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and BEGIN

 



 오랜만에 오셨군요. 그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스티브는 그의 두 눈동자속에서 자신을 향해 빛나는 경애와 감탄을 읽을 수 있었다. 스티브는 겨우 두 번, 그것도 화상통화로만 만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는 그 젊은이가 자신을 존경어린 눈으로 쳐다볼때마다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결국 계면쩍인 웃음을 흘리고 만다. 마스크를 하지 않은 스티브 로저스를 여전히 캡틴 아메리카로 대하는 그가 스티브는 너무나 어색했다. 캡틴 아메리카를 은퇴하고 대체 몇년이 흘렀는데, 쉴드는 여전히 1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를 기억하는 것이다. 스티브는 무겁게 웃는 낯으로 손을 뻗어 젊은이와의 인사를 시도했다. 1대 캡틴 아메리카의 연락책담당인 젊은이는 반색하며 스티브의 손을 꽈악 움켜잡았다. 주름이 가득하고 손톱끝이 갈라져있는 연약한 늙은이의 손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는 시간조차 풍파시킬 수 없는 어떠한 강한 힘을 마주잡은 손바닥에서 느끼고 있었다. 부드러운 강함과, 믿을 수 없을만큼의 따스함, 그리고 이 깊은 주름들. 젊은이의 머릿속에서는 무척이나 빠르게, 이백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망하지 않고 살아있는 전설의 슈퍼솔저 캡틴 아메리카의 연락책으로 자신이 결정되었을 때의 그 기쁨과 벅참과 황홀경으로 가득했던 그날의 추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한 번도 만나주지않았고, 그저 흐릿한 구식 화상통화로만 대화하는 게 전부였었지. 그것도 두 번. 설마 스티브 로저스가 직접 쉴드 본부에까지 와주는 날이 올거라곤 생각조차 못했었다.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를 은퇴한 날이 언제였는지, 그 후 스티브가 쉴드본부를 찾아주지않고 몇천일이 흘러는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젊은이가 스티브 로저스를 앞에두고 저도모르게 오랜만에 오셨군요, 하고 감탄한 것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1대의 영웅들은 대부분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고, 캡틴 아메리카만이 살아있을 때 캡틴 아메리카를 은퇴하던 날, 많은 이들이 스티브가 캡틴자리를 은퇴하는 것을 비밀에 부쳐야한다고 했었다. 혹자는 은퇴를 해선 안된다고 몰아부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에는 20대의 젊은혈기 그자체였던 스티브 로저스가 얼음에 냉동되고, 그리고 70년 후 다시 부활하고, 그가 또다른 영웅들고가 함께 활약했던 황금기가 겨우 20년 남짓이었다. 그 뒤 흩어진 영웅은 각자의 삶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투쟁을 치르다가 하나 둘 자신의 삶을 마무리했는데, 그중에서도 스티브만이 여전히 늙지않은 냉동전의 스티브 로저스의 모습 그대로였다. 슈퍼솔저의 혈쳥은 불로불사의 비밀까지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논란이 시작되었고, 스티브의 피를 얻으려고 반란아닌 반란이 일어났던 그 후의 3년간은 스티브에게도 스티브를 지키기 위해 늘 그의 곁에 머물러 있던 토니 스타크에게도 지옥같은 나날이었다. 그리고 발병 후 천천히 조금씩 죽어가던 토니 스타크의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이 아주 조금 이어졌다. 스티브 로저스가 그 후 캡틴 아메리카를 은퇴하겠다고 말한 것도 그러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다. 많은 이들이 그가 캡틴 아메리카로써의 삶에 넌더리를 내는 것도 어쩔 수 없는거라 여겼다. 하지만 스티브는 캡틴의 삶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그저, 스티브 로저스의 삶이 너무 길었고, 그 너무 긴 것 앞에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진 것일 뿐이었다. 스티브는 그저 말을 잃었고 그래서 이제 그만 혼자가 되고싶었다. 너무 긴 그의 삶을 함께 감당할 막역한 사람들은 모두 시간의 길 위에서 사라져버리고, 스티브만이 혼자남아 앞으로를 걸어가야한다면 더욱 혼자가 되고싶다, 스티브는 단지 그렇게 생각햇다. 세계는 거부했지만, 곧 캡틴 아메리카의 은퇴는 정식으로 이어졌고, 2대 캡틴에게 자신의 마스크를 건네준 후로 스티브 로저스는 세계에서 사라졌다. 스티브 로저스의 노화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드디어 늙는구나. 나도 늙어. 이 얼굴의 깊게 패인 주름 하나하나에, 드디어 죽음이 하나하나 어리기 시작하는 거다. 매일 아침 거울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거울 속의 늙은 자신을 바라볼때마다 묘하게 웃음이 났더랬다. 거울속의 자신은 병실에 누워있던 페기의 얼굴을, 아이언맨 마스크를 들어올리던 토니 스타크의 마지막모습을 참으로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까마득한 기억속의... 아주 오래전의... 어머니의 얼굴또한 떠올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도. 거울속의 스티브는 그들 모두의 마지막 모습과 닮아있었고, 또 아무도 닮지않은 그저 평범한 늙은이처럼도 보였다. 한동안 후계양성훈련을 위해 쉴드에 다니던 스티브였지만 점점 진행되는 노화를 핑계로 더 이상 쉴드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쉴드는 여전히 살아있는 이 스티브 로저스와의 접점을 놓지않으려고 매시기때마다 한명의 요원을 스티브에게 붙여주었다. 스티브는 그와의 짧은 화상통화마저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다였다.


 조금씩 늙어가면서, 스티브는 드디어 약 삼십년 가까이 평범한 삶을 즐겼다. 그것은 스티브가 살면서 한 번도 바래본 적 없었던 고요함이었다. 그 고요함은 그래서 도리어 시끄럽게 느껴졌다. 시골집에 살며 늘 아침청소를 하고 산책을 하고, 가까운 강의 벤치에 앉아 읽어보지못했던 수많은 책을 읽고, 그림도 그렸다. 점점 얼굴에 주름이 진해지고 피부가 늘어지는 것을 거울로 살피면서, 스티브는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거울을 보며 보내고 있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루동안 제일 긴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트레이닝이었다. 그것은 오랜시간 들인 습관이라 고쳐지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때로 가을의 바람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니와 나눴던 대화들을 회상했다. "내 늙은 모습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봐. 하워드 스타크말이야. 그리고 난 그게 정말 끔찍해." 토니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스티브는 웃었다. "자네가 그것을 끔찍하게 여기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스티브의 말에 토니도 웃었다.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은 늙지않고 토니 혼자 늙어가는 것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난 이제 이렇게 늙었는데, 캡시클 넌 어째서 조금도 늙지않는 거야?" 토니. 지금의 내 모습을 자네가 볼 수 있다면. "그러게 말야. 나도 잘 모르겠네. 어쩌면 난 죽음조차 받아주지 않는 운명일지도." 스티브는 과거를 회상하며 웃었다. 그때, 토니가 부정해줘서 참 좋았었는데.


 "죽음이 안받아주면 좀 어때. 당신은 내가 받아줄건데."


 토니.

 바람 속에 자네의 목소리가 실려있다네.


 그래서 대지위에 바람이 부는 한, 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자네의 목소리를 잃지않아. 잊어버리지도 않지. 지금의 나를 자네가 볼 수 있다면.


 예감은 알 수 없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동반하며 찾아왔다. 스티브는 자신의 가슴속에 가득히 차오른 그 예감에 어떠한 형태도 어떠한 단어도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는 예감을 깨닫게하는 어떤 단어를 자신이 기억하기 전에 재빨리 차려입고 전화를 걸어 오늘 쉴드에 가겠다고 말했다. 스티브 로저스를 담당하는 쉴드요원인 젊은이는 스티브에게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무인차량을 보냈다. 아이언맨의 최고속도에 조금 못미치는 23세기의 발명품에 오르는 것에 다소 버벅이며, 스티브는 21세기의 신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벅이던 자신을 놀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듯했던 토니를 떠올렸다. 한 번 그를 떠올리니 모든 사소로운 것들까지 전부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그동안 토니를 떠올리면 그가 고통스러워했던 그의 투병의 나날이 떠올라서 그를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었는데. 스티브는 웃었다. 토니가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고통의 기간조차, 떠올리면 미소가 흘렀다. 그 모든 것이 스티브의 기억속의 토니인 것이다. 이미 마중나와 스티브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의 손바닥은 긴장으로 미지근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긴장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쩐일이신지..." 스티브는 웃었다. "헌혈을 하려고." 쉴드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피를 남겨, 그들의 연구를 돕게하려고. 그리고 스티브는 국립묘지에 갈 것이었다. 그곳에는 토니가 잠들어 있다.


 



 겨우 450g의 피를 남기는 것. 그것이 너무나 긴 스티브 로저스의 삶에 남은 마지막 의무라고, 스티브는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그 별 것없는 피조차 세계에는 필요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스티브는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드디어 길었던, 너무나 길었던 스티브 로저스의 삶이 끝나는 것이다.






 스티브는 토니의 비석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비석의 옆에 앉았다. "이 비석은 자네와는 참 많이 다르군. 너무 차가워." 스티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토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스티브는 토니 스타크의 고백을 받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와 키스한 적 조차 없었다.

 

 "어째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거야? 스티브. 내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남자는 사랑할 수 없어서?"


 "전자때문이라면, 네가 날 믿을 수있을만큼 노력할게. 후자때문이라면, 네가 날 믿을 수 있을만큼 노력하겠어. 어때?"


 토니의 많은 말에 스티브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토니의 진심을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였다. 그리고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토니보다 오히려 더 스티브를 싫어하게 될 것만 같은 스티브를 껴안으며, 토니는 단지 스티브만을 다독였다. 그 한없이 작고 겁쟁이가 되어버린 스티브를.


 "좋아. 알았어. 넌 처음만났을 때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고, 나만 자꾸 늙어가고 있어. 넌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난 늙어버리고 한물 가버리고 말았지. 스티브, 당신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것이겠지? 넌 죽음조차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네가 스티브 로저스이듯 나도 여전히 토니 스타크야. 그리고 내가 늙어도 너를 향한 내 마음만은 여전히 푸르르지. 멋지지? 셰익스피어적 표현이야. 웃지마, 이사람아. 진심이니까. 넌 늙지않고, 그러니까 넌 죽음과도 멀리 있겠지. 난 늙었고 나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가까워. 하지만, 스티브, 나를 믿어. 난 앞으로 60년을 더 살아보이겠어. 물론 네옆에서. 죽지않는 당신과 함께 있음으로써 당신의 삶을 혼자로 만들지 않아주겠어.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60년 동안은 절대 혼자가 될 수 없지. 그리고 그 60년동안의 내 삶은 당신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셈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를 믿을 수 있겠지, 안그래?"


 "걱정 마. 겨우 60년일 뿐이야."


 "그리고 60년이 지나면, 그 뒤에도 여전히 이어질 당신의 삶을 위해, 우리 또 새로운 약속을 하자. 믿음과 관련된. 그것이 당신의 60년 뒤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말야.


 "그리고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그렇게 말하고 채 4년조차 채우지 못했다. 생명호흡기 너머로 아주 가느다래진 숨을 겨우 토해내며 스티브의 손을 움켜잡고, 토니는 눈동자 하나 흔들지 않고 스티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 간절한 눈동자. 깊고 진한 눈. 인간의 모든 감정이 새겨져있는 너의 보석같은. 너는 그 모든 것을 꼭 나에게 주려고 하는 듯 했지. 토니, 네가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그리고, 나는 죽어가고 있어 토니."


 드디어.

 드디어 죽음이 내려와.


 정말 길었다. 정말 길었다. 이 삶이 너무나도 길어.

 하지만 나는 충실히 기다렸다. 간절히 바라지도, 어서오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이 긴시간을 담담이 흘러보내며, 그저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겠지.


 "그러니까 이제, 토니. 너와 키스해도 괜찮은거지?" 스티브는 미소가 지어진 입술을 내밀어 토니의 비석에 키스했다. 입술에 닿은 비석은 너무나 차가웠고, 스티브의 입술엔 조금씩 색이 사라져갔다. 스티브는 미소를 거두지않고 비석에 입술을 댄 채로 말을 내뱉었다. "드디어 말할 수 있어. 토니. 나도 자네를 좋아해. 자네의 마음을 언제나 믿어왔어. 나와 사귀어줘, 토니 스타크. 나와 함께해줘." 그리고 스티브는 두 손으로 토니 스타크의 비석을 끌어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스티브의 눈가의 깊은 주름을 타고 스티브의 투명한 눈물은 여러갈래로 흩어져 내렸다. 입가의 주름도, 음푹패인 홀쭉한 뺨도, 스티브가 눈을 감으니 한층 더 진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파란 눈동자가 보이지 않으니 스티브 로저스는 정말 평범한 늙은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런 자신을 신경쓰지 않았다. 차가운 비석에 점점 체온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도 아무 신경쓰지 않았다.


 스티브 로저스는 이제야 아무 거리낌도 없이 토니 스타크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던가.


 그리고 스티브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몇십분 뒤에 죽음에 이르리란 것을. 이대로, 눈을 감은 채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을. 스티브는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다시 눈을 뜬다면, 그렇다면 분명 그 눈앞에는 토니 스타크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 뒤로는 내가 걸어온 모든 삶에서 먼저 보내야만 했던 모든 그리운이들이 웃으면서. 스티브는 또 눈물이 났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또 눈물이 났다. 이제 다신 눈뜨지 않을 것이다. 다시 눈뜨기 전까지, 다신 눈을 뜨지 않으리라... 


 







- done

 

트위터에서 모일본존잘님이 늙은 스티브를 그린 일러스트를 본 순간 떠오른 글. 그 늙은 스티브는 안경을 끼고 있었고... 얼굴만 늙었다 뿐 여전히 캡틴수트를 입은 채 최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그런 당신을 사랑해 <?

언제나 스티브가 사랑을 알고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써, 언제나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써, 시빌워가 잘뽑혔길 기대해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빌워 흥해라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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