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잠에서 깨어 상체를 일으키니,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 익숙한 나른함의 이유를 토니 스타크는 그간의 행실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입안이 달작지근해지고 치아의 뒷면이 꺼끌꺼끌해지고. 영락없는 섹스하고 난 다음의 피곤함이 아닌가. 사실 토니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토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긴 한숨을 내쉬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제 대체 누구와 하룻밤을 보냈던 것인지를.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토니는 어젯밤 안았던 여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또 그 증상인 것이다. 몽유병. 토니는 우주의 어마한 외계인과의 조우이후 걸렸던 몽유병이 다시 도진 것을 예감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파워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이계의 존재가 지구를 노리고 언젠가 이곳으로 쳐들어올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던 토니 스타크의 공포가 어느순간 도를 넘었을 때에, 그의 몽유병이 시작되었다. 토니 스타크는 스스로가 자고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자고 있는 것은 의식뿐 토니 스타크의 육체는 벌떡 서서 깨어있는 것 마냥 움직였다. 놀라운 것은 토니 스타크의 육체는 정말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마냥 움직였다는 것이다. 단지 정처없이 여기저기를 걸어다니거나 한 것이 다가 아니었다. 토니는 차시동을 켜고 어딘가로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으며 그러다 낯선곳에서 만난 누군가와 함께 자기도 하였다. 기억에도 없는 섹스를 둘하고도 셋하고도 즐긴 것이다. 다음날 토니에게는 물론 지난밤의 기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고 단지 몸의 피로를 호소하며,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흐느껴야했다. 자신이 몽유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낯선 여자의 좁은 침대위에서 눈을 떴던 바로 그 날 부터였다. 그 후 그 정신병을 극복해내기 위해 자신의 주치의와 함께 했던 수많은 치료는, 그것은 그야말로 치료였지만, 토니는 그것들이 꼭 앞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수치같이 느껴졌다.
그 수치와 같은 병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토니는 스스로에게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무슨 계기로 다시 그 병이 도졌는지는, 굳이 의사에게 상담받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소코비아에서 있었던 일은 토니 스타크에게도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같은 일을 겪었고, 비슷하게 상처를 받았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텐데, 이런 꼴사나운 병을 그것도 재발까지 하게 만들정도로 약한 인간은 그중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토니는 마른 목을 물로 축였다. 자신의 멘탈이 이렇게 약해빠졌다는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충분히 의기소침해져 있건만. 토니는 지친 몸을 이끌며 넓은 방의 커다란 거울이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토니가 샤워실로 발을 들이밀자 샤워실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토니는 눈앞이 환해져 일순 부신 눈을 깜빡이며 샤워실 벽면의 커다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속엔 그야말로 지쳐보이는 토니 스타크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전부 벗고 있고 그저 팬티 한 장을 겨우 입고있는 그 지친 늙은 남자는, 어젯밤 어떻게 자기집의 자기방의 자기침대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저 가엾은 사람으로, 도저히 세계에 손꼽히는 부자, 둘없는 히어로로 칭송받는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토니는 오른손바닥을 거울에 대고 거울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멍청이가." 손바닥을 타고 거울의 차가움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토니는 거울속 자신의 이마를 겨냥해 그곳에 자신의 이마를 툭하고 갖다대었다. 어딘가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이마 안쪽의 열기에도, 거울의 차가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럴 여유가 없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병따위에 휘둘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앞으로도 너무나 할 일이 많다. 이때까지 달려온 것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토니는 모두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토니 스타크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소코비아의 땅에 박혀있는 자신의 이름자가 새겨진 망할 지뢰들도 전부 없애버리고 싶었고, 자신의 재산이 감당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소코비아 재해대책위원회에 돈을 쏟아붓고 싶었다. 어벤저스 본부에도 토니 스타크로써 해야 할 일이 까마득하게 남아 있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에도 마찬가지였다. 히어로로써는 또 어떤가? 정부가, 세계가, 또한 개인이, 모두가 아이언맨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그 모든 부름에 전부 답하고 싶었다. 아이언맨이 열명이라면, 아이언맨이 백 명이라면. 그런 마음으로 아이언맨을 대량 생산하고 있는데, 역시 그걸로는 부족한 걸까. 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하고싶은일도 깔리고 넘쳐있다. 한가한 병에 휘둘릴 시간이 없어. 토니는 거울속의 자기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울에 대고 이마를 툭툭 들이박았다. 방금 자기가 곱씹은 말을 자기 머릿속에 주입시키고 싶은 듯 했다. 토니는 선반속에 넣어둔 자신의 진통제, 각성제, 등을 꺼내어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고 수도꼭지의 물을 틀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입에 머금은 물과 함께 모든 약들을 씹어삼켰다. 혀끝에선 알싸한 약의 냄새가 독하게 퍼졌다.
알약은 모두 같은 흰색을 띄고 있으며, 모두 같은 크기였다.
토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차가운 물에 샤워해서 머리가 맑아지기를 기대했다.
어젯밤 나와 함께 밤을 보낸 어딘가의 운좋은 어떤 아가씨는, 다시 나를 찾아오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기를. 부디 자기가 지난밤 토니 스타크와 즐거운 밤을 함께 보냈다고 자기의 친구들에게 떠들어대지 않는 사람이었기를. 가십지에 토니 스타크의 대물의 모양이나 색에 대해서 떠들지 않는 사람이었기를.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나와의 하룻밤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주기를.
"정작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야." 그렇게 중얼이고, 토니는 욕조에 들어가 서서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굵은 샤워줄기가 토니의 두피를 쿡쿡 찔러대며 어깨아래로 흘러내렸다. 토니는 멍하니 자신의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물길을 바라보다 허리를 주먹으로 톡톡쳤다. 허리가 뻐근했다. 어젯밤의 아가씨는 격렬한 사람이었나 보다. 토니는 그것 하나만을 겨우 알았다.
아래의 홀로 내려가기 전에 이미 토니는 스티브 로저스가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아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벤저스 본부에 늘 똑같은 시간에 들르면, 늘 똑같은 시간에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으로 휴식을 취하는 스티브를 볼 수 있었다. 토니는 스티브가 매일 같은 시간에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눈치챈 후로 일부러 자기도 그 시간대를 골라 본부에 오곤 했다. 어벤저스 본부에 용건이 생긴다면 말이다. 사실 토니는 될 수 있으면 본부에는 오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뉴어벤저스들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고, 이미 쉴드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쉴드인 사람들이 모여있으며, 토니의 상처와 토니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후벼판 장본인이 있었다. 토니는 그녀를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큰 잘못이 없으며 이 두려움은 단지 스스로가 만들어낸 두려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더더군다나, 이 약한 멘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는 병을 재발시키고 말았지않은가. 이 엉망인 토니 스타크를 아무에게도 들킬 순 없지. 쉴드요원들에겐 더더욱. 토니는 어벤저스 본부를 멀리하며, 용건은 가능하면 팩스로 받고싶었다.
하지만 토니는 그래도 이주에 한 번씩은 꼭 이곳에 다시 들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스티브 로저스를 보면 늘 토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꿈 속에서 죽어있는 그의 시체를 떠올리게 되는 날은 더욱 그랬다. 살아있는 스티브의 한결같음을 재확인할 때마다 토니는 가슴속이 따뜻해졌고, 그것은 토니가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다른 이유는 거의 없었지만, 그 사실을 스티브가 알게 된다면 혀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어지겠지. 그래서 토니는 매번 필사적으로 스티브를 만나고싶어했던 자기자신을 숨기곤 했다. 사실 토니는, 자신이 너무나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티브에게 제일 들키고 싶지 않아하고 있기도 했다. 그에게 너무나 약한 자기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와 대등하게 서 있고 싶으니까. 그의 앞에서 쪽팔리고 싶지가 않으니까.
"토니! 어서오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해주는 저 스티브 로저스의 미소만 있으면, 모든 것이 아무렴 어떠냐같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낯선 자신을 늘 어색해하며, 저도모르게 피식 웃곤 했다. "그래. 나왔어." 그리고 스티브를 향해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면서, 토니는 스티브의 환한 미소에 이끌려 또한 미소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꼭 스티브의 그것처럼 부드럽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끈거리던 편두통도 어느새 가셨다. 입안의 텁텁함도 해결됐어. 단지 아직 노곤함이 몸에 남아있는 것을 스티브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눈아래까지 내려온 다크서클도. 어젯밤의 격한 정사에 아직도 허리가 다 뻐근한 것도.
"왠일인가. 오늘 온단 소릴 못들었는데."
"아, 다음주에 올 예정이었는데 급히 온 거야.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부탁한 시스템 버그 처리도 다했거든."
"바쁜데 괜히 또 일을 더한 거 아닌가 모르겠군. 면목이 없네." "일을 더 한 거따윈 없어. 캡도 참. 이게 바로 내 일이라구." 그렇게 말하며 토니는 평소처럼 스티브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스티브의 면목없어하는 얼굴위로 살풋 미소가 다시 번졌다. 그래, 토니는 바로 그 미소를 보러 온 거였다. 그러니까 많이 좀 보여줘. 스티브. 토니는 스티브를 자기것으로 만들고 싶었더랬다. 그의 환한 미소에 고통이 사그러드는 것처럼 느껴진 그 순간부터 그랬더랬다. 하지만 이제와 토니는 스티브 보고 내 것이 되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토니의 스티브를 향한 소유욕은 그가 죽는 환상을 꾼 다음부터 완전히 사그러들었다. 토니는 이제 스티브가 자기의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살아있으며 그것으로 족했다. 그가 모두에게 보여주는 웃음을 똑같이 자신에게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토니는 순간
자기 옆에서 웃으며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스티브 로저스의 목덜미에서, 아주 진한 키스마크를 보았을 때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무슨 말을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토니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스티브와 평소처럼 대화를 진행했다. 이제 스티브는 21세기에 완전히 적응한 사람이고 예전만큼 놀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언제나 있는 의견차가 더욱 토니를 즐겁게 했다. 토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냥 물처럼 흘려보낸 스티브의 키스마크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괜히 눈앞에 어른거렸고, 토니는 그 어른거림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고 말았다. "? 뭐가 웃긴가?" 스티브의 말에 토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냥." 하고 대강 답했다. 옷깃에 금세 가려져버린 스티브의 목덜미의 진하고 붉은 키스마크는 스티브의 상대의 집요함을 느끼게했다. 어지간히 살을 물어 입안에 머금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진하게 남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토니는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스티브의 상대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 집착하게 될 것이다. 눈앞의 상대라면 누구든 불안하고 걱정되고, 분명 이사람을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어딜 가도 있을거야 하며 손톱을 물어뜯겠지.
필사적으로 스티브의 목덜미를 빨아대며, 이남자는 내거라는 표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을.
너는 내거라고.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의미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토니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토니. 자네 정말 괜찮은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침체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일까. 스티브, 네가 날 걱정해주는 게 너무 좋은나머지. 누구보다도 나를 걱정해주었으면 해서. 인간이란 어째서 이렇게 제멋대로인건지. 어째서 이렇게 제멋대로인건지... 토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젓고 이만 돌아가보겠다고 말했다. 스티브가 걱정하지 않도록 제대로 그를 향해 웃었겠거니 생각하며, 토니는 사십년동안 단련된 익숙한 포커페이스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웃고 있었다. 어딘가 조금 슬퍼보이는 그 파란 눈.
"자비스. 어젯밤의 현관 CCTV를 켜줘." 자비스는 그리고 주인이 시키는대로 CCTV의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토니는 4배속의 속도로 CCTV 영상을 지켜보았다. 영상 속의 토니 스타크는 평소와 다름없이 멀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포츠카 하나를 골라 타서는 그대로 나갔다가, 네시간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방으로 돌아와 옷을 전부 벗고 팬티차림인 채로 다시 잠든거겠지. 토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비스. 어제 내가 타고나간 차의 블랙박스를 확인해줘. 혹시 내비게이션을 사용했다면 도착지도." 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자비스는 토니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사용한 흔적이 없고, 블랙박스는 그 시간대만 지워져 있었다. 토니는 어이가 없어 침묵했다. 자비스가 허공에서 지워진 부분을 서치하여 복구할까요? 하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토니는 그럴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럴 필요 없다. 다행히 오늘 하루, 지난밤 토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주장하는 여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조용히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토니로써는 어떤 희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룻밤의 여자를 찾지않아도 된다는 희망말이다. 토니는 앞으로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리고 최선을 다해 병을 극복해야지. 병을 극복하는 방법이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두번째니까. 자신의 끝없는 공포를 이겨내면 되는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 너의 죽음을 보는 것.
꿈속에서.
그것보다 더 최악은 뭔지알아? 너의 죽음이 나때문에 야기된다는 사실이야. 나에겐 어떤 예감이 있고, 그 예감은 꼭 진짜처럼 날 섬뜩하게 해. 넌 이런 비참함을 모를 거야. 내가 너의 목을 두손으로 조르고 있는 것 같은 이 괴로움을 전혀. 억울해. 다행이야. 네가 알아줬음 좋겠어. 네가 고통스럽지 않아 너무나 기뻐. 토니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쿡하고 웃었다. 몽유병에 시달리는 몸은 사실상 하루에 4시간도 채 자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토니는 이제 너무 지쳐버리고 말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축 늘어졌다. 토니는 임시대책으로 꺼낸 수면제를 두 알 입에 털어넣고 물을 꿀꺽 마셨다. 수면제는 아침에 씹어먹은 약과 또 같은 맛이 났다. 토니는 오른손가락으로 혀끝에 남은 약기운을 떼내려는 것처럼 혀위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토니는 자신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걸어가다 문득 생각했다. 수면제를 먹는 것에 좋은점이 그러고보니 하나 있네. 오늘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푹 잠들고야 말테니까, 나는 드디어 꿈 속에서 널 죽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스티브.
스티브.
너의 아름다운 상대가 너의 잠의 안식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아닌 거에 대한 질투도, 초조함도, 모두 네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래. 내가 언제나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야. 토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한동안은 눈속에서 빛이 점멸해서, 토니는 조금도 어둠지 않았지만, 곧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모든 빛은 사라져버리고 토니는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토니 스타크는 어젯밤과 마찬가지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자비스가 허공에서 토니 스타크를 몇번이나 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토니 스타크는 익숙한 길을 익숙한 속도로 달렸다.
눈은 떴지만 거의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않았고, 사실은 도로위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았다.
문득 길 어딘가에 도착하니 어둠속에서 서서히 더 이상 어둠 아닌 것이 번지더니, 그 끝에 오토바이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던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다.
그는 밤에도 슬프게 빛나는 선명한 푸른 눈동자로 토니 스타크를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 무의식상태로 운전하는 건 너무나 위험하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는데."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로저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어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싶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꼭 토니 스타크의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이 서둘러 바이크에서 내려와 토니 스타크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토니 스타크는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뻗어 스티브 로저스의 목을 꽈악 끌어안았다.
스티브는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어젯밤 자기가 남긴 자국을 찾으려는 듯 스티브의 목줄기 위의 어딘가를 더듬다가 다시 한 번 그곳을 깨물고 또한 깊게 살을 빨았다. "...으," 스티브의 억누른 신음이 그의 심장을 달구었고 그는 어젯밤처럼 또 스티브의 셔츠를 양옆으로 찢었다. 스티브는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그의 어깨를 꽈악 껴안았다.
"토니." 스티브의 절박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달렸고, 토니의 절박한 두 손이 스티브의 양 허벅지를 움켜쥔고 위로 든 순간, 아주 그 순간 잠시동안만, 스티브의 두 눈동자위에 두려움이 스쳐지났다. 스티브는 이미 아는 것이다. 지금부터 자신이 느껴야 할 그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물감을. 참고있는 동안 어느샌가 서서히 쾌감으로 변할 그 고통을.
스티브는 토니의 몸을 꽈악 껴안았다. 스티브는 이제 늘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자기가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되기를. 꼭 그래주기를. 이번이 두번째라고 토니는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벌써 여섯번째로 발발한 토니 스타크의 몽유병은, 온통 스티브 로저스 뿐이었다. 토니의 무의식이 온통 살아있는 스티브 로저스를 그저 찾아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는 처음부터 스티브를 찾아왔고, 스티브는 처음부터 토니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어벤저스 본부에서 토니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방문을 숨긴 것은 그때문이었다. 토니는 분명 모두에게 자신의 이런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할 것 같아서.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에게 숨긴 것이다. 자기자신이 사실은 모든 걸 알고있다는 것까지. 통제되지 않는 힘으로 안으려드는 토니에게 아무 반항도 하지않고 그의 몸을 마주 끌어안은 후, 스티브는 이미 잠긴 눈을 하고 혼자 스포츠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뒤를 호위하듯 쫓으며 바이크를 몰았다. 엉덩이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스티브에겐 그런 것은 아무상관도 없었다. 토니가 무사히 자기집에 들어가는 것에만 스티브는 집중하고 있었다. 그 뒤도 모든 게 마찬가지였다. 스티브는 토니가 먼 곳까지 무의식상태로 차를 모는 것을 원치않았기 때문에 세번째부터는 일부러 먼저 길목에 나와 기다렸다. 네번째쯔음부터, 스티브는 토니가 몽유병을 앓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고, 스티브는
이제 늘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자기가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되기를. 꼭 그래주기를.
"토니, 토니..." 토니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면서, 스티브는 이 뜨거운 섹스 중에 토니가 제정신을 차리기 바랬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티브 로저스란 사람이 토니 스타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스티브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스티브는 토니를 위해 좀 더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 더 둘에게 좋아질 일을. 왜냐면 토니에게 스티브가 그러하듯, 스티브에게도 토니가 사실은 그러했기에. 하지만 스티브는 자신이 토니에게 있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고, 그렇기에 스티브는 자신이 토니를 구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저 위로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고.
밤은 차가웠다.
토니 스타크의 몸은 뜨거웠고.
스티브 로저스의 발끝은 불이 붙은 듯 했다.
밤은 꼭 영원할 것처럼 이어지지만, 사실은 금방 끝날 것이었다. 스티브는 고통스러웠고, 그러나 토니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음날 정처없이 깨어난 토니는 지난밤의 자신이 불투명해 또 금방 고통스러워질 것이었다. 스티브의 목덜미에 자국을 남긴 상대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질투로 한층 무릎이 꺾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둘 중, 그 누구도 이 고통을 깨부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지금, 서로 끌어안은 체온.
그저 그것이 다였다.
지금 이순간.
- done
쌍방 짝사랑. 덤으로 쌍방 다 연약한 사람이라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느낌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인데 서로가 조금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니 비극이네요. 누가 둘을 구해줬으면. (무책임
ㅋㅋㅋ 약 두시간 정도 걸렸어요.
'marvel > 토니스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니스팁] END and BEGIN 16. 01. 15 (0) | 2016.01.15 |
---|---|
[토니스팁] 토니 스타크의 유죄 15. 11. 12 (0) | 2015.11.12 |
[토니스팁] 악몽 후에 15.10.25 (2) | 2015.10.25 |
[토니스팁] Every single day 15. 09. 26 (2) | 2015.09.26 |
[토니스팁] 아름다운 당신 15. 09. 06 (2) | 201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