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lty pleasure

 

 지난 수요일쯤의 일이다. 전날밤부터 계속 된 봄비가 아침에도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창가에서 육안으로도 확인될만큼 다소 거센 빗줄기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봄내음을 맡으면서 외출준비를 했다. 샤워가 5분,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는데 3분, 옷을 입고 머리를 쓸어넘기는데 7분에서 8분. 현관을 나서기 전에 오토바이 열쇠를 드는 것 대신에 장우산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런날은 전철이 훨씬 편하고 빨랐다. 캡틴 아메리카는 이제 맨하탄의 다소 복잡한 전철노선정도에는 익숙해져서 혼자 전철을 타는 것에 약간의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빗물에 미끄러지는 오토바이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캡틴은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비오는 날이라고 굳이 오토바이를 타지 않을 이유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캡틴은 목적지가 목적지인 만큼 될 수 있으면 말끔하게, 그다지 젖지않고 깔끔한 차림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스타크 타워였다. 스티브는 정말로 왠일로, 토니 스타크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타워에 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전혀 헤매지않고 어렵지않게 스타크타워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실은 채 캡틴은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예상가능한 토니 스타크의 반응을 상상했다. '아니?!' '캡시클이잖아?'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찾아오다니 이게 왠일이야? 지금 혹시 해가 서쪽에 있나?' '아니면 내가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건가?!' '눈뜨고 잠꼬대라니 나 그동안 너무 하드 워크했나봐 나 진짜 좀 쉬어야겠어' '근데 페퍼, 저기 저거 너도 보여?' 풋. 스티브 로저스는 저도모르게 토니의 표정을 떠올리며 웃다가, 순간 주변을 의식하고 큿흠하고 헛기침으로 웃음의 끝을 얼버무렸다. 전철안은 비에 젖은 철의 냄새와 공기에 달라붙은 사람 살의 냄새가 혼동되어 흐르고 있었다.

 

 건물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스타크타워의 회전문을 향하는 대부분의 남녀들은  한쪽손에 가방을 반대쪽 손에는 우산을 들고있으며 점잖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무의식적으로 셔츠의 목 맨윗부분의 단추를 잠그었다. 오늘도 역시 셔츠의 체크무늬가 가로 세로 전부 일정하였다. 스티브는 우산을 접어 한쪽 옆구리에 끼우고 스타크타워로 들어갔다. 캡틴 아메리카로써 타워를 방문하는 게 아닌, 스티브 로저스로써 타워를 방문하게 될때면, 스티브 로저스는 언제나 1층의 안내데스크를 먼저 거치었다. 언제고 토니가 정 계속 그럴거라면 이걸 안내 직원에서 보여주도록 하라면서 그에게 스티브 로저스 전용 타워 관계자 출입증같은 것을 만들어주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타워 내 어디든 프리패스로 오케이라는 물건으로 여기저기 있는 경비원에게 그것만 보여주면 그들은 마치 상대가 토니 스타크이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스티브 로저스를 대우 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왠지 안내에 용건을 말하지않고 지나친다는 것이 영 불편했다. 직권남용이라는 단어는 스티브 로저스가 좋아하지 않는 단어 중 하나이다. 머릿속에서 한쪽눈썹을 구부리고 마음에 안든다는 듯 괜히 큰 제스츄어로 하, 혀를 차는 토니가 떠올랐다. '내가 사장인데 내가 내회사에서 왜 눈치를 봐야해?' 그건 자네가 만든 나라 얘기고, 내 나라에선 내가 왕이니 내맘대로 할것이라네. '하여간 고지식한 영감이라니까.' 신경끄시게나. 스티브는 그래서 오늘도 부득불 안내데스크로 가서 자신의 이름과 용건을 밝혔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토니 스타크를 만나러 왔으며, 나는 스티브 로저스라고. 안내직원들은 사장이 직접 프리패스증을 만들어준 스티브 로저스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스티브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항상 그가 굳이 기록하겠다고 말하는 외부인 입장 명부를 두말없이 꺼내어 스티브에게 펼쳐주었다. 스티브는 그 위에 빠르게 싸인을 했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금발미남-그것도 스타크 사장과 친분이라는 굉장한 빽을 가진-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안내직원 두엇이 스티브 앞에서 최대한의 요염을 떨었다. 스티브는 자기에게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가볍게 내밀면서 눈웃음을 치는 검은머리의 섹시한 여직원에게 '?'가 섞인 당황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웅 귀여워. 스티브가 '???'를 머리위에 띄운 채 곤란해하는 표정 그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여직원들은 속닥거렸다. 저거저거저거 저 물건 어떻게 안 되나. 자기 용건만 말하고 지나가는 이 야속하여라.

 

 그리고 일은 거기에서 벌어진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가 타워의 꼭대기 전전층까지 이어지는 엘레베이터를 탄 그때부터. 꼭대기층은 토니전용 랩실이기 때문에 일층에서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엘레베이터는 없고, 전전층에서 엘레베이터를 내려야하는데, 엘레베이터를 내리고 긴 복도를 쭈욱 걸어나오면 위를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그 에스컬레이터앞에는 당연히 경비원들이 서 있고, 스티브는 그 경비원들에게 토니가 준 프리패스증을 보여주고 위로 마저 올라가기 위해 프리패스증을 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엘레베이터가 열릴때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그 프리패스증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어이쿠" 스티브 로저스의 프리패스증은 복도바닥에 깔려져있는 푹신한 카펫에 몇 번 바운스하여 앞으로 굴러갔고 스티브는 당황하며 좁은 보폭으로 허리를 어설프게 굽힌 채 프리패스증을 따라갔다. 그리고 다행히 몇걸음 가지 않고 프리패스증을 주울 수 있었는데, 스티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카펫위에 펼쳐진 채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응? 이게 뭐지?"

 

 프리패스증을 놓쳐 그 뒤를 쫓는 꼴사나움을 벌이고 난 뒤였기때문에 스티브는 약간 얼굴을 붉힌 채로, 아무도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저도모르게 혼잣말을 크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아, 나참. 왜이러나. 정신차려야지...'하고 중얼거리곤 입을 다물고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지갑을 주워들게 된 것이다. 누가 흘리고 간 모양이구나, 찾아줘야겠다. 스티브는 이 통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토니 스타크의 측근들에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워의 꼭대기층까지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스타크타워에 속한 사람중에서도 몇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중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맨 수트로 오히려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느낌이니까 토니는 제외일 것이고, 심플한 브랜드무늬의-아르마니였는데 물론 스티브 로저스는 브랜드명을 알지 못했다-단색 접이지갑에서 여성취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주인은 남자일 것이고... 스티브는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뒤적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지갑을 흘린 사람에 대한 후보를 저도모르게 자연스럽게 압축하면서 주인을 찾아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쪽에 버석이는 어떤 끝이 닳은 종이조각. 그림인 것 같은 한쪽 끝부분의 색감. 스티브 로저스는 아무 생각없이 그 삐죽튀어나와있는 종이의 한쪽 단면을 잡아 그대로 끄집어냈다. 잡아 꺼내 보고나니 그것은 사진이었으며,

 

 사진의 주인공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

 

 컬러의, 군복을 입고있는. 왼쪽옆구리에 모자를 끼어놓고 연한 미소를 띠고 있는 스티브 로저스의 사진이었던 것이다.

 

 

 

 

 

 

 

 "...??"

 

 스티브의 머리위로 아까 안내직원들의 추파를 이해하지 못했을때보다 더한양의 '?'가 떠올랐지만 스티브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모르는 사람의 지갑안에 자신의 사진이 있는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본 사진이 '캡틴 아메리카'였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는 팬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스티브가 알지 못하는 지갑속에 그의 사진이 들어있다하더라도 아 캡틴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인가 보군 허허 쑥쓰럽네... 하고 넘길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스티브 로저스는 필 콜슨이라고 하는 팬이라고 하는 것의 롤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만한 남자를 알고있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스티브 로저스=캡틴 아메리카라고 하는 것은 비밀중의 비밀이라, 설사 스타크타워에 자주오는 스티브 로저스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순수하게 '스티브 로저스'라고 하는 사람의 사진을 지갑안에 넣고 다닌다는 그런 얘기다.

 

 그러다가 퍼뜩, '지갑 속 사진'이라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버린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사진을 집어넣었다. 그렇다. 아무리 스티브라도, 그런 배경의,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의 사진을 넣고다닌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바보일 수는 없었다, 비록 다소 늦기는 하였지만. 눈치없다 둔감하다 그런 소리를 계속 듣고살고있는 그이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쪽으로는 좀 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갑안에 사진을 넣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마 모를수가 있을까.

 

 '연정'이잖아.

 

 "...휴우..."

 

 스티브는 지갑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손에 쥐고 약간 당황하며 목뒤를 긁적였다. 자신을 향한 연정을 이렇게 정면에서 정확하게 눈치챈 경우가 스티브는 거의 전무해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앗 그러고보니 이거 남자지갑이었던가?! 더더욱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그때였다.

 통로 저쪽 모퉁이에서부터, 몸무게가 제법 나가는 남자의 빠르게 달려오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토니?"

 

 스티브는 멀치감치에서부터 눈썹 휘날리게 달려오는 상대가 누구인지 좋은 시력으로 이미 파악한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토니 스타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정신빠진 사람처럼 헐레벌떡 달려나오다가 "앗!"하고 캡틴을 발견하고는 "캡시클?"하고 의아해하다가-아 역시 왠일로 내가 연락도 없이 왔나하고 놀라는 건가, 혹시 만약 그가 내가 아까 생각한 대사 중에 하나라도 똑같은걸 내뱉으면 맞췄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스티브는 잠깐 생각했다-토니는 스티브 손에 들려있는 지갑을 보고 "악!!!!!!"하고 소리쳤다.

 

 "응?" 어라, 생각한 것중에 비명소리는 없었는데.

 

 "악!!!?!???!"

 

 "으응??"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곧바로 연달아 두번째의 소리를 내지르면서 뭔가 엄청나게 허공을 향해 두손을 허우적댔는데, 스티브는 토니의 당황하는 모습에 압도당해 의아해하며 벌써 오늘만 몇번째인지도 모르겠는 '????'를 머리위로 띄어올렸다.

 

 

 

 

 

 

 연신 두 손을 허우적대며 "아! ~~~아~~~으,"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다가 참는 듯이 입을 벌리다 닫다를 반복하며 우물쭈물하는 토니를 보면서, 스티브는 눈썹을 여덟팔자를 하고 "토니? 괜찮은가? 어디 아픈가?" 하고 안부를 물었다. 토니 스타크는 재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판단하려고 했고-바로 지금, 나 토니 스타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천재력을 죄다 동원한다 잠자고있던 세포여 깨어나라아아아아아(중2냐)-그리고 토니는 0.001초도 채 끝나기전에 상황을 전부 판단하였으므로, 그러니까, 말하자면, 토니 스타크는 지금 당장 스티브 로저스가 주운 저 지갑이 사실은 '토니 스타크의 것'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겨야하는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를 챘던 것이다!

 

 그래서 토니는 오늘 왠일로 엘레베이터를 통해서 랩실에 갔다가 몰래 찍어 몰래 넣어둔 스티브의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흘렸다는 사실을 몇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눈치채서 '악!'하고 소리지른 후에 얼른 찾으려고 걸어왔던 길을 달리며 되돌아가던 중 그 내지갑을 주운 사진속의 주인공 스티브 로저스가 눈앞에 있는 이 상황에서 '와 스티브 그거 내지갑이야 주워줘서 정말 고마워!'라고 말하면 토니 스타크는 완전히 새되어버리게 되니까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므로,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간신히 "야...아, 캡시클. 왠일이야. 대체 여기서 뭐하는거야?"라고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힘차게 외쳤다, 안에 사진 봤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 자네에게 용건이 있어서. 미리 연락도 안하고 와서 미안하네."

 

 허공을 향해 무의미하게 휘두르던 두 손을 간신히 양옆 옆구리에 꽂음으로써 수습한 뒤에 토니는 약간 이상해하는 스티브의 안색을 살피면서 억지로 환하게 하하, 웃었다. "아니아니 뭘, 뭘 미안해 미안하긴 뭘, 왜 미안해해 뭘." 토니는 자기가 여전히 당황함이 남아 횡설수설하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헛기침을 한뒤에 뜸을 들여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어 그래. 언제와도 환영이야. 캡. 그래도 역시 미리 연락을 주면 내입장에서는 조금 더 좋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솔직히 들긴 드네. 그 왜, 그 말이야. 마중이라던가 다과준비라던가 할 수 있으니까 말야."

 

 "하아. 음. 그런 건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네만. 어쨌든 다음부턴 신경쓰겠네."

 

 "그래. 그래줘. 그런데 무슨일로 왔어?"

 

 토니가 먼저 앞장서 랩실로 다시 걸어가자 스티브는 "토니? 자네 지금 나가려고 하던 참 아닌가?" 물었고 토니는 속으로는 뜨끔했으나 이제 평정을 찾은 포커페이스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 웃는 낯빛으로 "아 뭐 좀 할게있긴했는데, 캡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겠어. 나중에 하면 되지 별로 급한 일도 아니고."라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스티브는 물론 토니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 다른게 아니고, 이번에 어벤저스팀 작전에 필요한 도구를 자네가 개인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기에. 너무 자네에게 맡기기만 미안해서 뭔가 도움이 될게 있나 싶어 일단 찾아왔네만."

 

 "그랬어? 별 걸 다 신경쓰고 그래. 캡도 참. 나야 뭐 그런 건 거의 취미생활 같은 거니까 신경안써도 되는데."

 

 "어떻게 그러나. 자네에게만 다 맡기고 손놓고 있을 순 없지."

 

 "아니 나한테 다 맡기고 그냥 그 지갑은 뭔데?"

 

 "음? ..아, 이거 말인가."

 

 ".....(아차차. 젠장.)"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여전히 스티브 로저스의 손에 들려있는 지갑에 온신경이 100% 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모르게 지갑에 대해 불쑥 물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타이밍이 보시다시피 참으로 거시기하였다. 머릿속이 온통 지갑 저 지갑 저 내지갑 아오 저지갑 이렇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생각이 닿기전에 지갑이라는 단어가 나와버리고 만 것이다. 토니는 말을 내뱉고 저도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가렸고 스티브는 오늘따라 토니를 대하기가 좀 어렵군 뭐때문이지;; 하고 생각하면서 손에 들고있던 지갑을 쳐다보았다.

 

 "아 이거... 이건 별게 아니고, 음."

 

 새삼 자기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에 대해서 말하려니 스티브도 약간 쑥쓰러웠다. "요앞에서 주웠네. 엘레베이터 앞에서. 지금쯤 지갑을 찾아다니고 있을 주인을 얼른 찾아줘야 될 것 같은데 큰일이네."

 

 "(젠장! 역시 거기였군! 아오 다신 저 지갑 안들고 다닌다 내가.) 어 그래? 캡 착하네. 우리 타워 엘레베이터 앞에서 주웠다고?"

 

 "음, 그렇네. 여기 앞까지 올라올 수 있는 자네 직원은 몇 안될테니까 그중에서 꼽아보면 아마 금방 주인을 찾을 수 있겠지."

 

 토니는 기왕 지갑 얘기를 꺼낸 것 -물론 엄청 뜬금없이 꺼내어 분위기까지 어색하게 만들어버렸기는 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수습할 방법은 없었다- 에이 이때가 기회다싶어 그냥 밀어붙여서 지갑을 돌려받기로 하였다. 그는 그대로 손을 스티브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해보이는 미소를 만들어보이기까지 하였다.

 

 "캡이 직접 찾아주게? 에이, 뭐하러. 안내데스크에 맡기면 금방 주인을 찾을 수 있을건데. 나 줘. 내가 주인찾아달라고 할테니까."

 

 "음? 아, 아니네. 내가 주웠으니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안에 신분증같은 것도 있을테니 금방 찾아줄 수 있네."

 

 스티브는 왠지 자기사진이 들어있는 것을 토니에게 맡기기가 쑥쓰러웠다. 아니, 이안에 내사진이 들어있다는 걸 토니가 알리가 없을텐데 난 뭘 이렇게 쑥쓰러워하고 있는건지. 하지만 쑥쓰러운 걸 어떡해. 스티브는 저도모르게 토니에게서 지갑을 멀리 떼놓는 시늉으로 손을 뒤로 돌렸다. 토니는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더욱 더 힘을 주어 지어보였다.

 

 "그래. 그러니까 안에 신분증있는가 확인하고서 금방 주인 찾아줄테니까 그냥 나주라고. 신분증을 발견해도 그사람 연락처를 모르면 전화해주기 어렵잖아. 직원 관리는 봐, 사장인 내가 내부하 시켜서 하고있으니까 주인찾기는 내가 더 잘할거라고. 논리적으로 그렇지? 그렇지? 응? 어서 그렇다고 하게."

 

 "아, 그런가..."

 

 "아 그렇지. 아 당연하지. 아 정말이지. 그러니까 그 지갑 이리주게. 응? 나줘 어서어서. 빨랑."

 

 그리고 손바닥을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토니. 스티브가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근데 이거 안에 내..."

 

 "응? (젠장 역시 사진 봤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아니.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건 없지. 스티브는 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토니의 말을 계속 생각해보니 그래, 그게 순차적인 것 같았다. 당연히 스티브 자기자신보다 사장인 토니쪽이 직원들에 대해 금방 파악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스티브는 왠지 지갑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싶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자신을 연정의 상대로 품고있는 상대가 남자라는 추측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스티브 로저스는 결코 성취향의 차이로 상대를 무시하는 몰상식한 남자가 아니다.) 스티브는 그냥 이해가 안 되고 쑥쓰러운 것이었다. 자기같은 것을 상대로, 연정이라니. 세상엔 좋은 남자가 더 많은데, 나같이 둔한 남자를. 스티브는 웃으면서 "그래, 그럼. 자네에게 맡기지."하면서 지갑을 토니에게 건네었다. 토니는 심장이 쿵쾅 쿵쾅 뛰어오르면서도 애써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뻗으면서 "그래. 나만 믿어.(아싸 성공!)"하고 조심스럽게 스티브에게서 지갑을 건네받으려고 하였다.

 

 그 찰나.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붉은 고수머리의

 바람.

 

 나타샤 로마노프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서 스티브의 손에서 마악 떠나려고 하는 지갑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갔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어머. 고마워요. 캡틴. 이거 내지갑인데."

 

 였다.

 

 

 

 "..!!!!!!!"

 

 눈앞에서 지갑을 빼앗긴 토니 스타크는 비명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입을 '악'하는 모양 그대로 멈춘 채 바들바들 떨었고

 스티브는 어느새 성큼성큼 걸어가 거의 복도 저쪽 끝에 닿은 나타샤의 등을 향해 다시 한 번, 오늘의 마지막 물음표를 띄웠다.

 

 "응? 그게 자네꺼라고?"

 

 "네. 전 원래 남자지갑 들고다니거든요. 디자인이 이쪽이 더 취향이라서."

 

 "어, 어, 근데, 그 안에 내사진이..."

 

 "에이. 캡틴도 참. 제가 캡틴 팬인거 몰랐어요?"

 

 "설마 진짜 몰랐다고?" 그러고는 윙크를 날리면서 입술을 모으는 나타샤. "아, 그랬나? 하하. 자네도 참." 같은 동료가 웃으면서 팬이라는 단어를 쓰니 스티브 로저스도 그제야 알게모르게 느끼고 있었던 긴장이 탁 풀려선지 하하, 하고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팬이라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수는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갑 주인이 나타샤면 '연정'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거야. 왠지 시원하면서도 약간 아쉬운 것도 같은 그런 미묘한 감정이 드는군 인간이란 참... 스티브는 웃음섞인 한숨을 내뱉으면서 곧 웃는 얼굴 그대로 토니의 어깨를 내려치며 "주인이 금방 나타났군. 잘됐지 않나 토니?"하였다. 토니 스타크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있었는데 스티브는 물론 그가 떠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자네 추운가?"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진짜로 추워져서(마음이) 조금 울뻔하였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토요일이 되겠다. 토니는 팔짱을 낀 채 나타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타샤 로마노프."

 

 "오, 불과 얼마전에 구사일생을 경험한 스타크 사장님. 여기 서류에 사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만하면 충분히 즐겼겠지. 이제 그만 그거 돌려줘."

 

 "어머. 그태도. 캡틴한테 곤란한 감정을 들킬뻔한 순간에 구해준 여신님이라고 칭송해도 모자랄판에?"

 

 "그래, 고마워. 그건 진짜 고마운데, ...그걸 건덕지로 자네가 나한테 뭘 요구할건지가 좀 걱정돼서..."

 

 "글쎄요, 티파니?"

 

 "...(젠장, 하필이면 제일 성가신 여자한테 걸려가지고)"

 

 "마음속 말 다 들리네. 농담이거든요."

 

 그러면서 나타샤는 토니에게 사진 한 장만을 돌려주었고, 토니는 "어이 지갑은?"하고 물었지만 나타샤는 꺼내든 지갑을 양옆으로 흔들면서 "이건 이제 내꺼죠?"하고 유유히 걸어나갔다. 나타샤의 뒷모습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자기손에 돌아온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토니. 하. 정말. 내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이게 뭐라고. 참나. 손바닥으로 사진을 한 번 쓸어내린 후, 토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하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 연말파티때 연미복이 없다며 군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온 스티브 로저스 몰래, 뒤에서 도촬했던 사진. 토니는 그 날 취하지는 않지만 기분이 좋아서 오히려 좀 취하고싶은데 아쉬운걸, 이라고 움직였던 스티브 로저스의 입술을 떠올렸다. 붉은기운이 입술주름 사이사이로 연하게 번져있던 그 도톰한 입술을. "아, 제길. 내가 정말 미쳤나봐." 그렇게 중얼이면서 토니는 스티브의 사진위에다가 짧게 키스했다. chu. 사진은 차가웠지만 매끄러웠고, 그 감촉에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토니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벅벅 긁어내렸다.

 

  

 

 

 

 

 

 

 - done

 

+ 트위터에서 딸프언니가 뿌린 떡밥 (토니가 들고다니는 지갑안에 있는것은 스티브의 사진) 을 앙하고 물었음.

언니를 딸프언니라고 써야할지 고모님이라고 적어야할지가 항상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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