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요. 아직 몸을 일으키면. 토니 스타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페퍼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물론 뺨에 닿는 그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감촉덕분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왜 내 뺨에 닿았을까? 토니는 붕대안쪽에서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아아, 의사선생이 가능하면 눈을 움직이지말라고 했던 게 뒤늦게 떠오른다. 입원기간이 길어진다고, 내 머리까지도 돌이 되어버리고 있는건가. 이건 나의 개인자산이 아닌데. 이건 인류의 보물인데. 어쨌든 저도모르게 몇번이고 눈을 꼼질거리고 난뒤에야, 토니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는 자신의 가슴을 두손으로 꾸욱 누르며 자신을 저지하는 페퍼가 위에서 고개를 숙인탓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필요하면 나에게 말해요, 토니. 페퍼의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상냥하게 들린다. 아니야.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상냥했어. 그러니까 새삼 당신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상냥하게 들리는 건, 그건 내가 다 병신이 된 탓이겠지. 토니는 그렇게 말해봤자 페퍼의 기분만 상하게 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이 일시적으로 안보이는 것을 두고 병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장애비하발언이라고 신문에서 겁나 떠들어대기만 할 것이고. 그래서 토니는 그냥 웃으며 페퍼가 있음직한 곳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내 얼굴보여? 내가 지금 잘 웃고 있어? 페퍼, 내가 지금 제대로 당신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향수냄새가 여전히 좋아. 내사랑." 그렇게 말하는 토니의 목소리가 깊은 호수에 잠기어 있는 것처럼 나지막했다.
빛을 잃고 어둠속을 더듬으며, 대체 몇시간이나 흘렀을까. 토니는 잠들고 다시 눈을 뜬 시간이 반복될수록 점점 시간개념을 잃어갔다. 밤에 잠들어 낮에 눈을 뜨는 것에 점점 확신이 없어져갈 무렵 토니는 낮에 잠들어 낮에 눈을 뜨는 것조차 하루가 지난것인지 이틀이 지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감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신에 휴대용 자비스를 내내 가동하며 토니는 민감하게 시간에 대해 물었다. 자비스는 성실하게 하루단위로 흐른 시간을, 혹은 시간단위로 흐른 시간을, 때로는 초의 단위로 흐른 시간을 귀찮아하지도 않고 토니가 묻는 그때그때 마다 알렸다. 잠을 이루시고 열시간이 흘렀습니다. 미스터 토니. 잠을 이루시고 두시간이 흘렀습니다. 미스터 토니. 잠을 이루시고 이십초가 흘렀습니다. 미스터 토니. 페퍼는 토니를 위해 그가 좋아하는 몇 개의 앨범을, 목소리가 좋은 배우들이 직접 녹음한 라디오소설 등을 가지고와 틀었다. 토니는 기본적으로 아무생각없이 그것들을 들었고 때로 The Universe in a Nutshell을 읽는 것을 틀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페퍼의 웃음소리는 토니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런 라디오는 없어요, 토니. 그럼 돈을 주고 배우를 고용을 해. 토니의 익숙한 심술어린 말을 들으며 페퍼는 토니의 마른 뺨을 때때로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살결. 따뜻한 손끝. 내가 직접 읽어줄게요. 내 목소리 좋아하잖아요 토니? 손을 들어 페퍼의 손을 움켜잡으며, 토니는 말했다. 내곁에 24시간 붙어있으려구? 나야 좋지만 회사는 어쩌고? 누구한테 주죠 뭐. 싸인만 하면 되잖아요? 아예 국가에 환원할까요? 페퍼의 말은 퍽이나 진심이었고, 그녀의 말에 진심이 점점 어릴때마다 토니는 아, 과연. 내 눈이 영영 가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하였다. 내 눈에 다시 빛이 돌아올 날은 없는 거야, 난 영원히 어둠속에 잠겨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저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그렇군. 과연 그렇군. 붕대속에서, 토니는 또 눈을 꼼질거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기계공인데, 눈이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로 위험물질에 대한 조작을. 아니, 안 돼. 이젠 나에겐 아이언맨 수트조차도 그저 위험한 폭탄에 불과해. 난 어린애와 같아. 이 손에 쥘 수 있는 건 그저 부드럽고 동그랗게 마모되어있는 고무공 뿐이야. 던져도 아무에게도 위험하지 않은, 내가 맞아도 조금도 아프지 않은.
외로워.
이 기분은 뭘까.
쓸쓸해.
외로워. 슬퍼. 페퍼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녀가 내옆에 있어주는 게 고마워. 하지만 난 아기가 아닌데, 그렇게 내내 붙어있지 않아도 되는데. 내내 붙어있는 게 오히려 더 괴로워. 하지만 아무도 내옆에 있지않으면 나는 고독속에 질식하고 말겠지. 아니 차라리 고독속에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영원한 어둠인걸 뭐. 난 지옥같은 밤을 걸어야하는 거야, 지금부터 죽을때까지. 영원히. 내 발밑은 낭떠러지일까? 아니면 평평한 아스팔트? 난 모르지. 난 모를거야. 영원히 몰라, 누군가가 나에게 가르쳐주기 전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아, 왜 하필이면 눈을 당하고 만걸까? 그것도 양쪽 전부 다. 어느 조직의 애꾸눈처럼 한쪽눈만 망가진거라면 그나마 희망이 있었을텐데. 설마 양쪽 안구가 전부 다 찌그려져버릴 줄은. 아, 왜 하필 눈이었을까. 왜 하필 눈이었을까. 팔도 있고 다리도 있고, 목소리도 있고 귀도 있는데. 그런데 왜 하필 눈이었을까, 왜 하필 시신경이었을까.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아이언맨 수트를 입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는 있나? 자비스에게 시켜서, 그가 나의 눈이 되도록 나를 조정하게 만들어서. 아니, 안 돼. 그래도 갑작스런 위험이 닥치면 대비할 수가 없을 거야. 실제 내 눈으로 보아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겠지.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라져버릴거야. 아, 하필이면 눈이 망가져서. 하필이면 눈을 방어하지 못해서. 눈위로 닿는 따스한 것이 빛이란 것은 알겠는데, 난 이제 그저 빛을 떠올릴때마다 기억을 의지 하게 될 거야. 모든 사람들을 모든 사물을, 세상의 모든 것을 그저 기억으로 떠올리게 될거라고. 내가 기억에 기대지 않고 떠올리게 될 것이 그저 어둠밖에는 없게되다니. 그저 밤밖에는 없게되다니. 그저 검정밖에는 없게되다니. 아, 하필이면. 하필이면 눈이 망가지고 말아서.
"페퍼."
어둠속에 동그랗게 떠오른, 자기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무서웠다. 토니는 그저 영원히 병원의 병실에 누워있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둠속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움직여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다. "불렀어요? 토니." 아니, 아니. 페퍼. 그런 취급 하지 말아줘. 날 배려하지 말아줘.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마저 싫어지고 만다. 이런 내자신이 소름끼치게 싫고. 토니는 또 붕대속의 눈을 꼼질거렸다. 아니, 이래선 안 되는데. 하긴 내가 언제 의사 말을 들은적이 있었나. 토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란 건 뭘까. 내가 오른쪽 입술근육과 왼쪽 입술근육을 잘 사용하고 있는걸까? 모르겠다. 페퍼가 내가 느끼는 의미없는 이 외로움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다.
"스티브는?"
"......"
"페퍼. 스티브는 어디있어?"
그리고 토니는, 페퍼의 침묵이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웠다.
그냥 내던져지고만 이밤의 캄캄함보다도 더 무서우니, 페퍼. 조용해지지말아줘. 침묵하지 말아줘. "스티브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줘, 페퍼." 누가 나에게 그가 죽지않았다고 말해줘. 좋아. 거짓말을 해. 알았으니까 나에게 이제 그만 거짓을 알려달라구. "스티브가 죽었단 말은 더 이상 하지 마. 그가 없는 세상은 실명보다도 캄캄해. 페퍼."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만 나에게 거짓말을 좀 해줘. "...스티브는 살아있어요. 토니." 하지만 아, 세상에나 이다지도 외로울만큼, 페퍼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능숙하면서 그저 거짓말 단 하나에만은 재능의 조각조차 가지고 있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내뱉는 그 목소리 하나하나의 끝이 흔들려, 페퍼의 음성은 그저 하나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티브는 살아있어요. 진짜예요. 그래서, 토니, 곧 당신을 보러 올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페퍼의 음성 하나하나마다 토니가 자신의 눈으로 본 마지막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토니.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스티브. 그 커다랗고 가느다랗고 그 아름답고 연약하고 그 놀랄정도로 강하고 그 놀랄정도로 별 것 아닌, 당신. 그러나 이 세계의 모든 것과 같았던 당신. 자신의 별것도 아닌 이름을 외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의 별것도 아닌 심장을 구해내기 위해 그 몸을 던져서. 토니는 스티브의 몸위로 퍼지던 커다랗고 엄청났던 섬광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기 몸 위에 포개진 스티브의 묵직하고 따뜻한 육신도. 그의 끊어지기 직전의 숨결 하나도. 자신의 두 안구가 찌그러지기 바로 직전의 충격과, 스티브에게 키스하고싶다고 격렬하게 느낀 충동까지도.
역시 히어로따위가 아니길 빌어.
역시 그러길 빌어야 했어.
그저 모든 것에서 떼어놓아야 했어. 그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그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70년의 긴 세월을 뭐하러 돌려놨어?
당신에게 두번째 인생을 부여해준 의미가 없어
그저 당신에게 고통만을 주었을 뿐이야.
그렇기에 인간은 의미가 없어.
당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지.
아아,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고싶었는데. 스티브. 나는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당신을 껴안았던 건데. 그리워. 모든 것이 그립다. 당신의 숨결도 체온도 당신의 뜨거운 심장소리도, 그저 모든 것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알았다면, 나도 그냥 그자리에서 당신과 같이 죽어버릴 걸 그랬어. "...안되요, 토니. 토니, 제발. 의사가 더 이상 울어선 안된다고 했어요. 눈물은 독이라고 했어요, 제발 토니. 생각하지 말아요, 울지말아요..." 페퍼가 그렇게 말했지만, 한 번 떠오른 이상, 토니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 자신이 살아난 것에 대한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죽을 것을. 그냥 죽을 것을. 너의 산산조각이 난 몸을 끌어안고 그자리에서 나도 그저 목을 놓고 말 것을. 나의 삶이 더 이상 의미가 될 수 없는데,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지? 무엇을 끌어안고 견뎌야하지? 아아, 스티브.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 보고싶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어둠뿐이야.
어둠뿐이지.
당신이 세상에 없기에, 이 어둠은
당신이 나에게 준 것과 마찬가지야.
어둠속에서, 토니는 옴싹달싹도 하지 못했다. 정말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어둠이 잠식해와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기만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도저히 아무것도. 결국 토니는 또 한 번 붕대너머로 눈을 꼼질거렸다. 스티브. 그 이름만이 한없이 떠올라서, 정말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쉼없이 반복되어, 목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죽고싶다. 어둠속에서 홀로, 토니는 그 생각만을 반복하였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소원만을.
- done
스른전력 39차 주제:어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어둠속의 토니 스타크. 외로움과 고독은 한이 없습니다. 죽음과도 같이.
스티브가 살아있다면 또 조금 달랐을텐데요.
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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