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 반즈란 남자는 갖은 이유로 스티브 로저스와의 잠자리를 피했고, 그것은 스티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또한 버키가 자신과의 섹스를 피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키가 표현하길 이 '한줌도 안 되는' 허리를 가지고 있는 스티브 로저스는 매일 아침 전신 거울 앞에서 상의를 걷어붙이고 자신의 상체를 확인하였다. 어제보다 갈비뼈가 더 드러나지는 않는지, 옆구리에 살이 좀 붙어 허리가 두꺼워지지는 않았는지 보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확인하려니 어제와의 차이를 스스로는 구분할 수 없었고, 그저 여전히 버키가 말하는 '한줌도 안 되는' 허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스티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조금쯤은 살이 붙어야 버키에게 섹스하자고 말이라도 붙일 수 있을텐데.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먹은 것들은 살로 가주지 않았고, 그러긴 커녕 괜히 많이 먹으면 그날오후부터는 컨디션이 엉망이 되더니 결국 다 토해버리는 일의 반복이다. 정말이지 한심함에도 정도가 있지. 스티브는 홀쭉한 자기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어느새 배가 차가워져 있었다.
버키가 치를 떨고 밤의 스티브를 거부하는 데에 결정적인 원인은 한 달 전의 그날 밤일 것이다. 스티브로써는 잊고싶은 날이지만, 아마 버키의 기억속에 그 날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할 것이었다. 버키의 언뜻 스치는 괴로운 표정을 볼때마다 스티브는 아 이자식, 또 그 날 일 생각하는구나... 하였다. 스티브를 바라볼때마다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파하는 표정, 세상 모든 것에 기도하고 있는 것 같은 입술, 그 흐릿한 눈동자는 또 어떤가. 마치 스티브가 이렇게 허약체로 태어난 원인이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스티브는 침대에 앉아 양말을 신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멍청이를 정말 어떡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픈 것도 내가 허약한 것도 내가 힘을 못쓰는 것도 내가 섹스도중에 기절해버린 것도, 그 무엇하나도 버키의 잘못인 것은 없었다. 그걸 브루클린의 모두가 알텐데, 오직 버키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 스티브는 자신의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나는 손가락들을 바라보며 몇 번 잼잼을 하였다. 손끝이 하얗게 식어서, 혈액순환이 잘 안될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아- 아." 오늘도 섹스하자고 해봤자, 장렬하게 패배할 것이다. 아무리 스티브래도 몇 번이나 거절당하면 마음도 제법 꺾이게 된다. 스티브는 괜히 버키의 얼굴마저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티브의 작은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버키는 스티브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스티브의 작은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이마에 갖다댄 채, 버키는 꼭 스티브에게 기도를 올리는 듯 했다. 그의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속에서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야?"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버키에게 그렇게 말해보았더니, 그제야 고개를 든 버키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에게 기도하고 있단 걸, 내가 너에게 바라고 있단 걸, 대체 어떻게 안거야? 버키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고 있었다. "내 삶에 신이란 너뿐인걸 대체 언제부터 알았어?" 스티브는 버키의 얼굴에 피어오른 붉은 꽃을 바랄보며 그를 대신해서 하늘의 신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그를 용서해주세요. 그는 그냥 날 너무 사랑하는 것 뿐이에요. 우리들을 지켜보았다면 굽어보았다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으시겠죠. 그와 나를. 아멘. 스티브는 고개를 숙여 버키의 헝클어진 앞머리가 흘러내려와 있는 이마에 짧게 키스를 했다. 쪽소리도 나지 않는 버드키스였다. 버키의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얀 얼굴. 강한 입매. 부드러운 뺨.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마치 호수에 비친 신의 얼굴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네가 갖고싶어." 스티브는 입술을 모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키는 쥐고있는 스티브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너와 하나가 되고싶어." "......" 그제야 버키의 말을 이해한, 스티브의 얼굴에도 엷은 분홍빛 꽃이 피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잘 할 수 있으려나."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고.
그때 그 말을 안했어야 하는건데! 괜한 말이 저주가 되어 돌아온 게 분명하다. 스티브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그날밤은 창문을 닫아놨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환해서, 보지 않아도 달이 아주 크고 둥그럴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혹시나 추울까봐 그의 단추를 전부 연 셔츠 한 장을 제대로 벗겨내지 못하고 그 위에 담요를 더 덮어주기 까지 했다. 스티브는 전부 벗은 버키의 상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아름다운 몸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부끄러운지 콧잔등을 찌푸리고 뺨을 붉힌 채 버키는 천천히 스티브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그건 결코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목덜미에 닿는 버키의 따뜻한 숨이 싫어서인 것도 아니었다. 버키가 그걸 알아주면 좋겠다 싶어서 스티브는 얇은 두 팔로 버키의 넓은 등을 꽈악 끌어안았다. 긴장하고 있는지 버키의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드러났고, 맞닿은 피부를 따라 버키의 심장소리가 쿵쿵하고 울려퍼졌다. 스티브는 그 소리가 귀여워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버키가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버키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으니까. "내 소중한 스티브." 버키는 스티브의 귓불에 입술을 묻으며 그렇게 속삭였고, 스티브는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폭신함 속에 있었다. "...내 소중한 버키. 계속해. 계속..."
하지만 그것도, 스티브가 두번째의 사정을 끝내기 전 까지만이었다. 스티브의 두 번째 사정 후, 모든 푹신함은 딴딴하게 얼어붙어버리고야 말았다. 스티브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두 번째 사정을 버키의 손안에서 끝낸 후 손 발이 끝에서부터 딱딱해져 감을 느꼈다. 그대로 굳어버리는 듯한 낯선 감각 속에서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스스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때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지. 자신은 눈을 감아 알 수는 없지만, 그 짧은 몇 초동안 버키가 느꼈을 지옥을 상상하노라면 스티브는 참 미안하고 가슴이 메어왔다. 먼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버키의 목소리는 마치 이곳에 세상의 모든 불행이 모여있는 듯했다. 미안해. 용서해줘. 스티브는 해일처럼 밀려왔던 죽음의 예감이 고통을 동반하며 전신에 퍼졌다 겨우 물러간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때 눈이 마주친 버키의 표정이란. 아아, 내가 너를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나란 놈이. 버키는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스티브의 조막만한 상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젠장, 나란놈은..." 미안해, 하고 오열하는 버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놈이 되어 있었다. 나란 놈은 당장의 욕정조차 참지 못하고 너를 죽일 뻔한 개새끼라면서. 그렇게 버키 반즈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놈이 된 순간에, 그야말로 그를 세상에서 제일 나쁜놈 취급하는 것은 정말로 버키 본인밖에는 없었지만, 하여간 그때에 스티브는 버키의 품안에서 눈물을 도르륵 굴리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계속'은 어디로 갔는지 한탄하면서.
"계속..."
더 이상, 그 말을 버키에게 할 수 있는 자기자신은 존재하지 않는걸까. 스티브는 슬펐다. 자신의 뭄뚱아리의 비참함도 그렇지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기도 싫었다. 아, 하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매일같이 버키에게 졸라댔다. 그 날밤의 계속을 하자고. 나 이제 괜찮으니까 계속 하자고. 그때같은 기절은 두 번 다시 안할 수 있다고, 사정이 내 몸에 지나친 쾌락이라면 천천히 조절하면서 되는 거 아니냐고... 머리에 열이 몰려 뜨거워지는 것조차 참아내고 부끄러움을 견뎌내며 그렇게 소리질렀건만, 버키는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을 뿐 스티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젠장. 옆에 있으면서 그런 표정밖에 짓게 못하는 내 사정도 좀 헤아려주라고. 이 못되고 소중한 버키녀석아. 스티브는 버키의 헐렁한 셔츠를 손으로 잡아당겨 그의 셔츠가 뒤로 쭈욱 늘어나게 하며 그에게 매달렸고, 그가 그럴때마다 버키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는-웃는건지 우는 건지 곤란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다니, 버키 반즈 녀석-얼굴로 근육이 붙은 긴 팔을 뒤로 뻗어 스티브의 등을 쓰윽쓰윽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스티브를 등 뒤에 매단 채로 뚜벅뚜벅 걸어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스티브를 뒤에 매단 채로 옷을 개거나 스프를 만들거나, 장작을 가르거나.
스티브는 아주 잠시 버키 반즈의 인생에 유일한 신이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 그땐 정말 행복했었는데. 그리고 이젠 온통 그의 불행이 된 것만 같다. 스티브는 침대위에서 데구르르 굴렀다. 몸이 옆으로 눕혀져 마치 태아의 자세가 된 채, 스티브는 다리를 더욱 접어 무릎이 거의 배에 닿게끔 했다. 발끝에서 양말이 길게 늘어나 신은 것도 벗은 것도 아닌 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의 거의 솜털같이 작은 몸조차도 낡은 스프링의 바다속으로 깊게 빠져버릴 것같이 된 뒤에야, 버키 반즈가 스티브의 아파트 문을 열었다. 버키는 코 끝이 약간 붉게 변해 있었다. 아직 낮동안은 햇살이 따뜻해서 조금 방심한 채 얇은 옷을 입었더니, 차가운 아침공기에 코끝을 당하고 만 것이다. 자켓 안쪽에 솜을 누벼야 할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이른 것 같아. 버키는 차가운 손으로 차가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현관에서 짐을 내려놓았다. 구두약, 빵, 몇개의 둥그럽고 무거운 과일과 통조림들, 스티브가 좋아하는 약간 단 잼과 쿠키, 그리고 몇 송이의 노란 꽃. "스티브? 일어났어?" 버키는 까만 구두로 바닥을 꾹꾹 누르며 스티브의 침대로 걸어갔다. 몇걸음 가지 않아 도달한 침대 위에서, 스티브는 몸을 둥그렇게 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암모나이트 같아." 버키는 중얼거렸다.
"멍청한 소리 말고 뺨에 뽀뽀라도 해." 스티브는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버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네가 저주에 걸린 공주님이라면 기꺼이 하겠지만 말이야."
그거 비슷한 거잖아. 스티브는 생각했다.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면 연인과 섹스도 제대로 못하는 불행덩어리가 될 리 없지. 스티브는 슬쩍 한 쪽 눈만을 떴다. 머리맡에 있을 줄 알았던 버키가 어느새 옆으로 걸어와 침대 밖에 무릎을 꿇고는 침대의 모서리에 턱을 올린 채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깝네. 스티브는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감았다. 버키의 헤이즐넛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스티브의 이마에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뭐, 네가 공주가 아니라도 기꺼이 널 깨울테지만. 스티비."
"......"
스티브는 눈을 뜨지 않았다. 버키는 손을 들어 스티브의 이마를 쓰다듬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얇고 가는 금색 머리칼이 손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사라라락 하였고, 버키의 심장은 아침부터 쿵, 쿵 대었다. 내 삶의 유일한 신이 오늘 아침은 묘하게 게으르네. 버키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그렇게 생각했다. 귀여워. 침대 위에서 고롱고롱. 끌어안고 싶다. 뽀뽀하고 싶어. 섹스하고 싶다. 버키는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은 전부 자신에게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계속해." 스티브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버키는 스티브의 바램대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멈추어버렸으면.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티브의 마찬가지로.
- done
트위터 스른 전력 69차 주제 : 계속
계속이란 말을 차마 '계속' 잇지 못하는 슬픔의 틈에 끼어있게 된 버키의 스티브. 멸티브는 섹스.. 잘 못하겠지요... 체력이 없어서 못할거예요... 흑흑
버키스팁 오랜만에 쓰네. 버키멸팁은 증맬 아픈 손가락임...
퇴고 없지롱. 비문, 오타 죄송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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