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 after
토니의 세계가 무너진 것은 바로 그순간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완벽한 육체를 지닌 슈퍼솔저를 탄생시킨 혈청의 작용으로,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몸이 된 스티브 로저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제 기회만 생긴다면 하워드 스타크를 뛰어넘은 자기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토니는 어느날 스티브를 취한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취하지 않은 그의 몸을 취하게 만들어버린다면 하워드가 만든 혈청을 뛰어넘는 것이 된다싶었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혈청이 탄생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지만 그 우연에 닿기까지의 수많은 실패들에 관한 연구는 이미 숙지한 상태였다. 그런 토니에게 필요한 것은 수많은 연구를 기반으로한, 역시나 우연에 가까운 천재적인 영감정도로. 어쨌든 토니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거의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의 조금씩 서로다른 다양한 실험작들을 미리 넣어둔 술잔들을 자신의 와인바에 잔뜩 나열해버리고야 말았다. 스티브가 오기 바로 직전까지 계속. 병으로 만들면 양이 너무 많아서 스티브가 다 못마실까봐 일부러 한잔씩 따른다는 것이 어느새 와인바를 가득 채우게 되었고, 기어코 잔이 모자라져서 토니는 접시위에 술을 붓기까지 하였다. 토니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티브가 지저스... 하고 신을 찾았던 것은 그 이유때문이었다. 설마 그걸 내가 다 마셔야해? 걱정어린 그의 목소리가 토니를 설레게했다. 성공을 예감하는 기분좋은 설레임. 그리고 두시간 후에 토니는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토니의 강요아닌 강요에 의해 와인바에 올려져있는 이제 정체도 모를 것이 된 술을 스티브는 혼자서 전부 다 마셨고, 토니의 의도대로 제대로 취해버렸다. 그렇다. 슈퍼솔저 스티브 로저스가 정말로 취해서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쓰러진 스티브의 얼굴을 보며 좋아라하며 신나게 춤을 추다가 문득, 토니는 스티브가 대체 어떤 종류의 약품이 담긴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된건지 아니면 이것들 전부를 다 마셔서 그렇게된건지에 관한 구분이 전혀 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 마이 갓. 술잔에다가 제대로 써놨어야 하는건데, 성분표. 토니는 자신의 이마를 탁하고 치며 오늘의 스티브를 취하게는 만들었으나 내일의 스티브를 취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바보영감이랑 같이 노는버릇해서 이렇게 된거잖아. 토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와인바위에 얼굴을 박고 쌕쌕하며 자고 있는 스티브를 자신의 침대까지 부축했다.
그리고.
그래.
오늘은 토니 스타크의 세계가 무너진 날.
무너진 과정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토니 스타크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 기억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확실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낄뿐으로. 단지 토니는 한 번 무너진 세계는 두번다시 무너지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세계의 잔해위에 다시 세워지는 세계는 이전세계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토니는 말을 잃었다. 아랫입술이 떨려오는 경련의 느낌이 목의 가죽을 타고 가슴 전역으로 퍼졌을 때, 토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귓가에서 들었다.
침대에 뉘여놓은 스티브 로저스의 긴 속눈썹은 연한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어느 별의 빛을 담은 눈.
토니는 항상 그 눈동자 속의 빛을 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속눈썹을 아래로 내린 채 푹신한 베개에 한쪽 얼굴을 대고 잠에 빠져있는 스티브의 숨소리가 점점 낮아질때마다, 토니는 점점 크게 울려대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환각에 빠져 있었다.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순간도 시선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의 거의 변화가 없는 담담한 얼굴을 왜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저 바라만보고 싶어지는지. 왜 이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지. 바닥에 소리가 나지 않는 의자를 침대가장자리까지 끌고와 거기에 앉아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순간조차, 스티브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만큼 토니는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전신의 감각이, 스티브 로저스를 느끼고 싶어하는 순간, 무의식의 명령을 받아든 오른손이 천천히 스티브 로저스의 진한 금색의 눈썹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한 번 훑어 그 부드러운 털의 결을 역방향으로 쓸어내리는 바로 그 순간,
토니는 깨달았다.
이건 사랑이다.
이건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건 저주다. 토니 스타크는 사랑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주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내뱉으니 그 단어가 가진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고, 강렬해졌다. 그 단어는 스스로 건 주박처럼 토니의 전신을 옭아맸다. 너를 사랑하다니. 너를 사랑하고 말다니. 내가. 다름아닌 토니 스타크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를. 스티브 로저스를. 캡틴 아메리카인 스티브 로저스, 너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 토니는 자신의 얼굴을 전부 감추는 손바닥 두개의 그림자 속에서, 혹시 자기가 울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의아했다.
이렇게 가슴이 텅비어버린 것처럼 허전한데, 지금같은때 눈물이 나지 않으면, 눈물이란 대체 언제 흐르는 거지. 존재하는 이유가 뭐야. 뭐때문에 있는 거야.
가을, 별이 굉장히 밝은 어느밤이었다. 이상하게 선명하고 나란하게 이어져 있는 별들에 비해 밤에 더욱 진해지는 하얀구름이 더 높이 떠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가 별이 굉장히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꼭 만질수도 있을 것처럼. 혹은, 그대로 가슴으로 쏟아져내릴 것처럼.
'어벤저스'를 그만두겠다는 토니 스타크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나서, 이틀째. 그 이틀동안 쉴드를 포함한 어벤저스 중 그누구도 토니 스타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스티브는 설마 쉴드가 아이언맨의 행적을 추척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누구보다 당황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당황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왼쪽의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간간히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벤저스의 대부분은 스티브가 당황한 상태라는 것을 내심 느끼고 있었다. 오랜시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나눈 사이였기에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필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거기에 여자의 감이 더해진 나타샤는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의 차림을 하고 있는 것에서 그가 아이언맨이 혹시 어떤 트러블에 휘말린 것은 아닌가를 가장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포착해냈다. 스타크 타워의 어벤저스를 위해 준비된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약간 단정치못한 자세인 채로, 나타샤는 자리에 앉지않고 천천히 왔다갔다를 하고 있는 스티브의 등을 향해 가만히 말을 내뱉었다. 스티브.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닐거예요. 팔짱을 낀 손 그대로 뒤를 돌며, 스티브는 방금의 말을 잘 못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나타샤는 어느새 길어서 어깨에 닿은 붉은 머리를 찰랑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습격을 받았다거나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아닐거라구요. 그런 종류의 일이라면 어벤저스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필요가 없잖아요.
100% 확신하고 그 발언을 하는건가, 나타샤?
그래요. 100%. 캡. 우리는 단지 그가 왜 어벤저스를 탈퇴하겠다고 말을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먼저 추측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난. 그래야 그를 찾은 후에 생각을 달리하라고 설득할 수 있잖아요.
확실히, 어벤저스라는 팀은 스타크의 재력에 의존해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당장에 우리가 모여있는 이곳도 사실은 스타크의 소유지이고 말이지?
어떤 빌런에게 협박이라도 받고있는걸수도 있지않나?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그 모든 비밀스런 회로가 다 막혀서 결국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회로 딱 하나에다 대고 어벤저스를 그만두겠다는 말만 하라고 강요를 받았다면...
글쎄요, 캡틴. 안타깝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던데요.
호크아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그 분야의 프로인 내 말을 믿으셔야 해요. 캡. 물론 스파이인 블랙 위도우도 프로이긴 마찬가지고. 저도 제말에 100% 확신하는겁니다. 영상속의 아이언맨은 그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진심이었어요. 협박받은 기미도 거짓말하는 기미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
평소와 다른점이 있다면, 그저 지나치게 진지했다는 것. 그것밖에는 없어요.
스티브는 클린트의 마지막말을 잇는 것처럼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말라있는지 손바닥이 말라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닿은 피부의 감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스티브는 희미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시야를 둬야할 곳을 잃어버리고 단지 조금 헤매였다. 클린트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아까부터 몇 번을 반복했던 동영상을 또 한 번 재생하였다. 화면이 기계밖으로 튀어나와 클린트의 앞부분이 환해졌고, 드디어 시선을 둘 곳을 찾은 스티브가 천천히 다시, 토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화면이 클린트쪽으로 향해있어서 스티브는 단지 픽셀화 되어있는 토니의 진한 밤색 머리칼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온 화면보다 더 밖으로 번지는 그의 목소리만이. 토니 스타크인데, 쉴드에게 전해줘 호크아이. 난 그만두겠어. 어벤저스를 탈퇴하겠다는 의미야.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어벤저스가 아니야. 탈퇴하는 것에 대한 뒷정리는 나중에 할테니까 걱정말고, 한 이삼일 안보일거라 생각하지만 찾지말아줘. 그럼 이만. 목소리가 멈추자 화면도 뒤따라 멈추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밤색 머리칼을 쳐다보다가, 곧 눈을 내리깔았다. 눈동자 안쪽이 시큰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긋한 고통.
그리고 그날저녁, 스티브는 페퍼의 전화통화를 받았다. 토니 스타크가 돌아왔다는 전화였다. 스티브가 안부를 묻기도 전에 페퍼가 먼저 토니는 전면 무사하고 사라졌던 때와 똑같이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스티브는 전화너머로까지 자신의 안도의 한숨이 들리지 않기를 내심 바랬다. 어쨌거나 이제야, 수트를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브는 토니와 통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페퍼의 안타까운 목소리, 그 안타까운 목소리는 스티브를 향한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미안해요 스티브. 안그래도 계속 토니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토니가 통화하고 싶지 않대요. 아무하고도. 단지 자기가 돌아온 것만 알리라고, 걱정하지말라고 했는데 왜 걱정했느냐고... 그렇게만 전해놓으라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스티브. 사실 토니는 나하고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돌아오자마자 자기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고 있거든요. 페퍼는 토니가 자기방에 틀어박히기 전에 한아름의 술을 들고 들어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사라졌던때의 걱정도 충분히 넘치는데, 그위에 그가 돌아오고 난후에의 걱정까지 포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티브는 전화너머의 보이지 않는 페퍼에게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왜 당신이 미안해합니까. 나에게 미안해 할 사람은 없는데... 네. 무사하기만 하면 됐습니다. 페퍼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스티브. 사과하는 페퍼의 목소리가 아주 가느다래져서 귓가가 간지러웠다. 스티브는 연하게 띄운 미소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침대에 걸터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내뱉은 숨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무엇보다 다행인데, 기분이 왜 이런 것일까. 스티브는 속눈썹을 희미하게 떨었다. 미미한 감정이 모래처럼 자글거리더니 천천히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래.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토니 스타크의 기분이 느껴졌다. 그는 어쩌면, 아니 역시나.
스티브는 자기가 취한 날의 아침을 회상했다.
눈을 뜨니, 토니 스타크가 없었다.
나를 취하게 만들다니, 하고 웃으며 스티브는 토니의 넓고 큰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혈청의 힘이 그래도 남아서인지 숙취나 머리아픔, 몸의 무거움등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취해서 쓰러져 잠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스티브를 놀라게 했고, 그래서 스티브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난 한참동안을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을 매만지며 비져나오는 웃음위에는, 스티브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과거의 슬픔을 떠올리는 공기가 녹아 있었다. 70년전의 어느밤. 친구를 잃은 고통을 견디다 못하여 비우고 있었던 그 무수히 많은 술병들에도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던 캡틴 아메리카의 이성. 스티브는 쓰게 웃었다. 토니가 그날밤에 있어주었다면. 그 고통을 그려놓은 듯한 밤에 난 분명히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그때 이후론 두번다시 이룰 수 없었을 달디단 잠에 빠질 수 있었을텐데. 친구가 죽었다는 현실을 완벽하게 잊을 수 있는 좋은 밤을. 스티브는 머리를 두어번 저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다리에 엉켜드는 얇고 부드러운 시트를 떼어내면서 스티브는 자신의 셔츠를, 바지를, 그리고 머리상태를 체크했다. 간밤에 입은 그대로이고, 머리만이 조금 부스스했다. 스티브는 큰 두손으로 머리를 전부 이마위로 쓸어넘기고는 토니의 방문을 열었다. 너의 침대를 차지해서 미안해. 하지만 덕분에 몇십년만에 근사한 경험을 했어. 정신없이취해서 꿈도 꾸지않고 잠에 빠져드는 것말이야. 하지만 두 번은 사양할게. 아니, 아니다. 시작은 역시 굿모닝이어야하지. 스티브는 긴소파에 거의 누워있는 토니의 둥근 모양의 밤색머리를 발견했다. 소파에서 자게 해버렸군. 하고 다가가니, 스티브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토니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자지 않고 있었다.
목이 부었는지 목소리가 잠긴 채 갈라지고 있었다.
여, 캡. 일어났나.
...아.
사람의 목소리에 녹아있는 진심을 구분할 수 있는 스티브였기에, 지금 완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토니에게로 스티브는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단지 그자리에 멈춰서서 생각했던 굿모닝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제야 스티브는 토니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유리잔, 반쯤 담겨있는 위스키를 보았다. 밤새 자지않고 마신거야? 어째서? 스티브의 머릿속에 떠도는 여러가지 질문들은 토니가 천천히 흘려내는 의미없는 말들의 단어들에 의해 메꿔져버렸다. 잘잤냐는둥, 침대는 불편하지 않았냐는둥, 갑자기 취하게 해서 미안했다는둥, 이제 내멋대로 굴지 않을테니 너도 안심하라는 둥, ...그리고 조심히 잘가라는 어느새의 마지막 인사. 그 떠넘기다시피한 마지막 인사를 주우며, 스티브는 단지 토니 스타크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쯤은, 기분탓이라고 넘길까하고도 생각했었다. 왜냐면 전날밤, 친근한 두사람 사이에 거리감이라고는 없었고, 토니는 어깨동무를 하면서 술잔을 자꾸 건네면서, 그의 숨소리까지 뺨에 닿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래서 어쩌면 혼자 술을 마신 것에 대한 여파로 토니의 기분이 나빠진 것때문에 목소리가 그렇게 차갑게 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로할까 하고.
하지만 아니었다.
역시 아니었나.
스티브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조금도 알 수 없지만, 스티브 로저스는 토니 스타크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았다.
그는 나를 보기가 싫은거야.
그래서 어벤저스를 탈퇴하겠다고 하고, 도망가듯 잠적하더니 돌아와도 역시 보이지 않고. 모래를 씹는듯한 기분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스티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투를 집어들고 아파트를 나섰다. 바이크의 키가 점퍼안에서 짤랑였다. 작은크기의 아이언맨 피규어. 네가 줬잖아. 항상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라면서. 너의 그런 오만함이 생소했지만 싫지 않았는데. 너의 그런 자연스러운 자신감이 나를 이시간대에 적응하게 해주는 큰 힘이 되었었는데. 이토록 일방적인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어. ...네가 멋대로 나를 보기싫어졌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거잖아.
세상일이 그렇게 되는건 아닌거잖아.
사람의 마음도.
그의 집 문밖에 서서 스티브는 단지 초인종을 한 번 눌러보았다. 집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잠잠했다. 스티브는 허무하게 사라진 자신이 누른 초인종의 소리를 그저 되새길뿐 다시 초인종을 누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페퍼는 이미 없겠지. 토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자고있지는 않을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이곳까지 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토니가 예감했다면, 그는 아마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이 단지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워졌다. 스티브는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차가운 숨이 스티브의 왼쪽뺨을 스치며 지났다. 숨을 들이마쉴때마다 차가운 공기에 처음에는 코끝이 얼얼했다가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밤은 춥군. 손끝이 시려. 스티브는 빨갛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토니가 열어주기를 바랬다. 무슨 말이라도 나누기를 바랬다. 하지만 스티브는 내심 자기가 한발을 내딛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도 슬그머니 느끼고 있었다. 스티브는 정말이지, 토니가 무슨말을 돌려줄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고 하겠지.
보기싫다고 하겠지.
토니의 그런말이 왜 자신을 괴롭히는지, 스티브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토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평생 그말들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토니 스타크의 집의 문이 열렸다.
스티브는 조금 놀라 자기쪽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금방 문을 열어준 것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토니가 아니었다. 자비스였다. 자비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 톤으로 스티브를 환영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종용했다. 스티브는 입을 다문 채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그 짧은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스티브는 묵직하게 자비스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토니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자비스의 목소리가 꼭 망설이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스티브의 감정이 뒤섞여서였을까. sir. 사실을 말하자면, 주인님은 당신이 온 것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문을 연것은 오직 나자신의 판단입니다. 주인님의 건강상태를 위해 주인님을 말려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스티브는 그 말을 들으며 토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넓은 집 가득히, 술냄새가 차올랐다. 자비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비스는 드문드문히 몇 개의 스탠드의 불을 켰다. 마치 스티브를 토니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려는 듯이.
토니는 그곳에 있었다. 이틀전 두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소파위에. 다른 것은 그날은 유리잔을 들고 있었고, 오늘은 술병째로 들고 있다는 것 정도. 아 그리고 그날, 스티브는 토니의 뒤에 있었고 토니는 스티브의 앞에 있었다. 오늘은 토니가 스티브의 앞에 있고, 스티브도 토니의 앞에 있었다. 희미한 불빛만이 겨우 어른거리는 어둠속에서 토니는 잠시 움찔하고 쥐고 있던 술병을 놓칠뿐 별다른 미동을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이미 비어있는 술병이 그대로 바닥의 카펫에 부드럽게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가는 것이 끝날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술병은 이미 카펫위 무수히 많은 다른 병 중의 어느병에 부딪혀 구름을 멈추었다.
" 토니. "
어둠속에서도 스티브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뻗어나가는 힘을 갖고 있었다. 토니는 귀가 간지러웠다. 그 목소리에 젠장할 가슴이 뛰었다. 하하, 토니는 술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틀동안 눈물나게 듣고싶었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르는 순간, 이렇게나 살아있는 것 같은 벅찬감정이라니. FUCK. 정말이지 엿이나 처먹어버려. 그를 떨구어내려고 미친듯이 하늘을 날아제꼈던 그 이틀동안은 대체 어떻게 할건데. 어째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건데. 토니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몸을 뻗어 소파에 완전히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한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 여, 스티브. 왔나. 잘왔어. 모처럼인데 또 한잔해. "
목소리만 들어도 전신이 떨리는데, 얼굴을 보면 내가 대체 어떻게 될까.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다.
" 미리말해두겠는데 오늘은 그냥 평범한 술이라서 캡시클에겐 맹물과 다름없을거라고 생각해. 아, 그래도 그냥 평범한 술인 건 아니야. 저기 어디에 발렌타인도 몇 개 섞였고, 페그도 분명히 있을거고, 어 또 그리고 뭐더라... 기억이 안나네. "
" 토니. "
" ...... "
" ...... "
" ...말해. "
단지 거기에 서서, 말하란 말이야. 다가오는 발자국따위를 내지말고. 토니는 스티브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길 바랬다. 그저 그자리에 멈춰서주길 바랬다. 토니는 눈을 감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잠겨있는데도, 그래도 스티브가 걸어오는 소리로 그가 어디까지 다가왔는지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뇌까지 차올라 전신이 절어있는데에도 그래서 몸이 열로 달아올라있는데에도 스티브 로저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째서일까. 대체 왜일까. 인간에게 사랑이란게 대체 뭐길래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일까. 그럴 필요 없는데.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은데.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않고. 토니는 스티브의 향때문에 어지러웠다. 들이부은 말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꿈쩍도 하지 않은 모습을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파를 내려다보며, 어둠속에 거의 잠겨있다시피한 토니 스타크는 그 밖으로는 나오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다, 눈앞에 내가 있기 때문인건가? 스티브는 허리를 숙여 자기 발앞에 놓여있는 카펫위의 빈병들을 옆으로 치웠다. 이미 차가워진 손끝에 병이 닿을때마다 싸늘한 기운이 맴을 쳤다. 그리고 스티브는 토니가 누워있는 소파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상체를 다시 펴자, 눈앞에 토니의 옆모습이 나타났다.
" 토니. "
" ...... "
" 가능하면 다시 생각해주게. 어벤저스는... 어벤저스는 자네가 창설한 프로젝트나 마찬가지야. 팀을 꾸리는 것도 항상 자네를 메인으로 했었지. "
" ...... "
" 하다못해 어벤저스의 본부조차도 자네의 개인사유지나 마찬가지인 곳아닌가. 토니. "
" ...... "
" 토니. 너도 사실은 스스로 말도 안되는 말을 내뱉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아이언맨이 어벤저스에 없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 아니. 솔직히 말하면, 캡, 난 가능하다고 생각해. "
어둠속에서 토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날처럼 차가웠다.
" 난 더 이상 어벤저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아메리카는 민주주의 국가이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어벤저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쉴드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정부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어벤저스에서 완전히 아웃할 생각이야, 랄까, 내마음으론 이미 아웃한 상태이기도 하고. "
" ...... "
" 돈이 필요하면 줄게. 이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한 양의 지원이라도 아낌없이 해줄게. 본부? 마음껏 써. 불편하다면 다른 경치좋은 곳에 새로 하나 만들어줄게. 그런 것이 날 잡는 이유라면, 정말이지 금방 해결될 문제들 뿐이네. 캡틴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응? "
" ...토니. "
" ...오, damn it. "
" ...... "
그리고 스티브는 토니의
토니의 비어있는 손바닥 위로,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숨결을
어둠속 또 드리워진 그림자에 비춰진 토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이것봐, 캡틴. 이제 난 무리야. "
" ...... "
그것은 토니 스타크의 한계를 알리는 신호였다.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이제 무리라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지는 봇물이 될거라는 신호.
" 알겠어? 난 모든 것이 다 무리라고. "
" 토니, "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가 거의 울것처럼 되어있었다.
" 캡. 난 너를 사랑해. "
" ...... "
" 듣고있어? 난 너를 사랑한다구. "
그 찰나의 순간
토니 스타크는, 어째서
이런 순간조차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건지 의아해했다.
지금같은때 눈물이 나지 않으면, 눈물이란 대체 언제 흐르는 거지. 존재하는 이유가 뭐야. 뭐때문에 있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생각하고나서, 데자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주 가까운 언젠가에, 한 번 했었던 생각이야.
그 역시 너를 생각하면서.
하하하, 하고 토니는 실소했다. 그리고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깨물은 윗니와 아랫니가 뿌득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토니는 안간힘을 다해, 전신의 모든 힘을 다해, 분노하고 있었다.
사랑에 저항하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스티브 로저스를 사랑하고야 만 토니 스타크를 저주한다. "
" ...... "
" 왜냐하면 나는, 나는, 나는 하워드 스타크가 아니기 때문에, "
" ...... "
" 나는 하워드 스타크가 되고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가 생애를 다 바쳐 매달린 캡틴 아메리카를 위한 삶을 결코 살고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안 돼, 내 삶이 캡틴 아메리카로 백퍼센트 채워지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구! "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살아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를 위해 남은 생을 전부 바친 사람이었다. 그것외에 삶의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는, 뭘 위해 존재했던 거지? 그사람은 어째서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을 이세상에 탄생시켰단 말인가? 하워드 스타크의 '아내'를,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을. 자기자신에게 의미없는 존재들을 만들어서 왜,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그리고 토니는 그런 하워드 스타크를 자각한 그날부터, 절대로 자신의 가치를 하워드 스타크가 만들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죽었던 그 날에는 하워드 스타크가 가치있게 여기는 모든 것을 가장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워드 스타크같은 인생은 절대로 살지 않겠노라고, 하워드 스타크를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버리고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한꺼번에 밀어낸 채로, 그렇게 앞으로를 살아가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 ...스티브.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된 토니 스타크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고 있어. "
그렇기 때문에.
" 너를 사랑해. ...하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아. "
하지만 사랑해. 사랑한다.
그래서 만나면, 사랑하고싶은 마음이 넘치니까 만나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넘치면 나는 너를 안겠지. 안고난 후에는 네가 더 사랑스러울거야. 그리고 더욱 사랑스러운 너를 안은 채
나는 무너지겠지.
망가지거나.
그러고싶지 않아.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다.
이미 무너진 세계의 위에 서있는데, 더 뭘 어떻게 하라고.
" 스티브. 나는 몰라. 나는 무너진 세계를... 다시 만드는 법을 몰라. "
" ...... "
" 망가지기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 나는 무리야. 무리라구... "
" ...... "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토니.
평생, 너에게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말들이 있다.
정말로 다행이다.
너에게 그 말들을 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스티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토니의 비어있는 손바닥 위에 키스했다. 스티브의 입술이 차가운 와중에 몸을 달아오르게 해서, 토니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눈속에 새겨진 붉은 분노가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일렁였다. 토니는 거칠게 스티브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는데, 스티브는 그런 토니를 거절하지 않았고 그게 토니를 더욱 미치게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스티브의 목과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는 토니의 손등위로 거친 힘줄이 솟았다. 토니의 악력에 전체가 바스라질 것처럼 울려왔고 스티브는 토니의 목을 더욱 껴안았다. 그는 어둠속에서 토니는 결코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조금 눈물 흘릴뿐으로. 눈물은 금방 말라서, 턱에 도착하지조차 않고 사라진 눈물을 대신해서 스티브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토니의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없는 외침에 금방 먹혀버렸다. 스티브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토니를 미치게했다. 그리고 미쳐버린 토니가 스티브의 옷을 찢고 그의 몸을 탐하는데에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니는 아무 준비 없이 스티브를 안았고 스티브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것 같은 심정으로 토니의 배위에서 몸을 흔들었다. 고통이 앞서서 전신을 휘감았다. 스티브는 잇사이를 누르며 고통을 받아들였다. 행위가 적어도 토니에게는 기분좋았으면 했다. 토니의 신음은 젖어 있었고 그것이 스티브를 간신히 안심시켰다. 스티브는 자신이 떨구고 있는 중심부에서의 핏줄기를 손으로 훑어 바라보다가, 곧 그 진한색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단지 어지럽게 엉키는 남자의 신음 사이사이에 간신히 흘러들어가, 토니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 토니. 내가 알기로, 토니 스타크는, 망가진 것을 다시 고치는 것이 일인 사람이었어. 자넨 엔지니어잖아. " 힘없이 웃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신음에 먹혀들어갔고, 토니는 스티브의 등을 안으며 그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스티브의 뜨거운 몸이 송두리째 토니에게로 녹아오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반대였던가. 토니는 이대로 끌어안은 스티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평생 스티브 로저스와 함께 무너져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무너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뜨니 스티브 로저스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될거라고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토니는 가슴이 그 어떤 소리도 내지않는구나하고 생각했다. 헐벗은 몸위에 놓인 담요를 아무렇게나 던지며, 토니는 머리를 감쌌다. 병들이 굴러다니는 카펫위에 종이가 있는 것을 그때서야 발견하고, 토니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스티브가 남기고간 종이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아주 작은 아이언맨 모양의 피규어.
스티브의 성격이 나타나는 바른 문자들이 의미를 가진 문자로 이해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어벤저스를 탈퇴한다는 그 글자를 바라보며
토니는 조금 웃었다.
" 복수하는 거냐. "
웃음이 자꾸 나와서, 나오는 대로 흘러보냈더니
그제야 속이 완전히 텅 비어버려서
토니 스타크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 하지만, 자비스. 그렇잖아. 난 평생을 다해서 하워드 스타크를 부정해왔어. 왜냐하면 그가 나를 부정하였기 때문이야. 그가 뿌린대로 거두게 하지 않으면, 내삶이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어. 그가 원하는 길에 내가 서 있는 것도 용납할 수 없고. 난 하워드를 내 인생에서 완전히 밀어내버릴거야. 평생. 그렇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그리고 하워드를 완전히 몰아내려면, 하워드가 사랑하던 것을 완전히 몰아내는 수 밖에. 그렇잖아. 자비스. 내말이 틀려? 정말로 그렇잖아. "
" 하지만 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어.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
" 그를 사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나는 하워드 스타크를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는 것이 멈춰지지는 않았어. 스티브를 사랑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
" 그래서 나는, 정말로 혐오스러웠어. 그를 사랑하는 내가 혐오스러웠어. 그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 미웠어. "
"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어. "
그마음이, 주인님.
그를 평생 만날 수 없다는 현재의 사실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 "
" ...... "
" 모르겠어. "
토니는 들고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 나도 모르겠어. 자비스. "
어벤저스의 내실이 어떻게 됐든간에 세상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히어로연맹은 전과 다름없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종횡무진 바빠보였고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코팅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히어로들에게 예전과 다름없는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히어로들이 대거 나타날만큼의 엄청난 빌런은 맨하탄의 그사건 이후로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어떤 사건들로 인해 유명한 그 히어로를 만날 수는 있었지만 유명한 그 히어로'들'을 만나지는 못하였다. 사건은 히어로 한 명으로 해결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했다. 어쨌든 세상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그래서 평화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비교적 평화로운 매일은, 조용히 지속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 몇 달 정도가.
그 십 몇 달 동안 캡틴 아메리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쉴드에 새로생긴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커맨더 스티브 로저스를 사령관으로 한 특공부대는 쉴드의 그 어떤 부대보다 가장 작전 성공률이 높은 부대로 거듭났다. 짧은시간에 스티브가 이룩해낸 일에 놀라하는 사람은 물론 쉴드내에 아무도 없었다. 어벤저들은 각자 만나고싶을 때 그를 찾아가곤 했다. 어벤저들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거니, 추측했지만 입밖으로 내뱉지않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캡을 사랑하는 것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그들은 쉽게 커맨더 스티브 로저스를 받아들였다. '캡틴'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에만 작은 아쉬움을 표할뿐으로.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므로 스티브 로저스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말하자면 스티브는 직업이 다소 은밀할뿐인 평범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거리에 흘러가는 수많은 그 중에 평범한 그 하나가 되었다. 그 말은 즉, 만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토니 스타크와 만날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토니쪽에서도 스티브를 볼 만약의 경우도 없고. 스티브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쉴드라는 아주 작은 접점이 남았지만 그정도는 괜찮았다. 쉴드는 은밀한 작전을 행하니까 원한다면 아메리카를 완전히 떠날 수도 있고, 아이언맨이나 어벤저스와 얽히지 않는 일만을 받으면 되는거니까.
그래.
모든 것이 스티브가 생각하기에 완벽한 십 몇 달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물론 스티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알다시피 세상일이 그렇게 되는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도.
스티브는 토니가 보고싶었다.
보고싶다고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단어안에 머물지 못하고 뛰쳐나가곤 했다.
그럴때마다 스티브는 그냥 마음이 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지치면, 다시 돌아오도록.
토니 스타크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비스를 시켜서 타놓은 진한 커피가 완전히 식어 있었다. 화면은 중동의 어느지역의 내전을 비추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토니가 독단으로 그 지역의 인공위성을 해킹하여 받아보는 것으로, 말하자면 토니 개인을 위한 실시간 중계영상이었다. 한창 내전이 일어나는 그곳에서의. 물론 가벼운 범위의 오차는 존재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아마 한, 4분? 3분 40초정도? 그리고 가끔 버퍼링이 일어났고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것만 빼면 화면의 대부분의 식별이 가능하고, 소리도 선명했다. 저건 붉은끼가 섞인 모래, 그리고 저것은 지프, 저것은 지프에 실린 구식 대포따위들, 그리고 저것은 총이었다. 그리고 그 지프의 주인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파견된 쉴드의 부대였고, 지프뒤에 서서 그들을 지휘하는 것이 바로 스티브 로저스였다.
토니는 눈을 반짝였다.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 위로 주로 파란색으로 번져가는 화면의 영상이 스쳐갔다.
손을 뻗어 화면을 최대한으로 키우니 픽셀이 조금깨져, 방금까지 선명했던 스티브의 앞머리칼의 금색이 주변에 뒤섞여 거의 구분이 가지 않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스티브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얼굴에 깜장이 묻고, 머리에는 멋없는 보호대를 뒤집어쓰고, 그 왼손에는 색이 선명한 방패대신에 다소 오래된 총이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은 무언가 쉴새없이 내려야하는 작전지시가 있는건지 연신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과 상처가 난 입술언저리같은 것도 잘 보였다. 그리고 다소 마른 육체, 그 위에 일어나는 모래바람, 그리고 드디어 쉴드의 부대가 한꺼번에 스티브의 오른손의 움직임을 따라 총을 가슴에 당긴 채 내전 한가운데로 달려나갔다.
어지러운 총소리는
지프가 굴러감과 동시에 일어나는 모래바람과 함께
화면밖의 토니 스타크의 얼굴을 강타했다.
화면속의 스티브 로저스가 고개를 돌렸다.
피해!!!!!!!!
토니가 화면을 향해 외치자, 스티브가 꼭 그소리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다시 한 번 움직였는데,
아아
아마 그 모든 것은 화면밖에 있는 나의 착각이겠지.
화면에 완전한 모래바람이 일어 카메라가 무엇을 찍는지도 모르고 헷갈려하는 듯이 화면이 부옇게 일어나는 순간
토니는 화면이 또다시 버벅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울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눈물이 있는 이유를 알았다.
토니는 두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손바닥을 지나 줄줄 떨어져
동그랗게 퍼졌다.
" ...자비스. "
Yes, sir.
" 촬영을 준비해줘. 아니, 화면은 필요없어. 그저 내 목소리 하나만 녹음해주면 돼... 그리고 그걸, 지구의 대체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도 되지않는 그사람에게 건넬 방법을 생각해줘. "
Yes, sir.
" 자비스. 네가 옳았어. "
이제 모두 알았어.
내 마음, 그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어.
" 그를 보고싶다는 이 마음 앞에서는. "
그를 사랑해.
그가 보고싶어.
이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또 흘러 넘쳤다.
마음이 이렇게 간절할때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를 알 수가 없어서, 토니는 모든 것에 너무 안절부절하였다.
그리고 몇번을 버벅이고 나서야 간신히 목소리를 녹음했다. 자기가 들어도 참으로 한심한 목소리였다.
" ...스티브, 제발 부탁이니 이제 그만... 돌아와줘. ...네가 없는 난 아무것도 아니야... "
자기가 들어도 참으로 한심한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간절한
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너에게 들려줄테니,
제발, 나를 용서하고
처음으로 돌려줘.
내가 망가진 것을 다시 고칠 수 있게 기회를 줘.
제발.
스티브.
나의 스티브.
- done
+ 결말이 약간 아쉽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토니가 녹음한 내용을 스티브가 확인하면서 끝나는 게 더 좋았을걸 싶다. 토니가 그만 돌아오라고 하는 말 들으면서 질질짜는 스티브.. 아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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