

 "어..."

 "나 참. 어이없네. 점심 시중이라고 정말 밥만 좀 갖다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 보기보다 융통성이 없네. 됐으니까 빨리 저기 의자 가져와서 책상 맞은편에 앉아. 빨리."

 "옆에 나란히 앉아도 뭐라 안 할 거지만, 그 성격에 그렇게는 절대 안 할거 같고." 스티브를 재촉하는 의미로 손을 마구 흔들며 그렇게 말하고, 토니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은 지 얼이 빠져 있는 스티브를 내버려둔 채 재빨리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모자라는 건 버거로 떼우자고. 일단 이거 나눠먹고 있다가." 그리고 토니는 그릇의 뚜껑 위에다가 음식들을 나누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프 같은 건 나누지 못했지만, 통감자에 버터를 바른 것은 스푼으로 반을 쪼개어 그릇 뚜껑에 올리고,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와 양파를 같이 볶은 것도 접시를 들어 반 정도 쓸어내려 뚜껑에다 담고. 각종야채와 함께 볶은 도리아도 마찬가지로 둘로 나누고. 그 작업을 하는 토니는 의외로 퍽 신이 나 보였는데, 아마 평소에 그런 것들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일인분의 음식을 둘이서 나누어 먹는다니, 그래, 토니 스타크가 어디 가서 그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말이다.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며-아무리 그래도 사장앞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건 보기가 좋지 못하다- 토니가 말한 대로 사장실 한 쪽의 투명 테이블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고 토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토니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채로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스티브는 자기 앞에 놓여진 뚜껑 위에 올려져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어설피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사장님,"

 "토니. 스티브, 토니."

 "그..." 대체 입사하고 이틀, 삼일 정도밖에 안 된 사람한테 대뜸 최종보스를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 어떡해! 나보고 어쩌라고! 으아아아 아침동안 직속선배한테 배웠던 엑셀작업법마저 전부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 그러나 스티브는 이마위로 솟아나는 신경까지 억지로 참아내며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 토니." 비록 목소리는 떨릴망정 사장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토니는 여전히 기뻐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식은 아직 따끈해, 솟아오르는 김에 토니의 눈주름이 뿌옇게 흩어졌다.

 "응. 토니. 왜?"

 "...그럼 이제 점심을 가져다 드릴 때마다 같이 점심을 먹는거라고 봐야합니까?"

 "그렇지. 같은 실수를 두 번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 스티브."

 "......"

 "아스파라거스 맛있네. 어서 먹어, 스푼으론 좀 힘들겠지만. 내가 포크를 이미 쥐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하하. 든든하게 먹고 오후에도 힘내야지."

 "그, 토니."

 "응?"

 "그게 저기. 오늘은 일단 제가 점심을 들고 왔습니다만, 실은 한 팀이 된 동기가 있는데요, 나중에는 또 그 사람이..."

 사실 스티브는 그 동기에게 미리 한 말이 있었다. 둘 중 한사람만 사장실에 왔다갔다 하는 걸로 말이다. 둘 다 끼니때를 동시에 놓치는 것보다 한 번에 한 번씩만 놓치는 게 하여간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은 내가 할 테니 그 다음 일주일은 당신이 하라고, 스티브는 동기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고보니 동기는 그때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게, 일단 어쨌든 오늘은 당신이 가지고 올라갈래요? 스티브." 라고 말했었는데, 그건 어째서였을까? 하여간 스티브는 오늘 방금 자신이 겪었던 당황스러움을 동기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토니 스타크의 말은, 그야말로 단호했다.

 "아니. 그건 됐어."

 "...네?"

 "그 녀석은 됐다고. 앞으로도 쭉 네가 가져다줘."

 "오늘처럼 네가 직접 말이야. 이건 네 일이야. 나와 같이 점심 먹는 거. 오직 너만의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데, 스티브는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매체에서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을 짓고 있는 토니가 어색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토니 스타크가 저런 식으로 웃는 사람이었던가? 저런 눈동자를 하는 사람이었던가? 눈 아래의 움푹 패인 주름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웃을 때바다 더욱 패이는 것이 너무 예쁘다. 어째서 나를 상대로 저런 표정을 짓는것인지... "...하아, 네에..." 그리고 스티브는 어설프게나마 그렇게 말을 하고야 만 것이다. 토니 스타크와의 점심. 사장님과 단 둘이서 점심을 말이지,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라니 말이지...

 그렇게 충격과 공포인 점심(?)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설마 사장님과 단 둘이 점심식사라니, 이 많고 많은 사원 중에 그런 경험을 한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겠지? 대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도 안 난다 하하... 치즈버거는 맛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스티브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이 '시중 임무'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스티브는 설마 이 점심이 매일같이 이어지는 일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스티브는 토니 스타크는 바쁜 사람이고, 회사에 붙어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을 텐데, 그런 사람과 한갓 평사원, 그것도 이제 마악 입사한 신입사원의 점심식사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일 리가 없다고 안심하였다. 그리고 그 안심은, 일주일 정도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스티브는 토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주말은 출근하지 않으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러니까 5일 내내다.

 스티브는 사장님이 5일 내내 회사에 있는 게 이상하다기 보다는,(사실 토니 스타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 자체에도 경악을 할 것이다, 그가 회사에 꼬박꼬박 출근을 한다고? 진짜로?! 라면서.) 그 사장의 점심을 자신이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면 점심 약속도 거의 6개월 정도 밀려있고 막 그런 거 아니냐고, 다름 아닌 토니 스타크인데 말이야? 라고 의아해하면서도, 어쨌든 스티브는 매일 제1비서의 문자를 확인하고 꼬박꼬박 점심을 들고 사장실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2인분을 챙겨들고서.

 그러기를 일주일, 그리고 또 다음 월요일 날, 토니는 여전히 스티브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다가 스푼을 흔들며 무려 이런 말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 일주일 넘게 사내식당 음식이네. 뭐 우리 식당 음식 엄청 맛있긴 하지만. 매일같이 메뉴도 바뀌고 말이야."

 "네. 미슐랭 출신 요리사들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 토니가 신경을 써준 덕분이겠죠." 토니가 가볍게 노려본 덕분에 사장님이란 말을 목구멍으로 꿀떡 삼키면서, 스티브도 대화에 참가했다.

 "그래, 난 사원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훌륭한 CEO니까 말야. 역시 난 된 놈이야."

 "......(진짜 된 놈이면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라고 스티브는 생각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였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근데 슬슬 좀 물리네. 같은 요리사껄 계속 먹으려니."

 "...? 메뉴가 매일 다른데도 질리십니까? 사용하는 재료나 조리법 같은 것도 다 달라지는데."

 "그래도 같은 요리사가 한 거잖아. 슬슬 다른 요리사가 만든 게 먹고 싶어."

 "...하아." 그래, 그런 건가. 토니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어차피 부자인 적이 없었던 스티브 로저스로썬 이해할 수 없는 감각체계일게 분명해서, 스티브는 그냥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며 토니를 바라보려니, 토니는 여전히 스푼을 휘두르며 그런 말들을 계속 이어서 하고 있었다. 응, 맛있지만 역시 물리네. 역시 슬슬 다른 사람의 요리를 먹어야 할 때인가. 스티브는 여전히 토니 스타크쯤 되는 사람이 왜 중요한 점심약속같은 것 하나 없이 계속 나와 점심을 먹고있는걸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 채라 바로 토니의 의도를 캐치해내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토니는 스티브를 향해 뭔가를 바라는 듯 한 표정을 짓다가 스티브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이내 킥킥대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웃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짧은 앞머리를 귀옆으로 쓸어 올렸다. 아, 결국 머리카락을 만져버렸네. 그치만 습관이란 게 어쩔 수가 없는 거니까. 사락거리는 얇은 모발을 단정하게 쓸어 올린 채의, 그 부드러운 금발을 때때로 쓸어올리는 것이 스티브가 당황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 그럼 내일은 회사밖에서 점심을 사오도록 할까요? 가까운 가게에 소문난 맛집 몇 군데를 알아보는 건 금방 될테니..." 그리고 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릇위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건 됐어."

 "그러면...?"

 "당신이 만들어."

 "......"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그리고 또다시 굳어버리게 된 스티브를 바라보며, 토니는 또 그 의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부턴 도시락 싸와. 스티브. 네 거랑, 내 몫까지. 재료값 제대로 줄테니까, 알았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대체 왜 그런 표정을 보이는 상대가 다름 아닌 나, 스티브 로저스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바로 그 미소 말이다. "하하. 진짜 기대된다. 눈 감고 뜨면 내일이었으면." 그리고 토니는 자기 멋대로 그런 말을 한 후 신나게 남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여전히 벙찐 채, 거의 콧노래까지 부르며 음식을 먹고있는 토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뭐, 이정도만 되도 스티브가 토니 스타크를 향해 '별로임'이라는 혹독한 평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은 그 뒤에 터졌다.

 사실 도시락을 만드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스티브 로저스는 오랫동안 취사를 해왔고 자신 있는 요리의 가짓수를 열 개 이상 꼽을 수도 있을만큼 요리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토니는 그 사실을 알고 도시락을 싸오라고 말한 것일까? 아니면 못하면 못하는 대로 맛없는 도시락을 즐길 생각이었던 걸까? 뭐든지 즐거운 것, 재밌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스티브는 그것이 살짝 궁금했지만 의문을 풀 방법은 없지 싶어 금방 생각을 포기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도시락을 위해 조금 앞당겨야 했지만 평소에 워낙 단련하는 사람인지라 스티브는 별다른 피곤함을 느끼지도 않았더랬다. 스티브는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고 무난한 가짓수들로 도시락을 채웠다. 샐러드의 싱싱함을 위해 채소만은 평소보다 조금 비싼 것을 샀지만, 그 외의 콘소메수프라던가 하는 건 기본적으로 맛의 기본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레토르트 가루를 이용하였다. (물론 토마토라던가 바질이라던 가를 더 넣어 스티브 로저스의 오리지널 맛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스티브는 보온 도시락 두 개를 역시 한 손에 집어들고 사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사장실로 올라가라는 비서의 어김없이 빈틈없는 연락은 이미 확인한 상태.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후끈거리는 열기를 품고있는 도시락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왜 나 이렇게 매일같이, 사장님과 같이 밥을 먹고 있는 걸까? 사장님, ...그러니까 토니와. 스티브는 피식하는 소리를 냈다.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고, 정말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하고. 오늘부터는 아예 직접 도시락을 싸오기까지 해야하네. 대체 그 사람은 나와 무엇이 하고 싶은 거지?

 나와 뭐가 되고 싶은 걸까.

 "......"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것을 언뜻 놓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티브는 생각에 골몰하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문이 반쯤 닫힐 쯔음에야 겨우 퍼뜩 놀라 손을 뻗어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다. 스티브는 자동문이 닫히려다 다시 열리는 것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장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오늘은 물어볼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했다. 토니, 나에게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요? 사장님, 나와 무엇이 하고싶은 거죠?

 그리고 그가 문 앞에 서서 똑똑하고 노크를 하는데, 그러나 노크 후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 '어, 들어와.'하는 대답이 들리지가 않았다. "...?" 스티브는 잠시 의아해했지만 곧 사장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란 걸 깨닫자 얼굴이 환해졌다. "!!" 드디어 이 날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역시, 그렇지. 그 바쁜 토니 스타크가 일주일 넘게 나와만 점심을 했으니 말이야, 그 이상은 대체 가능할 리가 없지 말이야. 스티브는 왠지 맥이 탁 풀린 듯 아니 어쩌면 뭔가가 시원하게 풀린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사장실 문을 여전히 두드려댔다. 처음 두드렸을 때 대답이 없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역시나 스티브가 아무리 두드려도 사장실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도저히 뺄 수 없는 급한 일. 갑자기 잡힌 점심 약속. 회사차원에서 중요한, 어쩌면 토니 스타크 개인에게라도. 스티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티브는 드디어 토니가 아닌 다른 사람과 점심을 먹을 수 있어, 란 사실로 기뻐하고 있는 것도, 토니 스타크의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방적인 점심 시중(?) 약속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그냥, 드디어 자신이 알고 있던 토니 스타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스티브가 토니에 대해 알고있는 부분이라곤 아주 일부분, 어쩌면 그 사람을 형성하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그저 조각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스티브가 보고 싶었던 토니 스타크는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도 스티브는 토니가 바쁜 사람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기뻤다.

 점심시간조차도 허투루 쓸 수 없을 만큼 바쁜사람. 대통령 스케줄보다 더 세분한 시간대로 쪼개져 할 일이 분단위로 잔뜩 넣어져 있는. 얼마나 바쁘면,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조차도 가끔은 시간을 내 들렀던 고아원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더랬다, 후원금은 선대보다도 훨씬 많아져갈 뿐이지만. "...후후." 스티브는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바지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그리고 제1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연락보고는 정확히 해야 할 것이었기에.

 "여보세요."

 "아, 스티브 로저스입니다, 비서님. 지금 사장실 앞에 와 있습니다만."

 "네. 수고하시네요."

 "그게 토, 사장님이 자리에 안 계셔서요. 아마 급한 용무라도 생긴 듯합니다."

 그러니 전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을 마저 이으려는데, 그러나 스티브는 제1비서가 중간에 끼어드는 통에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였다. "아, 잠깐만요."

 "그대로 대기하세요, 랄까,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 있으시겠어요? 미스터 로저스."

 "? 네? 하지만 사장님도 안 계신데 어떻게."

 "사장님은 이제 3분 뒤면 도착하세요, 아니 정확히는 2분 44초 뒤에. 이대로 내려가 봤자 금세 다시 불려올테니 그냥 들어가 있으신 게 나을거예요. 도시락은 싸오셨어요?"

 아, 모르는 게 없구나. 과연 제1비서 미즈 페퍼 포츠. "...네."

 "그럼 역시 들어가 있는 게 좋겠어요. 토니 어제부터 그 도시락 엄청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하아."

 "흘려듣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미스터 로저스. 정말 엄청 기대하고 있거든요. 엄청."

 "......"

 뭐라 대답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전화기 너머로 아름다운 여성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운 점심 되세요. 아, 이제 2분 11초 남았어요."

 "...비서님도요." 대체 누가 뭘 기대하고 있다는 걸까. 그가 대체 어째서 내가 만든 도시락 같은 걸. 그리고 비서와의 연결은 끊어졌고,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화면을 멍하니 보는 동안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10초를 흘려버리고 말았는데, 10초가 지난 바로 그순간 스티브는 사장실 문 바깥쪽으로 엄청난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고야 말았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돌풍 같은 게 불어닥치는 소리인데? 스티브는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동자 그대로 사장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그 돌풍과도 같은 소리가, 정말로 돌풍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엄청난 속도로 돌면서 만들어내는 바로 그 바람소리였다.

 "?! 우왓, 이게 뭐야 바람?!"

 사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스티브는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엄청난 풍력에 손을 들고 얼굴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 공격을 해오는 듯 한 풍력에 눈이 절로 감기며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단추를 잠근 양복자켓의 끝이 마구 펄럭여 단추의 실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아 몸을 옆으로 틀면서, 스티브는 손등 사이로 간신히 눈을 떠 헬리콥터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헬리콥터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꼭대기 층에 프로펠러가 거의 닿을만치로 가깝게 떠 있었고, 전체유리로 되어있던 사장실 한쪽 벽의 커다란 창문들이 활짝 열려있어 거기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왔다. 스티브는 자신의 옷깃처럼 힘없이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사장실의 서류들 틈사이로 간신히 간신히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스티브의 손에 들려있던 도시락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옷의 천이 바람에 팽팽해져 찢기듯 하는 소리, 그리고 헬리콥터의 엔진소리와 프로펠러 소리와, 그리고 "여~." 그리고 '여'하는 소리?! 그제야 스티브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헬리콥터의 아래로 길게 이어진 줄사다리에 능숙하게 매달려 있는 토니 스타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토니는 대범하게 한손으로 줄사다리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스티브를 향해 흔들어대고 있었다. 두 다리로 줄사다리의 어느 부분을 정확하게 눌러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티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토, 토니?!" 그렇게 소리치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결국 바람에 긴 속눈썹이 휘날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으면서도, 스티브는 여전히 경악에 휩싸여 "토니?! 토니!?" 하고 그의 이름을 정신없이 반복했다. 엑 저거 헬리콥터?! 저 사람 지금 헬리콥터 타고 사장실로 바로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엑 저거 출타하고 돌아오는 길인거야, 아니면 지금 출근하는 길인거야? 어느쪽이 더 타당(?)한 거지?! 스티브는 너무 혼란한 나머지 그런 아무래도 좋은 것들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스티브의 몸 주변으로 하얀 에이포용지들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아, 젠장. 사장실이 엉망이 됐네. 뭐 어쩔 수 없는 거긴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니는 익숙하게 줄사다리에서 창문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프로펠러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을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해 망정이지 아마 스티브가 토니가 방금 줄사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봤다면 정말 경악을 뛰어넘어 어이를 상실한 나머지 토니가 자신의 사장이건 뭐건 간에 그의 멱살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댔을 것이다. 그런 위험한 짓을 하면 어떡해 여기가 몇층인지 알기는 아는 거냐 애도 아니고오오오- 하면서 말이다. (너무 분노한 나머지 경어마저 상실.) 물론 토니도 자신의 운동신경과 반사능력, 체력등등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하는 짓이었지 보통이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이고, 무엇보다 저 스티브 로저스에겐 그런 걸 설명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리고 토니는 사다리에 훌쩍 뛰어내리고 나서 발아래에 버석이는 서류를 옆으로 피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셔츠깃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삐뚤어진 넥타이도 정리했다. 그러는 도중에, 스티브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토니가 뛰어내리자마자 헬리콥터가 점점 멀어져갔기에 사장실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도 약해졌고, 더불어 스티브를 압박하는 것도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완전히 헝클어진 앞머리를 한 채로 멍하니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고개를 들어 스티브를 바라보다가, 곧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남. 앞머리가 그렇게 엉망이 되었는데도 아름다움이 사그라지질 않네, 당신은. 아니, 오히려 적당히 흐트러져서 오히려 더 좋단 생각마저 들잖아." "...!"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엉망이 된 것을 깨달은 스티브는 서둘러 양손으로 머리칼을 정리했다. 사실 지금 스티브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빨갰고 입술은 조금 촉촉해져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려 피부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마위로 짧은 앞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사실 토니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건 스티브의 그 얼굴일 터였는데, 그래도 토니는 굳이 스티브의 빨개진 목덜미같은 것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고 그냥 허둥지둥 앞머리를 정리하는 스티브를 감상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마저 다듬기나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잖아. 너의 그 모습을 좀 더 즐기고 싶으니까. 좀 더 독점하고 싶으니까.

 "...대체 왜 헬기를 타신 겁니까? 그것도 그렇게 위험한 형태로,"

 아 역시 잔소리는 하는 거야? (그런 얼굴로 아무리 험악한 척 미간을 찌푸려봤자 오히려 더 귀엽게만 느껴지는데.) 토니는 한쪽 눈썹을 곧게 만들며 턱을 문질렀다. 수염이 바람에 다소 흐트러져 평소보다 더 꺼끌거렸다. "그거야,"

 "점심시간에 늦으면 안 되잖아."

 "......"

 "네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찬스를 내가 놓칠 것 같아?"

 근데 정말 뉴욕의 도로망은 엉망이야, 정말 안 되겠어. 오후 열한시 이후만 되면 대체 도로가 뚫려야 말이지, 이거야 원 도로인지 주차장인건지. 그래서 늦기 전에 헬기 타고 온 거야. 빠른 포기와 과감한 진로 선택이 바로 토니 스타크의 성공비결이거든. 토니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차이는 서류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스티브는 도시락을 들고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그런 토니를 가만히 눈으로 좇기 시작하였다. "뭐야, 회사재산 사적으로 쓰는 것 같아 거슬리는 거야? 넌 왠지 그런 걸 거슬려 할 것도 같네. 성실하다니깐."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말도 안했달까 아무 생각도 안했달까, ...당신을 도저히 내 머리로 내 이해력으로 따라가기가 무리인 것 같은데. "안심하라고. 저건 내 전용 헬기니까. 전용 비행기도 있고, 회사소속건 페퍼가 확실히 회사업무로 사용중이니까 걱정 마. 아, 혹시 타고 싶어지면 말해. 언제든 옆자릴 내줄테니까." "하하." 스티브는 입술을 조금도 웃지않고 웃는 소릴 냈다. 아니, 타고 싶어질 리가. 절대 없어. 그런 일 절대 없어. 스티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토니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런 일들이 있고, 이주가 흐른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토니 스타크와 이주 내내 이어지는 점심을 보내야 했다. 사내에는 특별취급을 받는 스티브 로저스에 대한 뜬구름 잡는 형식의 소문들이 잔뜩 퍼져 있었고 정작 그 소문은 스티브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가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중간에서 차단하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아직 그 누군가가 누군지 그리고 그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런 스티브에게도 회사에 제때 도착하기 위해 전용헬기를 타고 와 꼭대기층 창문으로 뛰어내린 사장님 토니 스타크에 대한 소문만은 도착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이 목표한 바는 꼭 해내는 우리 멋진 사장님!'이란 평이 대체적이었다. 그런데 그 목표한 바란 게 대체 뭔데? 그것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지만, 오로지 스티브의 도시락을 겟하기 위해서라는 진실을 아는 자는 없었다. 스티브는 그 소문을 듣고 있는 와중에도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 날 얼이 빠져 그 줄사다리에 매달려 있다가 어떻게 사장실에 서있었을 수 있었는지 그걸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렸지. 멍청이! 왜 그걸 궁금해하지도 않았을까?! 당연히 창문을 향해 뛰어내린 것 밖에 더 있었겠어? 그렇게 위험한 짓을, 대체 왜. "점심시간에 늦으면 안 되잖아." 정말 고작 점심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나와 함께 하는 점심 시간에 늦지않기 위해서 그 곡예를 벌였단 말이야? 그게 정말 그럴 일인가? 그런 곡예의 가치가 정말 있는 일이야? "네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찬스를 내가 놓칠 것 같아?" ...정말 이 도시락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스티브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토니 스타크가 점점 미궁처럼, 영국의 미로정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미궁 속을 헤매는 혼란은 스티브로 하여금 '별로임'이란 단어를 만들어 내게 했다. 그 말을 들은 동기의 얼굴 표정까지 착잡하게 만드는, 물론 그 말을 내뱉은 스스로도 금방 후회하게 된, 정말 별로인 바로 그 말을.

 


 스티브 로저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로 올라가는 동안 설명하겠다고 한 말이, 제법 길어졌다.

 이미 길거라고 미리 말해둬서 빚은 덜었지만.

 그리고 스티브는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자동문이 끝까지 열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복도로 걸어 나갔다. 사장실까지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스티브의 걸음으로 단 네 걸음. 그동안 도시락도 아주 조금 서로 부딪혀 달그락 이는 소리를 낼 것이었다. 오늘은 뜨거운 음식이 하나도 없어 도시락은 다소 차가웠다. 역시 조금 비싼 야채와 토마토, 덩어리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 그리고 베이컨 계란 양파 등으로 적당히 속을 채운 식빵 샌드위치와, 차갑게 식힌 감자샐러드와...

 스티브는 똑똑, 하고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오늘도 어김없이 토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스티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뺨 위로 길고 진한 눈썹그림자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눈치도 채지 못한 채로, 스티브는 그저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손등위로 근육이 파르르 흔들릴 만큼 긴장이 올라오는 이유를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왔어?"

 "......"

 스티브는 언제 나처럼 문을 소리 없이 닫고나서 깊이 목례를 했다. 토니는, 웬일로 책상의 앞에 서 있었다. 원래라면 의자에 앉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오늘도 싸왔네. 도시락." "...네." 책상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토니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오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스티브가 평소처럼 선뜻 다가가지도 못할만큼 말이다. 토니는 어느때보다도 진한 색 렌즈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인가 눈동자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미간사이에 잔뜩 주름이 가 있어 뭔가 불만에 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토니는 짧게 혀를 차며 책상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스티브는 허리를 곧게 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가 마치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니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지만, 팔짱을 낀 채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고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의 무표정한 얼굴은 도저히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 "......" 뭐가 저렇게 저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한걸까. 스티브는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최대한 조심히 꾸며낸 후 토니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늘 그랬던 책상 한쪽에 두 개의 도시락을 올려두었다. 토니는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을 움직여 자기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스티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렌즈는, 가까이서 봐도 역시 무척 깊었다. 토니의 눈이 보이지 않으니 덜컥 가슴이 떨려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장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느꼈던 긴장은, 낮에 자신이 내뱉은 한마디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비슷한 거겠지. 그럼 지금 이 가슴 떨림은 대체 뭘까. 토니, 왜 날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가슴이 뛰고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어서 무슨 말이든 해주면 좋겠는데.

 자신의 시선에 스티브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 지, 토니는 나지막이 쳇하고 혀를 차면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팔짱을 낀 손을 풀어 자신의 다리가운데에 뻗고선,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까지 보내었다. 토니는 손가락들을 조금씩 움직이며 꼼지락댔고,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는 토니의 옆에서 스티브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도시락을 풀까, 언제나처럼 뚜껑을 열고 플레이팅을. 하지만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손톱위에 손가락을 튕기고 있는 토니가 신경쓰여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굽히며 토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

 "뭐야, 할 말 있어?"

 목소리마저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스티브의 미간에 연한 주름 하나가 그어졌다.

 "그, ...사장님이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는 거 아니구요?"

 "왜 또 갑자기 사장님이래. 토니라고 그냥 부르면 됐지."

 "...그게 지금 나한테 뭔가 화가 나 있는 거 같아서."

 아니 나한테 화가 났다기 보다는, 뭔가 마음에 안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비슷한 말 같지만 하여튼. 스티브의 말에 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잘 아네. 그런 거엔 또 왜 그렇게 눈치가 빠른 걸까. 근데 그런 거에 일일이 호칭 바꿀 필요 없어. 처음부터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거 나잖아."

 "......"

 "됐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

 "...네."

 "......"

 그 평소처럼, 이란 게 스티브에게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게 지금의 심정인데, 당신은 그걸 정말 모르고 있는 가 보네. 스티브는 썬글라스를 천천히 벗는 토니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토니는 여전히 어딘가 심통이 난 낯빛으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말이 나온김에 묻겠는데, 왜?"

 또 다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 스티브도 토니를 마주보았다.

 "네?"

 "왜 내가 별로야?"

 "...!"

 순간 스티브는 말문을 잃은 채 입술을 뻐끔거렸다. 눈이 확장되어 푸른색 위로 까만빛이 퍼져나갔다.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바라보며 더욱 미간의 주름을 잡았다. 아, 이제 이해했다. 저 심통이 난 표정. 저 화가 난 표정. 저 나를 향해 날을 세운 듯 한 날카로운 눈초리...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 말을 알고 있어? 어떻게 그 대화를... 설마... 스티브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뜨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손등 위로 여전히 푸른 신경 줄이 파르르 솟아나 있었다, 또한 손가락 틈 사이로 땀이 배여나왔으며-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동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딘가로 급하게 문자를 주는 듯한 모습. 토니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할 때의 그 움찔거리던 아랫입술과, 스티브의 대답을 듣고 착잡해진 낯빛과, ...그리고 어딘가로 급하게 문자를 주는 듯 한 모습...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였다. 짧은 금발 사이로 밀어넣은 손가락에 열이 받은 두피의 따땃함이 닿았다. 스티브는 혀뿌리에 힘을 주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미스터 해피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해피 호건과, 그 나와 연령대도 비슷하고 콤비까지 짰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데면데면하고 멀찍이 서선 늘 존댓말을 하는 그 동기 남자와. 토니는 씁쓸한 입매를 감추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꿈틀거리는 눈썹부분을 천천히 매만졌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스티브."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겁니까? 설마 매수 같은 걸 한 건 아니시겠죠?"

 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 직원을 왜 매수를 하겠어.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시키면 그만인데." "......" 그 말대로다.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토니는 또 짧은 한숨과 함께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듯하게 펴서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말이야, 애초부터 내 편이야."

 "내가 심은 스파이라구, 뭐 굳이 네식대로 말하자면 말이야."

 "...?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스파이를 왜 심을 필요가... 아, 설마 이번 신입사원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부러..."

 "푸하하. 그거 괜찮은 발상이네. 내년도 신입들한테 부터 써먹을까."

 "......"

 그럼 대체 뭔데. 스티브로써는 도저히 다른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럼 미스터 해피는 원래부터 이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라는 건가? 아니면 그냥 토니 스타크의 지인인건가? 대체 그한테 누굴 스파잉하게 한 건데? 스티브는 처음 페퍼 포츠에게서 시중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단어탈트붕괴에 허덕이며 혼란스러워했다. 정말이지 당최, 이렇게도 일일이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조금도 이해가 안 간다. 토니 스타크. 대체 그는 나에게 뭘 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왜 내가 별로냐고?"

 "...!"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겁니까? 스티브는 순간 화가 확 뻗쳐 얼굴피부가 다 화끈거렸다. "...이래서요." 어떻게든 화를 꾹 참으며 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토니는 역시나 분명한 발음으로 내뱉는 스티브의 말에 그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으로. "이래서? 라고?"

 "네! 이래서요."

 "......"

 토니는 성큼 크게 한걸음 내딛어 스티브에게 한층 더 다가갔다. 스티브는 토니가 가까워진 만큼 토니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뒷걸음질을 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꽈악 쥐었다. 토니는 스티브보다 한뼘 정도는 작았지만 그런 차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기세로 스티브를 압박했고, 스티브는 어쨌든 지금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사장님의 면전에다 대고 사실 전 당신이 별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지금 이렇잖아요,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 토니는 일부러 목소리의 성량을 하나 더 올리고서는 그렇게 말했다. 눈동자가 화가 나서이기 때문일까, 한층 더 진해져 있었다.

 "이래서? 이렇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스티브, 당장 제대로 설명해봐."

 "......"

 "내가 이래서 별로라니, 이런 게 대체 어떤 거냐고."

 "......" 이런 젠장. 여기까지 왔으면 각오하는 수밖에 없나. 해고를 면하지 못한다해도, 속에 품은 말은 다 해버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겠어. 토니는 정말이지 저 단호한 표정으로, 스티브에게 조금의 도망칠 길도 남겨주지 않을 모양이니 말이다. 스티브는 이것이 사장실로 올라오는 마지막이 될지언정 아니 회사에 오는 것자체가 마지막이 될지언정, 절대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더욱 주먹을 꽈악 쥐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도시락은 전부 차갑게 하길 정말 잘했어, 문득 이런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일일이 영문을 모르겠는 점 말입니다! 대체 왜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점점 혼란스럽고, 나만 정신이 없잖아요. 그런 점이 별로라고요."

 "?! 하? 내가 언제 그랬어? 난 스티브 당신한테 누구한테보다 투명하고 클린하게 내 속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또 그 생각대로 해왔고. 대체 내가 무슨 영문을 모르겠는 일을 했는데? 내가 언제 당신을 영문을 모르겠게 만들었어?"

 "지금요! 어제도, 아니 가장 처음부터도요!"

 "?! 뭐어?"

 한 번 말을 하니 멈출 수가 없다. 스티브는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썩 남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을 거란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마 이 사람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지. 제발, 스티브 로저스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상태로만은 빠지지 말아줘.

 "대체 왜 나한테 점심 시중 같은 걸 들게 만든 겁니까? 어째서 매번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은 거예요? 아니, 당신과 점심을 먹게 만든 건가...? 하여튼. 어떻게 당신같은 사람하고 매일매일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구요. 그렇게나 단 둘뿐인, 매일매일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당신이랑,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점심시간들! 그리고 대체 갑자기 도시락은 왜 싸게 했어요? 내가 만든 요리는 왜 드시고 싶었던 건데요.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 내 도시락 하나에 뭘 그렇게 두근두근 하는 표정을 짓고 그랬어요."

 "아니, 그건. 아니 당신 그 의미를 정말 하나도 몰랐단 말이야? 여태껏?"

 "지금도 토니가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헬기는 왜 탄 겁니까? 고속도로가 밀리면 그냥 밀리는대로 천천히 들어오시면 되는 거잖아요, 토니 스타크보고 지각하면 안된다고 대체 누가 그렇게 말 할 수 있는데요? 미즈 페퍼라면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점심 때문이라면, 그거야 말로 적당히 딴데서 다른 누군가와 아니면 혼자라도 그냥 맛있는 점심 사드시면 되잖아요, 그걸 뭘 헬기까지 타가며, 줄사다리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해가며,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그렇게 애썼던 거냐고요. 대체 왜 그랬는데요, 하나도 이해가 안된 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그 일들이 정말로 하나도 이해가 안 간다고? 사람이 성실하고 둔감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나..."

 "애초에 당신이 일일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들을 하니까 문제인거예요! 해피, 미스터 해피는 대체 뭡니까? 무슨 스파이인데요, 뭘 위한 스파이인데요? 그 사람이 왜 자기와 나 사이에 있었던 말을 당신에게 옮겨요? 별로라니, 당신이 왜 별로냐고 물으셨습니까? 이러니까 별로죠! 다른 이유가 뭐가 있어요?"

 "...하, 나 참." 단숨에 긴 말을 끝내고 숨을 몰아쉬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토니는 문득 어이가 없단 듯이 이마를 감싸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토니는 이마에 새겨진 주름을 손가락으로 문질거리며 고개를 들어 스티브를 다시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숨을 조금 몰아쉬면서도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말을 내뱉어도 될까 걱정이 반,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한 것이 반인 모양이었다. 숨을 몰아쉬느라 목 언저리가 조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방금 내뱉은 긴 말은, 그러니까 전부 스티브의 진심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스티브가 토니가 왜 그런 일들을 벌였는지 정말로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토니 스타크는 진짜로 퍽 영문을 알 수 없는 별로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토니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토니는 문득 자신이 생각해낸 일을 듣고있던 두사람의 반응이 떠올랐다. 해피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반강제의 부탁을 했을 때에도, 페퍼에게도 협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에도, 둘은 한결같이 같은 반응을 보였더랬다. 그런 빙 돌아가는 번거로운 짓 하지말고 그냥 평소처럼 직구를 날리는 게 더 낫겠다고. 이건 빙 돌아가는 짓이다 못해 상대에 따라 스토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토니는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 말들이 정말로 맞는 거 같다. 이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어. 역시 처음부터 당신들 말을 들었어야 했어. 하지만 이제와 너무 늦었지.

 "스티브... 그건 말이야."

 "......"

 "그건 그냥 다 당신 관심을 좀 끌어보려고 한 거야."

 "...? 네...?"

 뭐야, 그 표정. 그 목소리. 설마 지금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거야...? 토니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얼굴 피부가 화끈거리고 있는 거였다. (젠장, 이 나이 먹어서 먼저 고백해본 적이 없는 것도 문제구만!)

 "당신한테 관심이 있다는 어필이었다고. 매일 같이 점심 먹으려고 시간 낸 것도, 그렇게 해서 매일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던 거야. 해피한테 널 좀 지켜보고 있으라 한 것도, 당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가까운데서 파악해서 만약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면 바로바로 해결해줄려고 그랬던 거고... 뭐... 사실 당신 기분이나 상태를 파악하는 거며 나를 향한 당신의 감정이 좀 달라지는지 어떤지 그런 걸 더 확인할 목적이긴 했지만..."

 "...? 그..."

 "뭐야, 여전히 이해가 안 가? 정말이야? 정말 그래? 어떻게 그래?"

 "어,"

 "정말 말도 안 된다. 내가 이렇게나 얘기했는데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거면, 당신은 성실하고 둔감한 게 아니라 둔감함이 지나치게 성실한 거네."

 이쯤 되면 도리어 토니가 스티브를 책망하는 수준이다. 스티브는 눈을 깜빡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당황이 심한 나머지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의 감각이 남을 정도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관심? 그러니까, 나의 관심을 끌려고 그런 것들을 했다고? 시중이니 매일같은 만남이니, ...그런 것들이 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나를 상대로 그런 관심을? 스티브는 갑자기 등을 타고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흔들었다. 어째서 지금 이 순간, 토니가 간간히 보여주었던 그런 표정들이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스티브를 바라볼 때의, 그 신나하는 표정 같은 것들, 그 부드러운 눈매같은 것들, 그 환한 미소같은 것들이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왜 그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죄어오는 지...

 "그," 스티브는 턱에 단단히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 관심이란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무슨 의미인 거야? "그러니까 당신... 은 애초에 나한테 뭘 하고 싶었던 겁니까?"

 "......"

 애초에 뭘 하고 싶었냐구?

 어,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당신한테 하고 싶은 건... 그게 뭐냐면... 그리고 스티브의 질문에, 갑작스레 토니도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뭘 하고 싶었냐면. 스티브. 애초에, 가장 처음에, 뭘 하고 싶었느냐면. 그리고 토니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가장 선택해선 안 되는 길쪽을 향해 마구 내달리고 말았다. 그게 뭐냐면, 바로 양 손을 들어 스티브의 양 젖가슴을 덥썩, 잡아버리고 만 것이다.

 "이게! 하고 싶었는데..."

 "......"

 커다랗고 탄력 있는, 잘 단련된 근육으로 감싸여있는 부드러운 가슴. 재킷과 셔츠속에 감춰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 위로 드러나는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그 모양과 탄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 그리고 스티브는 자신의 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덥석 집어버린 토니 스타크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토니도 문득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며,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마치 끝도 없이 이어져갈 듯 고요하고도 길었으며, 그렇게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듯 하였으나...

 그러나 물론 현실 시간은 고작 10초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의 뺨 위로 빠직 마크가 불룩 튀어나온 것과 그의 오른주먹이 토니 스타크의 머리를 내려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에, 토니 스타크의 "악,"하는 지하에서 끌어올린 것 같이 내지르는 비명과, 그의 두개골 위에 열기와 함께 화악 퍼져나가는 엄청난 고통도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 그 우열을 가리기가 퍽 힘들었다...

 


 "...그래, 꿈에 그리던 그 감촉이 그렇게나 좋던가요? 아직도 오른손을 뻔하니 보고 있을만큼?"

 "...시끄러 조용해 입다물어..."

 해피 호건은 물론 입을 닫았다. 하지만 닫은 입술사이로 긴 한숨소리가 새어나가는 것만은 해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해피 호건이 스티브 로저스에게 늘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구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이미 다들 눈치 챘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토니 스타크의 지시로 신입사원인 척 하며 스티브 로저스의 옆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라고까지 말하면 해피의 멘탈에 너무 금이 가니까 조금 순화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해피의 그러한 죄책감이 어쩔 수 없이 스티브와의 거리를 가지게 만들었다. 말을 놓지 못한 것도 그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해 늘 조금 뒤에서 걸었던 것도 다 그런 탓이었다. 해피는 정말이지 스티브가 스토커라고 자신을 신고해도 별 수 없으리라고 매일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마저 말을 해보자면, 사실 해피 호건의 스티브 로저스를 향한 스토킹은 제법 그 역사가 길었다. 스티브가 대학을 다니던 때 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땐 토니도 아직 대학생이어야 할 나잇대였지만 진작 월반을 한 채였고, 그 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새사장을 맡기도 해야했던 지라 하여간 이래저래 엄청 바쁜 시기였었다. 처음에는 직접 스티브의 대학생활을 멀찍이서 구경하러 나가던 토니였지만 점점 일이 바빠져서 그때부터 그의 경호실장을 맡고 있던 해피에게 스티브를 지켜보고 있으란 소릴 해댔고, 그게 지금까지 이런 형태로 이어진 것이다. 해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때 단호하게 그런 짓을 할바에야 차라리 스티브 앞에 떳떳이 나서서 무슨 사이가 됐든 좋으니까 하여간 안면을 트고 오라고 윽박질렀어야 했는데. 설마 그때의 감정을 지금까지 질질 끌어온 것도 모자라 이제와 사람의 마음을 끌어볼거라고 쓰는 방식들이 고작 이런거라니 말이다. 물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른 해피도 잘못은 컸지만, 하여간 그런 것들을 지시한 토니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해피는 스티브가 말한 것들을 토니에게 알리고 나서도 계속 스티브를 향한 미안함과 찝찝함, 토니를 향한 약간의 연민에 신경이 쓰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나타난 스티브는 인상을 확 구기고 있었고, 자기자리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거칠게 들고 사무실을 단숨에 뛰쳐나갔다. 해피가 소리쳐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아니 오히려 일부러 해피를 무시하려는 듯이 보여서, 해피는 드디어 토니가 뭔 일을 쳤구나 싶기까지 했다. 덩달아 나에 대해서도 다 알아버린 모양이지. 저렇게 좋은 사람한테 미움 받는 건 역시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사장실로 들어온 해피는, 무척이나 고풍스럽게도 얼음을 잔뜩 담은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토니를 보게 되었고, 토니가 퉁퉁부운 얼굴로 떠듬떠듬 이야기 하는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정말로 한숨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해피는 시원한 얼음으로 머리 위를 식히고 있는 토니의 침울한 얼굴을, 그리고 손도 대지 않고 책상 위에 방치 된 도시락 두 개를 번갈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 토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랫입술이 비죽 튀어나와, 설마 지가 스티브한테 삐친 건 아니겠지? 하고 해피도 순간 욱했지만, 토니의 불퉁한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삐쳤다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벽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하나 허우적대는 그런 표정이었다. 썩은 동아줄 하나도 내려오지 않아 아무것도 잡을 게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 그렇게나 후회를 할거면 애초에 왜 그랬느냐고... 해피는 또 아까와 마찬가지인 생각을 불쑥 입밖으로 내뱉을 뻔 했다. 하지만 자기가 더 보태지 않아도 토니가 이미 충분히 가여워서, 해피는 그냥 하려던 말을 꿀떡 목안으로 삼켰다. "...스티브, 이젠 아예 출근을 안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말은 해야지. 그동안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시달린데다, 방금전에는 심지어 성추행 레벨의 일을 당했다. 아무리 스티브라도 사표를 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 이건 사표라기보다는 고소가 더 어울리기는 한데.

 토니는 해피의 말이 마치 송곳이라도 되는 양 무언가에 찔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도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해피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거기에 앉았다. 아, 여기에 미즈 페퍼가 있었다면. 이런 문제는 아무래도 나보다 그 쪽이 더 현명한 해결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텐데. 그리고 토니가 불쌍하든 말든 그에게 날카로운 잔소리도 해줄 수 있고 말이야. 해피는 크게 어깨를 으쓱하며 팔짱을 꼈다.

 "물론 스티브는 돈 때문에 우리 회사에 입사하기로 한 사람이니 그렇게 쉽게 사표를 결심하진 않을 테지만요. 큰 맘 먹고 남고 싶었던 대학에 자퇴서까지 낸 사람이에요. 우리 회사만큼 대우 좋은 곳을 바로 찾기도 어려울 거구요."

 "......"

 "사실 전 처음에 스티브가 취직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설마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지원을 할 거라곤 생각 안했어요. 좋은 대학의 석사과정 경력에, 사람이 보기에도 멋지고 그 속은 더욱 멋지고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이쪽분야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공이잖아요."

 "미대출신의 예술가타입 사람이, 이공계열의 회사라니. 물론 돈은 이쪽이 확실하게 벌 수 있지만. 당신이 사장권한으로 취직시켜준거지, 다른 회사였으면 서류과정에서 떨어졌을 거에요 그 사람."

 "...그 얘긴 절대 스티브에게 들키면 안 돼..."

 "아, 네. 그렇죠."

 그렇지, 그런 얘기까지 들키면 진짜 스티브 로저스 안의 토니 스타크는 쪼그라들데로 쪼그라들걸... 해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였다. 해피는 한쪽 눈썹을 찌푸린 그대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스티브에게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 사실 해피는 놀라지 않았다. 성실한 스티브라면 이런 메시지 하나정도는 보낼 거라고 생각했었다. 스티브가 점심시간 때 회사를 나가버려 돌아오지 않자, 해피는 물론 스티브 로저스가 반차를 쓴 걸로 잘 뒷수습을 해주었고, 스티브에게 그렇게 했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까지 넣어주었다. 그렇게 메시지를 넣어두면 스티브가 답장을 안할리가 없다는 해피의 계산속이 결국 통한 것이다. "토니. 스티브한테서 메시집니다." "...!" 해피의 말에 토니가 급하게 고개를 들어 해피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빨리 고개를 움직였는지 머리위에 올려놓은 얼음이 주륵 미끄러지기까지 하였다. 해피는 피식하고 웃으며 폰의 화면을 토니에게로 돌렸다.

 "내일 하루 쉴테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네요. 물론 우리 회사는 신입에게도 급작스런 반차, 갑작스런 월차까지 전부 다 허용해주는 좋은 회사지요."

 "......"

 "내가 적당히 답을 보내놓을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해피는 다시 화면을 자기 쪽으로 돌려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폰으로 글자를 쓰다가 힐끗힐끗 눈을 치켜들어 토니를 바라보는 것도 물론 잊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토니는 어쩔 겁니까?"

 "......"

 "이제 정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영영 놓치게 될 걸요."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토니는 그렇게 말하며 흘러내린 얼음을 다시 머리위로 올렸다. 차가운 얼음에 머릿속이 거의 얼얼해질 만큼 식었다. 토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스티브의 그, 엄청난 주먹이라니. 토니는 사실 뺨정도를 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엄청 안이했지... 그 주먹은, 과연 평소에도 조깅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보람이 있겠군 싶은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이때까지 스티브가 토니에게 건넨 감정 중 가장 그럴싸한 것이었다. 도시락이, 물론 있었지만, 그건 알고보니 토니가 일방적으로 스티브에게 강요한 것이지 스티브가 토니에게 준 그의 마음의 일부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제 다 알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머리가 욱신대는 고통에 대해선, 내가 감사해야 하는 걸거야. 스티브. 난 여전히 너에게 별로인 녀석이겠지만 그래도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주먹을 날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니, 그건 너무 나 좋은대로 해석하는 건가? 그럴지도. 그렇지만 토니는 여전히, 스티브가 자신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다른데도 아닌 나의 회사에 가장 먼저 지원한 이유는, 물론 너의 그 교회 너의 그 고아원과의 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너의 안에는 있다고, 그러니까 스티브 로저스 안에 토니 스타크가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토니는 정말이지 그렇게라도 희망의 끈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그나마 여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끈이었으므로 더더욱 말이다.

 


 스티브는 아침부터 교회에 나와 단상앞에 무릎을 꿇고 고요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교회에는 나무가 많았고 짧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고아원 건물도 나왔다. 같은 부지에 세워져있는 고아원은, 이 교회를 세운 첫번째 목사가 옛날 이 땅에 귀족이 있을 때 영주의 지원을 받아 세운 제법 오래 된 고아원으로, 교회와 고아원은 몇 번의 증축을 거듭해 고아원은 비교적 세련된 현대식 건물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교회는 아직도 오래 된 고성의 분위기가 배여 나왔다. 스티브도 물론 이, 고아원 출신이었다. 대학교 입학을 계기로 고아원을 졸업했지만 스티브는 쭈욱 보답해야한다는 마음을 안고 있었으며, 물론 지원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아끼지 않고 지속하고 있었다. 물론 이 교회와 고아원은 스타크 인더스트리, 토니 스타크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스티브가 보태는 작은 돈은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자신을 키워 준 교회에도 고아원에도 꼭 보탬이 되고 싶었고, 그 일을 게을리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후원은 하워드 스타크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교회와 고아원을 아우르는 큰 부지의 명의가 토니 스타크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스티브가 토니 스타크를 동경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에 기부를 아끼지 않던 하워드는 종종 이곳에도 와서 아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안기기도 하고, 건물 증축공사에 돈을 대주기도 했다. 하워드 스타크 생전에 스티브도 그를 몇 번 만난적이 있었고, 그와 악수를 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였다. 그 뒤, 하워드가 죽고 나서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세대교체의 격동을 헤쳐나가는 동안, 교회와 고아원에도 큰 바람이 불었더랬다. 회사내부에서의 일을 수습하는데에도 바빠 아무도 그들의 기부금 재단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스티브와 같은 고아원 출신 어른들이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모아봤지만, 그럼에도 부지가 다른데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티브는 목사님에게 교회를 허물지 고아원을 허물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리고 그뒤 바로 목사가 기꺼이 교회를 허물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고나서,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그때만큼 자신이 작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토니 스타크가 왔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딱 한 번으로, 그 뒤로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부지를 통째로 자기가 사들인 것, 그럼에도 부동산에 관련된 서류를 아무 조건 없이 목사에게 넘겨준 것, 하지만 앞으로 혹시 생길지 모를 자질구레 한 일과 세금 등을 위해 명의는 여전히 자신의 것을 해두겠다는 설명을 쉬지 않고 하는 것을 목사와 함께 듣고 있었다. 소파에 앉지도 않고 창문 가까이에 서서, 토니 스타크를 꼭 구세주로 여기고 있는 목사의 뒤통수와 그저 담담하게 목사의 감격어린 감사의 인사를 듣고있는 토니를 번갈아가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스티브에게도, 토니 스타크는 구세주였다.

 목사와의 짧은 악수를 끝으로, 바쁘니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그리고 스티브는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토니의 뒤를 배웅하면서, 그와 잠깐 시선이 마주치긴 했지만, 끝끝내 말 한마디를 섞지 못했다. 스티브는 그냥 일방적으로 그의 등을 향해 감사합니다, 정도는 소리치면 좋았을 걸하며 가벼운 후회를 했었다. 혹시나 그가 하워드처럼 한 번씩 선물을 들고 교회를 찾아오지 않을까 그럼 그때는 꼭 인사를 하리라 뭐 그런 기대를 하기도 했었지만, 토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스티브가 마음만 먹으면 토니 스타크를 매일같이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각종 매체에서, 각종 언론에서, 각종 TED에서. 그리고 그런 것들을 훑어보면서 스티브는, 당연한 순차이지만 토니의 팬이 된 것이다.

 구세주였고, 은인이었고, 스타였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재정은 안정되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드는 목돈을 미리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스티브는 자기가 그곳을 지원한다고 정말 그 회사에 붙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면접에라도 갈 수 있어서, 회사 내부에 한 번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무척 바빠 보이는 토니 스타크를 우연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면접장소에 사장이 나타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으로라도 그를 볼 수 있는 확률 따윈 제로에 가깝겠지만, 그냥 꿈을 꾸는 것정도는 괜찮지 않은 가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 회사에 정말 합격을 할 줄이야. 그리고 설마, 이주만에 그만두게 될줄이야.

 

 평생 살았던 것보다 요 몇주간이 너무 파란만장에서 스티브는 머리가 다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후." 스티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양손을 포개고 있는 자신의 손이 멋쩍어서, 스티브는 재빨리 기도하는 손을 풀었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시늉일 뿐. 손만 포개고 있으면 다 기도인 것이 아니다. 스티브는 그저 눈을 감고 손을 포개고 있었을 뿐 머릿속으로는 계속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고 있었다. 골몰하면 할수록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바로 그 사람을 말이다.

 그러니 기도가 될 턱이 있나. 기도의 구절은 한소절도 읊조리지 못했는데. 목사님에게 죄송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말에 기꺼이 강당을 비워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스티브는 무릎을 꿇고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교회 내부는 고요한 공기로 묘하게 서늘했다. 촛불들은 저절로 가느다랗게 떨렸다. 스티브는 꼬리를 흔드는 촛불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긴 예배용 의자사이를 걸어 나왔다. 천장이 높은 교회에 스티브의 발걸음이 저벅저벅 울리다, 한 손으로 그가 교회의 문을 여는 소리로 금세 가득 차올랐다.

 목사는 고아원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입구의 커다랗고 평평한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새가 짹짹거리고 매미가 맴맴 거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스티브는 모래길을 소리를 내어 걸으며 목사에게 다가갔다. 목사는 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스티브에게 손을 흔들었다. "스팁. 기도는 다 끝냈니?" 스티브는 고개를 흔들며 목사의 곁에 앉았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지도 못했어요. 신이 화낼 것 같아요." 목사는 푸훗하고 웃었다. "야, 신이 그렇게 한가하냐? 너의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기도마저 일일이 들어주고 있게?" 목사의 기분좋은 웃음에 이끌리 듯 스티브도 훗하고 웃음을 흘렸다. "것도 그러네요." 그렇지, 정말이지 그렇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신에게도 차마 못하겠는 말이니, 내가 들어주는 걸로는 역시 부족할까?"

 "......"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말하기가 어려워서. 목사의 상냥한 얼굴을 보면서도 스티브는 왠지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뭐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토니 스타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할까? 그래서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교회 앞에 이름이 적혀진 쪽지와 함께 버려진 스티브를 거두워준 목사님이다, 목사님이 스티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스티브도 이 분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자기가 토니에게 겪은 일을 설명한다면 그가 대체 어떻게 반응할 지, 스티브는 그림을 그리 듯 훤히 예상할 수 있었다. "뭐? 가슴을 만져? 신고해. 안할 거야? 왜? 신고해. 내가 해주지. 지금 할게." 어쩌면 당장 그를 찾아가 그의 면전에다 대고 집문서 땅문서(?)를 냅다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스티브는 자신의 상상이 오싹한 나머지 슬쩍 어깨를 떨었다.

 "......"

 사실, 사실, 진짜 사실을 말하자면

 그깟 가슴따위, 사실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실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 자체에 화가 났다기 보다는,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뜬금없는 행동을 했는지에 더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왜 그 타이밍에 하필 가슴이냐고? 내가 대체 나한테 뭐가 하고 싶었는지를 물었는데, 거기다 대고 가슴을 만지면서 이게 하고 싶었다니, 대체 그게 뭐냐고... 성희롱? 성희롱이 하고 싶었던 거야? 그럼 강제로 점심 시중을 들게 한 것도 도시락을 싸게 한 것도 다 성희롱에 일종이었다는 뜻밖에는 더되나? 그런 생각에 스티브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밀려왔고 그 화가 그 어마무시한 주먹을 부르게 한 것이다.

 "......"

 스티브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 주먹을 달리 쥘 때마다 한없이 꿈틒대고 있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악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주먹을 있는 힘껏 내려쳤으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토니의 머리는 볼록 튀어올라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병원에 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표 운운하기도 전에 해고통지가 이미 나와 있을수도 있겠고.

 "? 왜 그러니?"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스티브를 향해 목사는 그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축 처진 눈을 하고 푸른빛의 눈동자를 찡그렸다.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요." 이다지도, 스티브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풀리지 않고 답답하고 궁금하기만 했다. 그럴 거면 그 미소는 다 뭐였어? 그 상냥한 눈동자는 다 뭐였는데. 토니, 당신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멋대로 상상했던 적은 많았지만, 내 나름의 이상을 세워놓고 현실의 당신이 그렇지 않다고 실망하는 그런 이기적인 행동만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렇게도 사람을 미로에 밀어 넣는 타입일 줄이야. 스티브는 짧은 한숨과 함께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는 스티브를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의 그런 표정을 보니 스티브도 씁쓸하게나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강제로 같이 있게 하는 사람은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걸까요?"

 "응? 무슨 얘기냐?"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스티브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나러 오는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헬기마저 동원하는 사람이, 뭘 하고 싶냔 질문에 가슴을 덥석 잡는 게 무슨 의미인 것 같아요? 목사님."

 "뭐어?"

 갑작스런 스티브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멈춰있던 목사는, 곧 푸핫하며 큰 웃음 소리를 냈다. 아니, 스티브. 너 그런 일을 당했니? 그래서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목사의 너무나 즐거워하는 목소리에 스티브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웃음이 날 만한 일이 아닐텐데...? 스티브가 당황하는 모습에 목사는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스티브의 어깨를 손으로 팡팡 두드리기까지 하면서.

 "아하하하! 그거 너와 섹함뜨 하고 싶단 얘기이지 않니?"

 "네? 섹... 뭐요?"

 "뭐야, 너 모르니? 요새 젊은 애들 말에 너무 무심하구나, 스팁."

 "아, 스티브. 네가 인기가 많을 줄은 알았지만 그쪽으로는 영 의욕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되려나 싶었는데 말이야. 역시 남의 연애사에는 참견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 내가 걱정안해도 이렇게 재미나게 사는걸 말이야." "??? 네???" 목사가 눈물까지 닦으며 그렇게 말하는데, 스티브는 여전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눈이 물음표 모양이 되어 있었다. 목사는 스티브의 그런 순진한 면에 또 웃음이 나서 가느다랗게 킥킥대며, 스티브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그러니까 이것아, 섹함뜨는 그러니까 나랑 섹스 한 번 뜨자는...

 "하, 하아아아아아아?!!!!!!!!!!!!!!!!!!!!!!!!"

 "그, 그런 말이 어딨어요? 아니, 목사님이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요?!" 목사의 속삭이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진 채,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멍청한 소리냐, 내가 모르는 게 어딨다고." 목사는 목덜미까지 붉히고 소리를 지르는 스티브가 너무 웃긴 나머지 이제는 거의 배까지 감싸쥐고 있었다. "이, 이...." 새빨개진 콧등을 잔뜩 찌푸리며 스티브는 웃고있는 목사에게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쩔쩔 매기 시작했는데, 스티브가 말을 더듬으며 양팔을 파닥파닥 흔드는 통에 목사의 웃음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했다. "그, 그만 웃으세요! 그만 웃으세요!" 스티브는 그저 당황한 나머지 그런 말이나 반복하고 있었고, 양팔도 열심히 흔들어 대는데에 바빠서 오솔길을 통해 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목사님도 뭐, 웃느라 정신이 없었고.

 "스티브!!!"

 하지만 그 웃음에도, 양팔을 휘두르며 가르는 공기의 소리에도,

 커다란 나무 그늘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새들의 지저귐에도, 매미의 울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는 그저 너무나도 선명해서.

 "...!!"

 그리하여 스티브는, 그제야 팔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홱하고 돌렸다. 물론 고개를 돌린 쪽에는, 그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비싸보이는 차가 어느샌가 서 있는 채였고, 앞쪽의 운전석의 문을 잡고 차에서 반쯤만 몸을 뺀 토니 스타크가 있었다. "...!! 토, 토니." 스티브는 토니의 얼굴을 본 순간 더욱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는데, 물론 그것은 방금 목사님이 하신 알찬 말씀 때문이었다. 토니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음에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책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간 눈썹을 다시 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토니는 재빨리 문을 닫고 스티브에게로 다가갔다. "스티브,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고아원 아니면 교회일 거라고 생각해서, 토니는 마악 고아원에를 먼저 들른 참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이 스티브는 교회에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고 말이다.

 토니는 발밑의 고운 모래입자를 빠르게 발로 차며 스티브를 향해 걸었다. "아, 그..." 그리고 토니가 성큼성큼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스티브는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더더욱 안절부절 못해가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빨리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미스터 스타크?" 목사도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토니가 대체 여기에 웬일로? 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목사의 그 말이, 스티브에게 어떤 계기가 되어주었다. "!!!" 목사가 말을 끝내자마자 스티브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도망이란 단어밖에는 없었다. 왜 도망이란 단어를 토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떠올렸는지, 어째서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그렇게 해야한다고 재빠르게 마음먹었는지에 대해선, 도저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교회를 향해 달려나갔다. 마치 총구에서 발사 된 탄환과도 같은 모습으로.

 "!!! 스티브!! 잠깐 기다려! 이봐!!"

 등 뒤로 토니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스티브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미안하지만. 미안하지만 못 기다려. 난 못 기다려.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그가 여기에 왜 있지? 난 대체 왜 도망을 가는거지?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리고 스티브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그러니까 스타크 인더스트리, 고아원과 교회, 해피와 토니, 토니와 도시락, 헬기와 미즈 포츠, 토니와 스티브, 가슴과... 섹함뜨!!!- 하나로 뒤엉켜서 마블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고, 스티브는 그 모든 것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기다려! 제발, 스티브! 나 당신한테 사과하러 왔단 말이야!!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말하게 해줘! 제발, 차근차근 전부 다 설명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토니 스타크도 뛰기 시작했다. 토니는 오늘 스티브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부동산 관련 서류를 넘기러 왔던 날에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다음날부터 네가 꿈에 나왔다는 그 말들을 말이다. 너무 꿈에 자주 나오는 나머지 끝내 너를 보러 교회에 왔었는데, 도저히 부끄러워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차 안에서 그냥 힐끗힐끗 너를 훔쳐보곤 했었다고. 그 뒤 회사 뒷수습 등때문에 못오게 되었을 땐 해피를 대신 보냈고, 그러는 내가 이상해서 막 다른 사람들과 정신없이 놀아보기도 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네가 꿈에 나와서, 스티브, 너의 웃음이, 너의 환한 눈동자가, 너의 연하고 퍽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 금색 가루를 뿌려놓은 긴 속눈썹이 자꾸 꿈에 나와서, 아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알 수는 없는데 시간만 자꾸자꾸 흐르고, 그러기를 4년, 5년, 6년, 그러기를 대체 몇 년이나 흐른거지? 제길. 그리고 네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이력서를 넣었어. 내가 너의 이력서를 보았을 때의 그 심정을, 너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써야 그 심정이 설명이 될까.

 그것들을 전부 말하고 싶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도망치지 말라구. 토니는 생각보다 훨씬 빠른 스티브를 도저히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외쳤다. "아 진짜! 스티브 제발 좀!" 물론 스티브는 정신없이 교회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토니도, 재빨리 닫히기 직전의 교회문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교회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토니가 잘 모르는 곳에 숨어버릴 가능성도 있다는 거였다. 그러기 전에 잡는 게 편할 것이었지만, 물론 그러지 못하더라도 토니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교회 내부구조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여간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전부 다 뒤져보면 될 거 아니냐고. 토니는 숨을 씨익씨익 몰아쉬며 거칠게 교회문을 잡아 끌었다. "절대로 안 놓친다." 이거야 원, 스티브는 토니 스타크를 성희롱범이든 스토커든, 뒤를 쫓아오는 괴한으로든 하여튼 뭐로라도 신고를 꼭 해버려야 해. 토니는 생각했다. 그러나 신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하여간 오늘 할 말들은 전부 다 하고 난 뒤여야 했다. 오늘은 꼭 말할거라고, 그렇게 단단히 각오하고 왔으니까. 그러니까 사과를 시작으로, 모든 말을 다 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됐다. 너의 그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면서.


 그저 모든 이야기가

 사랑한다라는 단어 하나로

 귀결되는

 그 기나긴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 기나긴 이야기들을 전부 다 너에게 안기고, 스티브, 그 뒤는 네가 말하는 대로 뭐든지 할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토니는 재빨리 교회의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스티브, 어디있어? 그렇게 외치는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가, 교회의 잠잠한 공기들을 크게 뒤흔들었다.

 

 


<done>

 

커미션으로 오랜만에 쓴 토니스팁! 입니다. 히히. 커미션 감사하구, 공개허락두 감사드려요~.

생각해봤는데 나는 진짜 토니 짝사랑 좋아하나봐요.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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