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캔버스를 바라보니, 캔버스는 의외로 마냥 새하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늘 그것을 아침에 보면서도 그것에 경이를 느끼는 스티브 로저스의 감정은 참으로 다채로운 색으로 빛난다. 지금부터 스티브가 캔버스 위에 쏟아낼 수많은 색처럼 말이다. 로키는 작은 방의 한쪽구석 전체를 차지하는 또한 작고 낡은 소파 위에서 매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낡은 작은 방에 창문은 세로로 길어서, 쏟아지는 햇볕에 춤추는 먼지의 뽀얀 색을 바라보는 스티브의 눈동자는 먼지와도 같은 색으로 빛나고, 때로는 햇살의 색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저 춤추는 파도같기도 하였다. 발을 내딛을때마다 삐걱이는 나무바닥은 너무 낡아서 바싹 마른 듯도 하고 여기저기 홈이 생겨 얼기설기 대충 얽어논 것처럼까지 보이는데, 그래도 이 방속에서 스티브 로저스는 묘하게 세상 전부가 자신의 손바닥에 있는 듯한 눈을 하는 것이다. 캔버스에 다가가 전날 깎아놓은 연필을 오른손으로 들면서 짓는 그 미소는, 매일 아침 캔버스를 마주대하면서도 매주 느끼는 그 경이에 '오늘도 눈을 떠 이것과 마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로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뼈에 저릴 정도였다. 벌써 삼백일도 넘은 것이다, 캔버스와 마주하는 순간의 스티브 로저스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대체 언제부터 그 스티브의 기도하는 상대가 다른 어떤 전능한 누군가가 아닌 나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나를 봐. 로키는 긴 꼬리를 흔들며 스티브의 빼빼마른 오른쪽 다리를 휘감았다. 스티브는 캔버스 위에 연필을 갖다대어 선 하나를 긋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소년은 뒤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딱딱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내뱉었다. "로키. 방해하지 말아요." 로키의 장난에 이미 익숙해진 소년의 목소리에, 로키는 피식하고 웃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꼬리를 치웠다. 이제 이 정도 장난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지만, 그래도 소년의 관심을 끌었으니 로키는 만족스러웠다.

 

  이 낡아빠진 아파트의 이 작은 방, 그 작은 방에서 마치 세상을 다 품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 소년을 로키가 삼백일도 훨씬 전에 만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새까만 밤은 바싹 말라 벌써 몇달동안 비 한 번 내리지 않았고, 그것은 로키의 장난이었다. 로키가 인간에게 주는 별 것아닌 불행 중 하나였다. 로키는 바싹 마른 강물과 빼빼해진 동물들과 생기가 없는 식물들, 바싹 마른 공기의 높은 건조함 등을 구름저편에서 즐기고 있었다. 메마른 목에 굳이 독한 담배연기까지 퍼부으며 마른 기침을 해대는 어느 머리가 하얀 중년이 한탄으로 외치는 "망할 악마녀석 때문에 다 말라죽게 생겼어!"라는 목소리에 로키는 더욱 즐거운 기분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인간이 내지르는 저주는 악마들을 도리어 기분좋게 해주었으니까. 어차피 가뭄은 곧 끝날 것이었고 천둥의 신이 망치를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로키가 바싹 말린 것의 두 배이상 정도 되는 물이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모세가 다시 바다를 가를 수 밖에 없을 정도의 대홍수가 날만큼 많이. 그러니까 이 사소한 장난은 금방 끝나게 된다고. 로키는 검은색과 초록색, 때로는 파란색으로 더불어 빛나는 자신의 날씬하고 긴 손가락을 바라보며 구름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니 이 짧은 장난의 시기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지르는 앓는 소리 슬픈 소리, 자신을 향한 저주의 목소리를 채집하기 위해서 로키는 구름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세계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는 로키가 지구 반대편에서 보았던 가뭄에 뭘 먹질 못해 제대로 나오지도 않게 된 어미의 젖을 억지로 물고 있는 삐쩍마른 아기사슴보다 더 심각한 팔다리를 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 아기사슴도 눈만 땡그랗게 커다랬고, 무릎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때때로 휘청였더랬다. 그 털이 갈빛인 사슴이 자꾸 생각난 것은 스티브 로저스의 털색깔도 비슷한 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금색의 짧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자기몸보다 한참 큰 셔츠 밖으로 덜렁이는 얇고 빼빼한 팔 다리를 휘두르다 소녀는 곧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미의 젖조차 제대로 빨지 못하는 아기사슴과 마찬가지로 도태될 운명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그 눈, 그 눈이. 소년의 눈동자는 진한 파란색이었다. 캄캄한 동굴의 깊은 곳에 잠겨있는 지하수와 같은 색이었다.

 

 구름위를 구르며 세계를 떠도는 로키를 여기에 머물게 한 스티브 로저스는, 놀랍게도 이 심각한 가뭄속에서도 단 한 번도 저주를 토하지 않았다.  몸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그 와중에도 입밖으로는 단 한 번 신음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처음 소년에게 눈이 닿았을 때 로키는, 이 소년은 비실거리며 금방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저주를 내뱉을거라 생각했다. 겉보기가 그랬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놓은 불행덩어리였던 소년은 그래서 오히려 더 재미가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소년은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뻔한 불행의 집합체였고, 로키는 뻔한 지루함을 싫어했다. 그래서 로키는, 그저 흘러가버리려고 했다. 눈길을 한 번 끌은 소년은 그러나 더 이상 재미가 없었으므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소한 저주의 말이나 들어보고 금방 가버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티브 로저스는 저주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화를 품지도 가뭄을 향한 분노를 품지도 않았다. 고통에 가까운 가난, 항상 미열과 함께 따라다니는 빈혈과 달리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고 연약한 몸, 폭력어린 아버지와 노동에 찌든 어머니와, 불황, 불운, 불행. 그 모든 것을 작은 몸으로 견뎌내고 있음에도 대체 그 입에서는 '젠장할!' 조차도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로키는 기다렸다. 소년이 욕하는 소리나 한 번 들어보려고. 구름위를 구르며 하루, 이틀, 일주일을. 그러나 로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초조해해도, 대체 스티브란 소년은 그 입을 단 한 번도 더럽히지를 않았더랬다. 소년은 그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늘 같은 시간에 아틀리에에 들어와서는 그 캔버스, 캔버스, 캔버스를. 창문 밖으로는 끝없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태양의 빛에 바싹 말라 저주아닌 저주를 쏟아붓고 있건만, 오직 스티브 로저스란 소년은 매일같이 경이에 어린 눈으로 레몬색으로 반사하는 햇살을 보며 웃었다. "오늘도 아름다워. 널 내가 재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티브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캔버스는 그렇게도 다채로운 색으로 매일같이, 다른 색으로 빛나였고.

 

 로키는 소파에서 훌쩍 날아올라, 스티브의 어깨에 팔을 턱하고 기댔다. 발은 여전히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소년은 마르고 로키보다 훨씬 작은 키를 하고 있었지만 로키가 뒤로 다리를 빼고 스티브의 어깨에만 팔을 대고 있어 지금 로키의 포즈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로키는 심지어 아무 무게도 존재하질 않았다. 스티브는 로키에게서 어떤 따스함이나 어떤 차가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거움도 없었다. 단지 로키의 손만이 간간히 흔들려 스티브의 시야만은 방해하고 있었다. 로키는 손을 뻗어 캔버스의 한쪽에서 한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오늘은 새 캔버스로군. 어제까지 그리던 노란색 꽃은 이미 완성했어? 여기에 뭘 그릴거지?" 로키의 손이 까맣고 파랗고 초록하게 빛났다. 스티브는 그에게 어젯밤 새로운 그림에 대한 계획이 생기어 어제까지 그리던 노란색 꽃은 미완성인 채로 잠시 장롱속에 놓아두었다는 사실을 굳이 로키에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악마에게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방해하지 말아줘요. 로키." "그 말은 아까도 했잖아. 로저스." 하얀 얼굴과 까만 머리칼.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 로키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게 스티브의 몸을 죄여왔다. 스티브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에게, 자신의 그림 플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로키는 늘 하나의 그림을 끝낼때마다 나를 그리라는 소리를 해대니까. 하지만 여기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대답을 할때까지 그가 자신을 방해할거란 것도 스티브는 잘 알고 있다. 이때까지 계속 그래왔으니까. 스티브는 결국 체념하고 말았다. "버키가 오랜만에 자기를 한 장 그려달라고 해서, 그를 그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에요." 로키는 가느다랗고 아름다운 휘파람소리를 냈다. "버키. 버키 반즈. 너의 그 잘생긴 친구 말이로군. 그런데 소년을 그리는데 정작 본인이 안보이네?" 모델을 세워놓고 그리지 않아도 괜찮느냐는 뜻이었다. 스티브는 연필을 쥔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털어내듯이 로키를 옆으로 치워냈다. 스티브는 로키가 방금 만져진건지 아니면 자신의 손이 로키를 통과하여 그저 허공의 공기를 내려친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로키는 그래도 스티브의 손에 옆으로 밀려난 것처럼 스티브에게서 떨어져 훌쩍 날아올랐다. "그를 그리기 위해 그의 시간을 축낼 필요는 없어요. 난 버키라면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거든요." "호오." 스티브의 캔버스 이젤 뒤쪽에서 둥둥 떠오르는 채로, 로키는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아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저 아름다운 얼굴. 스티브는 깊게 호흡했다. 하느님, 어째서 악마는 이렇게나 아름답지요? 당신의 천사도 혹시 이렇게나 아름다운가요? 악마의 아름다움도 천사의 아름다움도 전부 같은 곳에서 출발하나요? 아름다움은 때로 선이거나 때로 악이거나 하나요. 로키는 얇은 입술을 더욱 얇게 하며 스티브에게 은근히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쯤 그려줄거지?" 그 은근한 목소리에 한결같이 단호한 반응을 보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너무 힘이 들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자신을 다잡고 다시 단호하게 내뱉었다. "당신은 그리지 않을거예요." 로키의 유려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참으로 한결같았다. 그는 늘 스티브를 유혹하는 듯한 속삭임으로 스티브에게 자신을 그려달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오래 괴롭혀왔던 가뭄이 드디어 끝나고 엄청난 비가 쏟아졌던 날, 아침, 창밖의 세상은 전부 젖어있었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 처마에 늘어지는 습기가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덕부에 스티브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분명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 기분좋은 예감은 그러나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더랬다. 늘 같은 시간에 들어온 스티브 전용의 작은 아틀리에에 놓아둔 낡은 소파 위에, 그가 앉아 있었다. 스티브는 그 까맣고 파랗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깨달음이 한순간에 찾아왔을까? 원래 악마란 것은 이렇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던가. 스티브의 오른손이 두려움으로 떨려왔다. 남자는 까만 머리위로 뾰족한 귀도 솟아 있었고 소파에 앉아있는 다리 사이로 얇은 꼬리가 비죽 튀어나와 때로 한들거리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다음순간에 그 경박한 꼬리와 귀는 사라지고 없고, 그 누구보다 말쑥하고 아름다운 신사가 되어 스티브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로키라고 순순히 밝힌 눈에 보석을 박은 것 같은 남자는 정중한 말씨로 "꼭 네가 내 그림을 그려주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위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너의 그림들은 정말 아름답더구나. 나도 꼭 너의 손안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고 싶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스티브는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모든 것이 환상처럼 아름다울까. 한 번도 본적 없는 꿈처럼, 한 번도 가본적 없는 풍경처럼. 그러나, 스티브는 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더랬다. 왜냐하면, 그가 앉아있는 그 낡은 소파는 버키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 사다준 것이었으니까. 비록 낡아 중고품 가게에서도 가장 구석에 처박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 가죽은 완전히 낡아버리고 여기저기 헤져 속이 보이는데다가 먼지까지 새까맣에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버키가 직접 골라 직접 이 방에 놓아준 소중한 소파였다. 버키가 먼지를 날리며 소파를 내려놓아주고, 그 뒤 스티브는 어머니와 함께 종일 그 소파에 물걸레질을 했었다.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는 먼지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모른다. 아아, 그게 어머니와 함께 한 마지막 물걸레질이었지. 그러한 소파 위에 저 로키란 존재가 앉아있는 것을 스티브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으로 떨리던 오른손은 어느샌가 분노로 바뀌었고, 스티브는 한 번도 낸 적이 없던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 그림은 그리지 않아요. 그리고 당장 어머니와, 버키와, 나의 소파에서 일어나요!" 그 자리에서, 악마에게,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스티브는 생각했다.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마자 목언저리가 서늘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십몇년되는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겪어내었더랬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열이 40도가 넘어가는 밤을 견뎌내야 했고, 병원에 입원하며 몇 달을 보내기도 하였고, 아버지의 폭력에 목뼈가 부러질 뻔도 하였고... 하지만 지금 이순간, 새까맣게 빛나는 악마를 마주하고 있는 이순간이, 스티브 로저스의 삶중에서 그 어느때보다 가장 죽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스티브는 그자리에서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러나 스티브는 후회하지 않았다. 악마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악마의 미소는 이때까지 스티브가 보았던 것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로키는 스티브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오른손으로 스티브의 작은 턱을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그럼, 이제부터 이 소파는 내 것인걸로 하지."

 

 그 뒤, 악마는 스티브의 작은 아틀리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동안 방에 머물며, 틈만 나면 스티브에게 내 그림을 그려주지 않을래? 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어느덧 300일.

 

 "어째서 거절하는 거지? 날 한 번 그리기만 해봐. 너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해줄텐데." 오랫동안 몇 번이고 반복된 거절에, 과연 로키도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마치 상처입은 듯한 사람의 표정을 한 채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 그 조각상 같은 얼굴에 때때로 스치는 인간적인 표정이 바로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거겠지. 스티브는 캔버스에 연한 줄 몇 개를 그을 뿐 로키를 돌아봐주지도 않았다. 이 자연스러운 냉대.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로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지었다. 사실 악마는 이렇게 무시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정말 눈앞의 악마를 이정도로 무시할 수 인간은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날 처음 봤을 때의 소년의 겁의 질린 표정이 차라리 그리워지는군. 로키는 손가락으로 스티브의 뺨을 매만졌다. 소년의 뺨답지않게 아무 탄력도 느껴지지 않은 이 마른 뺨을 왜 만지고 싶어지는지, 이 낯선 충동은 대체 무엇인지, 로키는 벌써 삼백일 넘게 그의 곁에 있음에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연필을 긋다말고 문득 고개를 돌려 로키를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다시피하는 그의 눈길에 로키는 눈을 깜빡이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세 번이나 '방해거든요.'란 소리를 듣고싶지는 않은 것이다. 스티브는 순순히 떨어지는 로키를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 가슴이 위로 크게 한 번 솟구치다 다시 잠잠해진다. 세로로 큰 창문이 나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로키는 바닥에 얌전히 앉으며, 장난을 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의 귀와 꼬리가 보이다가 또 보이지 않다가를 반복했다. 스티브는 다시 캔버스에 집중했다. 이제 이 캔버스 안에서 그의 소중한 친구 버키 반즈가 튀어나올 때까지, 스티브는 계속 캔버스에만 집중할 것이었다.

 

 "......"

 

 로키는 시키는 대로 침묵한 채, 스티브 로저스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기가 거의 없는 하얀 얼굴과 색이 바랜 입술이, 마치 그자체로 그림같다고 여겨진다. 어째서 소년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물어볼까. 너는 왜 그림을 그리지?

 

 하지만 입을 열다가고 문득, 소년의 옆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그저 다시 입을 다물게 되어버린다.

 

 말을 걸고 싶다가도, 그저 한없이 보고싶다.

 

 한없이 보고싶다가다도, 다가가 만지고도 싶어진다.

 

 내가 왜 저 뺨을 이렇게도 만지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저 입술에 왜 입술을 부비고 싶어지는지 모르겠어.

 

 세상의 수많았던 아름다운 여인들. 세상의 수많았던 아름다운 남성들. 그 모든 눈부신 육체를 영혼과 함께 집어먹으며 살아왔는데, 왜 저 그저 삐쩍 마른 몸이. 홀쭉한 뺨을. 커다란 눈동자와 둥그런 이마를 이렇게까지도 갈망하게 되었을까.

 

 로키는 인간에게 언제나 느끼는 소유욕을 떠올렸다. 내 장난감들이라는 단순하고도 저급한 소유욕을. 영혼을 타락시키고 타락되어 시커멓게 된 영혼을 동그랗게 말아, 로키는 언제나 그것들을 우그러뜨리며 살아왔다. 우그러뜨려 완전히 흩어진 영혼을 허공에 아무렇게나 뿌려 세계를 점점 하얗고 파랗고 노랗게 그리고 새까맣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다. 저 소년에게도 결국 같은 걸 느끼는 거야. 이 소유욕은 결국, 영혼을 타락시키고 싶어하는 나의 본능과 다를 게 없는 거야. 그런데 왜 스티브 로저스는 때때로 빛날까? 저리도 다채롭게도.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깔인 것마냥 느껴지는 것일까. 아닌데, 난 그저 저 소년의 영혼을 나에게로 물들여버리고 싶은 것 뿐인데. 새까맣게 굳어 동그랗게 변한 저 영혼을 이 손바닥 위에서 우그려뜨리고 싶을 뿐인 것이 분명한데. 언제나처럼. ...아니, 아냐. ...아니, 맞아. ...그만. 그만해. 로키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접은 다리위에 얼굴을 대고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의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로키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훌쩍, 그가 창문밖으로 날아간 뒤에야, 스티브는 고개를 돌렸다. 가뭄이 끝나고 비가 쏟아지고, 다시 맑은 날이 돌아와, 로키가 있었던 자리에는 햇살이 가득 고여 있었다. 스티브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악마는 떠나는 것처럼 하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이번에도 결국 다시 돌아오려나. 힘없는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며, 스티브는 또 한 번 간신히 몰아낸 악마의 유혹에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색이 나빠, 안색이. 버키는 이른 아침에 몇일전부터 주문처럼 외우던 그 소리를 또 한 번 외치고 나가더니, 저녁시간이 다되어 한아름 짐을 안고서 돌아왔다. 그의 손 안에 한아름 들려있던 것은 다름 아닌 고기, 고기, 고기였다. "고기를 안먹으니깐 안색이 그모양이지!" 버키는 소리치고서 완벽하게 조리해온 따끈한 고기 한덩이를 바로 잘라내어 저녁테이블에 셋팅 하였다. 스티브는 자기 접시 위에 수북히 쌓인 슬라이스한 고기를 보자마자 먹기도 전에 기가 죽은 얼굴이 되어선 어깨를 있는대로 움츠렸다. "이거 다 먹으면 나 분명 토하고 말거야." 스티브는 솔직한 자기감상을 말했다. 어이쿠, 그럼 안 되지. 그럼 도로아미타불이지. 버키는 고기 몇 점을 자기 접시로 옮겼다. 식사를 하는중에, 버키는 스티브에게 물었다. "그 악마는 아직도 네 주변에 있어?" 스티브는 눈을 깜빡였다. 스티브는 버키에겐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버키가 자기의 말을 믿든 믿지않든,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버키에게 300일도 훨씬 전에 자기 앞에 나타난 악마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했다. 그가 믿는지 안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버키는 스티브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있었고 이렇게 때때로, 악마가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물어보곤 한다. 스티브가 악마는 여전히 자기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리라. "응. 다시 금방 또 돌아올 것 같아." "대체 네가 어디 뜯어먹을 게 있다고 너한테 들러붙어 있다냐. 스티브야, 그놈 그만 나한테 좀 붙으라고 해." 버키는 스푼을 휘두르면서 그렇게 말했고, 스티브는 풋하고 웃었다. "버키야, 악마라면 당연히 너같이 건강한 사람보다야 나같이 비실한 쪽에 더 붙으려고 하지 않겠니? 대체 악마가 네가 뭐가 재밌어서 너한테 붙겠냐? 나같이 가진게 없고 팔뚝힘이 약한 애쪽이 당연히 더 재밌는거지." 버키는 스티브의 말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야, 원래 있는 놈들이 더하는 거거든? 내가 팔뚝힘이 강한만큼 더 욕심이 많으니까 당연히 악마쪽이 더 선호하는 타입은 나 아니겠냐?" 스티브는 친구의 헛소리를 막고 싶었고 그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티슈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버키는 당연히 친구가 날린 선빵에 응대를 하고 싶었으며 그가 선택한 응대는 다름 아닌 또 하나 더 잘라낸 고깃덩이였다. 스티브는 비명을 내질렀다. "내일 소화불량으로 얼굴이 허옇게 뜨면 다 니탓이야!!" 버키는 포크를 흔들었다. "얼굴이 하얀 건 운동부족 탓이죠, 형님."

 

 "버키. 악마의 손은 때때로 하얗게 파랗게 까맣게, 또 초록색으로 빛나."

 

 "호오."

 

 "눈은 꼭 보석조각을 박아놓은 거 같고. 늘씬하고 균형잡힌 아름다운 몸은 어떤 자세를 취해도 멋있고."

 

 "완전 푹 빠지셨네."

 

 "응." 스티브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정말로 살면서 본 적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아름답기에 더욱. "홀리지않게 조심해." 버키는 말했고, 스티브는 얇은 미소를 지었다.

 

 "주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로키는 아파트의 옥상에 둥둥 떠 있었다. 그는 스티브의 말을 반복했다.

 

 소년을 보고 있지 않아도 소년의 목소리만으로도, 로키는 소년이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상상해낼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을 것이다. 눈꼬리 끝을 가느다랗게 하고. 커다랗고 푸른 색의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금색의 머리칼 위로 내려오는 조명은 주변을 오히려 파르스름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알아.

 

 로키는 생각했다.

 

 버키 반즈, 아파트, 길, 빛, 볕, 해, 비, 꽃. 바람결에 흔들리는 진한색의 나무와 그 나무의 그림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과 부츠의 끝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어머니. 동네 사람들. 또 버키 반즈. 자동차와 손을 흔드는 아이. 수염이 귀여운 고양이와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몸집이 큰 개. 그리고 또, 어머니. 로키가 지켜본 삼백일이 넘는 시간 동안 스티브 로저스가 그린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 그것들 중 그 어느것에도 로키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스티브 로저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로키의 관심을 끄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스티브 로저스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왜.

 

 로키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밤을 채우는 하늘에 구름이 몰려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은 따가울 정도로 뛰어올랐다.

 

 로키는 이제 왠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웃는 모습 네가 웃는 얼굴 너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게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참지 못하겠어.

 

 

 

 

 그리고, 로키는

 

 아파트로 내려가 버키 반즈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손 안쪽에서 버키의 목뼈가 우득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로키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스티브 로저스, 그 자체였다는 것을.

 

 

 


 

 스티브는 아틀리에에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자기가 아틀리에까지 달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힘이 잡아끌듯이 스티브를 당겼고 스티브는 그 힘에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멍하게 서 있는 동안 다리는 후들거렸고 머리는 한없이 빙글빙글댔다. 로키는 한 손으로 버키 반즈의 목을 움켜쥔 채로 나타났다. 스티브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커다란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의 눈동자의 파란빛이 연해져, 로키는 어쩌면 그가 눈물을 흘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의 눈물이라면 한 번 보고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티브는 조금도 울지 않았고, 단지 창백한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만 점점 연해져갔다. 버키 반즈는 기절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로키에게 목을 움켜잡히고 있음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전신이 축 늘어져 있다. 스티브는 버키의 목줄기 깊은 곳까지 파고든 로키의 손톱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목이 졸려 하얗게 질린 버키의 목에 그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키의 손은 또다시 하얗게 까맣게 파랗게, 그리고 초록색으로 변했다. "...내가 뭘 하면 되죠?" 스티브는 담담하게 말했다. 로키는 생긋 웃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 아름다운 얼굴. "내 것이 되면 돼." 그 아름다운 목소리.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틀리에에는 어느새 로키와 스티브 뿐이었다. 버키 반즈는 방금까지 그랬듯 자기방에서 자기침대에 누워 고요한 잠을 이루고 있었다. 내일은 스티비에게 좀 더 고기를 먹이자, 그러자. 그런 결심은 잠꼬대마냥 버키의 꿈 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로키가 시키는 대로 옷을 전부 벗고 소파 위에 앉았다. 로키는 스티브의 부드러운 금발의 안쪽으로 두 손을 밀어넣었다. 로키의 손 위에서 그의 머리칼은 사라락, 사라락 소리를 내었고, 스티브는 로키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로키가 마치 자신의 얇은 두개골, 아니 그 안쪽, 뇌의 어딘가를 주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눈물은 나오지가 않았다. 단지 어째서? 라는 의문만이 맴돌았다. 로키는 이때까지 한 번도 강요를 한 적이 없었다. 협박을 하는 일도,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어째서. 스티브가 보기에 지금의 로키는 마치 강의 범람을 막고 있었던 둑의 한가운데가 펑하고 터져버린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쏟아져오는 물길의 어마어마한 파도가 되어 스티브를 덮치고 있는 것이었다. 로키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 스티브의 전신의 솜털사이로 소름이 돋아났다. 스티브는 로키의 숨결의 온도, 입술의 감촉을 지금 처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과 같았고 그 사람과 같은 감촉은 스티브를 더욱 슬프게 했다. 로키는 그 어느때보다도 죽음같았다. 그의 얼굴이 스티브에 닿을 때마다 더욱 아름다워졌고, 그가 더욱 아름다워질때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죽음처럼 느껴졌다. 스티브는 눈을 깜빡였다. 로키의 얼굴에 어린 죽음은 그러니까, 결국 나의 죽음인거지. 스티브는 로키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은 아름답구나. 죽음은 빛나는구나. 죽음은 슬프구나. 로키는 스티브의 알몸을 끌어안았고 스티브는 로키를 마주 끌어안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것이다. 그의 뜨거운 숨결도 부드러운 입술도, 마지막으로 젖어드는 그 모든 호흡마저도. 스티브는 로키가 주는 쾌락에 허덕였고, 동시에 비참해했다. "스티브. 스티브." 자신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는 악마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깊은 호흡을 했다. 어째서 그런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그런 애절한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적이 없는데.

 

 


 

 

 

 벗은 스티브가 창백해진 채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로키는 자신의 벗은 상의의 옷자락을 집어들어 스티브의 젖은 등과 하체위에 덮어주었다. 스티브가 아주 가느다랗게 눈을 떴지만 그 외에 다른 미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로키는 스티브가 누워있는 소파의 바로 옆에 앉아서는 스티브의 다리에 이마를 대고 소파에 기대었다.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로키에게는 너무나 뜨거웠고 지독하게 달콤했다. 로키는 숨을 토해냈다.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담고있는 손으로 직접 그 생명을 잡아버리는 것은 결국 로키에게도 금기인 사항이었다. 스티브를 가지기 위하여 버키 반즈의 생명줄을 가지고 논 죄로, 로키의 수명은 소리없이 모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로키는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생명이 흩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줄줄 새어나가는 모래의 가루들이, 사락사락, 로키의 손밖으로 흘러나가자마자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앞으로 얼마나 더 로키일 수 있을까? 천년? 백일? 어쩌면 일주일, 어쩌면 한 시간? 그것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로키는 물론 아무 불행도 느끼지 못해다. 또한 아무 즐거움도. 심지어는 충족조차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스티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스티브를 가지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나질 않는다니. 산산조각이 난 수명따윈 아무 상관도 없고, 그저 그를 끌어안았던 그 순간만큼이나 스티브가 내 것이 되었다는 확신을 느끼고 싶다. 로키는 스티브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스티브의 손톱에는 언제나 새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세번째와 두번째 손가락도 항상 연필의 거뭇한 흑연이 남아 있었고. 로키는 스티브의 손등에 키스했다. "이젠 날 그려주겠지? 스티브." "......" 스티브는 촛점을 잃은 흐릿한 눈동자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로키. 나는 나의 세상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것들을 늘 그려왔어요." 스티브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하게 들렸다. "그리고 지금, 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바로 당신이 되었군요." 스티브의 긴 속눈썹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푸르게 빛나다가, 곧 주르륵 아래로 흘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림을 못그려요. 그리지 못해요. 그렇게 되었어요."

 

 "......"

 

 "나는 이제 영원히 캔버스를 보지 못할 거예요..."

 

 "......"

 

 그리고 로키는 웃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씁쓸해했다가, 슬퍼했다가, 또 웃었다가, 하였다.

 

 그리고 아주 슬픈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넌."

 

 악마인 나보다 더 훨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아름다운 너. 로키는 눈물을 흘리며 스티브의 손등에 다시 키스했다.

 

 완전히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까지 한시간, 오십분, 삼십분... 단 한순간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자신의 것을 끌어안으며, 로키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널 갖고 싶어. 역시 갖고 싶어. 로키의 품안에서 빼빼 마르고 너무나 연약한 소년은 그저 조용히 호흡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가느다랗고 작은, 숨. 마치 아직 어미새가 품고있는 따뜻한 알 속의 미세한 심장소리와 같아. 그리고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까지 이십분, 십오분... 로키는 스티브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이 벅찬 숨. 이 벅찬 부드러움. 너의 향기. 너의 입술. 로키는 스티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곧 스티브가 조용히 로키의 목을 끌어안았고, 로키는 순간 바로 지금 지구가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같은 것을 하였다.

 

 

 

 

 

 

 


- done

 

 

로키스팁 웹교류전에 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스티브 생일인데.... 모처럼의... 그러나 퍽 우울한 것을 쓰는 나...ㅎ..ㅎㅎ;;

나도 왜이런지 모르겠네요ㅎㅎ; 모티브가 되는 성경말씀은 아마 요한복음.. 일겁니다..(잘 모르면서 막 갔다씀

 

스티브 행복해야해... 으으... 내 아픈손가락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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