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your man
(이글은 커미션으로 쓴 글입니다. 커미션 해주신 분이 공개허락을 해주셔서 티스토리에 업뎃합니다 ^^)
스티브 로저스가 랩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그의 그 굳은 입매와 굳은 미간 사이의 주름, 그리고 담담하게 슬퍼 보이는 푸른 눈동자의 흔들림에서, 토니 스타크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끝을 맞이했음을 깨달았다. 토니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스티브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토니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 어쩔수도 없는 끝을.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을. 어젯밤 스티브에게서 찾아오겠다는 메세지를 받은 바로 그때부터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한때는 토니도 스티브의 아름다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이순간이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어쩌면 정말로, 정말로 이 간절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이 영원할 거라고, 이 목숨이 끝날 때까지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을거라고. 이렇게 눈을 뜨면 자신의 침대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스티브 로저스가 고요히 잠들어 있고, 그렇게 잠들어 있는 스티브 로저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 그의 잠든 얼굴을 독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토니 스타크, 나 자신이고... 그리고 토니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의 고요한 얼굴을 가만히 손등으로 쓰다듬는 특권을 마음껏 누린 채로, 그렇게 그와 함께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한 때 토니는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나의 죽음의 마지막에 볼 수 있는 얼굴이 바로 스티브 로저스일거라는 그런 생각들을.
이렇게도 끝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에조차, 그 꿈들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어째서 스티브 로저스란 사람은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토니는 우뚝 서 있는 스티브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스티브. 여전히 키가 크군. 어깨도 여전히 넓고. 허리도 여전히 날씬해. 얼굴은,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조금 수척해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꿈에서 본 것처럼 그대로야. 그렇다, 토니 스타크는 여전히 스티브 로저스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게 꿈에서도 보고 싶을 만큼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째서 토니는 오늘, 스티브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야 할까. 그리고 어째서 그의 그 헤어지자는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물론 상황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토니가 스티브를 향해 '헤어지자'라고 말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이번에는 스티브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하게 될 것인가. 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헤어지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스티브도 전부 토니에게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어째서 우리 둘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을까. 나는 아직도 너를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그리고 분명, 스티브, 너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거야. 하지만 너는 분명히 나에게 이별을 선언하러 왔고, 나는 분명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그리고 토니는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고, 그리고 더 이상 그 원인이 생각나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야 별다른 것이 아니겠지. 그다지 원인이 멀리 있지도 않겠지. 아마 소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허물어지고 만 것이겠지. 마치 지금처럼,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거의 두 달만이라는 바로 지금의 상황같은 것들이, 두 사람 사이에 4년에 걸쳐 쌓이고 쌓였던 거겠지. 그리고 지금 그것들이 전부 무너져버리고 만 거야. 걷잡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토니는 독일에서 스티브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파란 마스크를 쓰고 있던 너와, 붉은 아이언맨 헤드를 하고 있던 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틀거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않은 채, 우리 둘은 그저 무뚝뚝하게 통성명을 했었지. 물론, 사랑의 예감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 이별도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로.
'캡틴.'
'스타크.'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았었던가. 우리 둘.
"......"
토니는 일정거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저 서 있는 스티브를 바라보다 문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티브, 스티브에게, 어젯밤 네가 보낸 문자의 문구를 보며 일일이 가슴아파했던 나를 알려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지.
모든 것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어.
어째서 늦었다고만 생각하게 되는지, 그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토니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 빠져나가는 스티브 로저스를 향한 감정들을 더 이상 스스로 어쩔 수도 없었던 것이다. "스티브." 토니는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가슴이 꽈악 죄어왔다. 토니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스티브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토니." 그리고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이별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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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졌어?" 영상통화 너머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클린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자, 나타샤는 미간을 찡그렸다. "클린트, 좀 더 화면 뒤로 가. 지금은 너무 가까우니까." "어어, 미안." 그리고 클린트는 허둥지둥 폰을 뒤로 밀었다. 그러자 클린트의 다리위에서 데굴거리며 놀고 있던 클린트의 새 막둥이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고 나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잘 크고 있네." "덕분에." 클린트는 나타샤의 말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막내의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아이를 위로 들어올렸다. 아이는 작고 오동통한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아빠가 번쩍 들어준 것이 즐거운 듯 꺄꺄거리며 다리를 마구 아래로 쭉쭉 뻗어댔다. 그런 아이의 작은 발바닥이 허벅지를 몇 번을 내리치는 데에도 클린트는 별로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단련된 몸이니 당연하겠지. 나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린트는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그게 정말이야? 두 사람이 헤어졌다니."
클린트의 재차 확인하고자 하는 말에 나타샤는 눈을 굴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큰 한숨을 쉬느라 그녀의 둥그런 어깨가 다 위아래로 움직일 정도였다. "그래. 정말이야. 그런 걸로 없는 말 지어내거나 하는 사람 아니잖아, 나."
"그건 그렇지. 냇, 네가 농담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 아냐. 그냥 너무 놀라워서 그래." 클린트의 확장된 눈이 그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타샤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오죽 놀랐겠어. 나도 가장 처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랬었다고. "아니 그렇게 죽고 못살더니, 왜 헤어진거래?" 그렇게 죽고 못살던 두 사람이었는데.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어주는 게 마치 그렇게도 당연하다는 듯이 뻔뻔하게들 굴어놓고서. (특히 토니가) 모두 앞에서 커밍아웃은 또 얼마나 요란하게 했어? 나타샤는 팔짱을 꼈다. "이유를 어떻게 알아. 그런 거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잖아, 성인 남성 둘한테."
"하여간 나는 스티브에게 둘이 이제 헤어졌다는 일방적인 통보만 받았어. 그리고 둘은 헤어진 연인답게 한동안 만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더라."
클린트는 쯔쯔하며 혀를 찼다. 그녀의 피로가 쌓여있는 듯 한 얼굴의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어벤저스 본부의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 거지 지금? 클린트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쪽 일은?"
"그게 바로 사내연애의 가장 피로한 점이지.(역시 그렇군. 클린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토니는 메시지로 한동안 어벤저스 본부에 얼굴 보이지 않겠다는 말을 보내왔어. 그리고 스티브는, 당분간 필드업무를 뛴다더군."
"필드업무라니, 현장을 뛴다고? 캡틴 아메리카가 단독으로?"
"응. 그래서 이미 벌써 내전이 한창중인 중동의 모국가에 가 있어."
"영어벤저스 프로젝트는? 그 외에도 대외적인 업무가 이것저것 남아 있을 텐데?"
"내가 그래서 당신한테 전화한 거 아니겠어? 클린트. 데스크 업무 직원이 턱없이 부족한데 언제까지 쉬고 있을래?"
"......"
헉, 왠지 불길하다. 클린트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나타샤의 말을 지금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물론 그런 방법은 없었다. "로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슬슬 업무 복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클린트." 으, 망했다. 망했어. 클린트는 정신없이 눈을 깜빡였다. "아 아니, 애초에 나는 데스크 직원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현장전문이라고?! ...그리고 내 장기휴가는 밀린 연차 몰아쓴거라 지금 꼭 복귀해야 할 의무도," "호크아이~?" "으으으..." 그리고 나타샤는 냉철하게 클린트의 말을 잘랐다. 아, 결국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고야 말았다. 웬일로 사적전화를 다 걸었다 싶었더니, 이건 결국 복귀명령이 아닌가. 제길, 브로큰 하트한 세기의 커플의 후폭풍을 왜 내가 맞아야만 하는 건데. 클린트는 들고있던 아기를 더욱 꼬옥 끌어안으며 나타샤에게 눈빛으로 슬픔을 호소해 보았지만 물론 나타샤의 표정에는 아무 변함이 없었고, 그렇기에 클린트에게는 더 이상 저항할 카드가 없었다. 그는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아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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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토니는 스티브의 발그스름한 뺨에 손을 뻗었고, 스티브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어진 얼굴에 새겨져 있는 표정이 마치 방금까지 토니가 샤워 룸에서 나왔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말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 그랬으리라. 스티브. 긴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못했겠지. 이마까지 새빨갛게 물든 스티브를 보고 있으려니 토니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다른 샤워룸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바스로브를 입고있는 스티브의 긴장은 그의 뺨을 손등으로 천천히 쓸고 있는 토니에게까지 전염될만큼 선명했다. 침대에 채 올라가지도 못하고 모서리에 겨우 엉덩이만 갖다대어 걸터 앉아 있는 이 모습이 스티브의 지금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토니의 입술이 달싹이며 긴장했어? 라는 말을 내뱉고 싶어했다. 하지만 토니는 그 말을 참았다. 묻지 않아도 그가 긴장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토니의 시선을 피하며 흔들리는 푸른색 눈동자도, 채 미소도 짓지 못하고 도중에 어색하게 굳어있는 붉은 입술도, 간간히 꿀꺽거리며 마른 침을 삼키길 반복하는 그의 목 안쪽의 소리도. 토니는 그래서 긴장했어 란 말을 하는 대신에 괜찮아? 라고 그에게 물었다. 아, 나는 네가 긴장하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네가 무슨 큰 각오를 해서 오늘 밤을 맞이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구. 정말 괜찮겠어, 캡? 지금 나에게 안겨도. 그리고 이런 토니의 말에, 스티브의 얼굴은 더욱 붉어져갔고.
처음, 스티브에게 함께 침대를 쓰고싶다고 토니가 말했던 날. 너를 안고 싶다고 말했던 날. 그래, 이 날은 바로 그 날이었다. 토니에게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스티브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긴 속눈썹이 긴장에 파르르 떨리던 것도, 붉은 뺨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리던 것도, 토니의 괜찮아? 란 질문에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며 어색하게 미소짓던 것도. 마치 인화해 놓은 사진처럼 전부, 또렷했던 것이다. 토니는 긴장한 스티브를 달래주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귓불 뒤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기도 했다. 푸른 눈동자가 투명한 막을 머금은 채 일렁여 스티브는 마치 토니가 살짝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주르륵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토니는 스티브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뭔가 좋지 않은 생각이리라.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의 사귀자는 말을 몇 번이나 거절하면서 했던 말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토니, 난 안 되네. 나는 사랑을 해서는 안 되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토니는 스티브의 그 말들을 오랫동안 곱씹고 또 곱씹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말이다. 왜 스티브 로저스는 사랑을 하면 안 될까. 그가 차라리 토니 스타크의 인간성을 의심하며 자네가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그동안 보여준 모습이 쭉 그랬잖아, 라고 말하는 쪽이 더 이해하기 쉬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토니의 인생을 비추어보자 하면, 스티브의 그 말은 완전히 사실이 될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앞으로 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토니는 그에게 자신을 어필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건 시간이 많이 들긴 하겠지만 토니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시간이 든다는 건 그저 오랜 기다림일 뿐 거부당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런 식으로 토니를 책망하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너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문제라고, 언제나 문제는 스티브 로저스라고. 자신은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슬픈 말. 그 슬픈 말만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토니는 그 슬픈 말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스티브 로저스는 사랑을 하면 안 되는지를 말이다. 어쩌면, 모든 소중한 사람을 40년대에 두고 와서? 그래서 21세기에서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겁쟁이가 되어버렸나? 아니면 스티브 로저스는 스티브이기 전에 캡틴 아메리카라서 그런걸까? 캡틴으로 사는 동안에는 결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로 이미 정해버린 거야? 뭐야? 어느쪽이야? 어떤거야? 물론 토니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는 방법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토니는 그냥 막무가내로 스티브에게 자신의 사랑을 밀어붙였다. 그가 결국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스티브가 말했던 그것들 말이다.
물론 토니도 한 가지 정도는 깨달은 게 있다,
스티브가 믿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 슬픈 말들이, 지금의 스티브의 얼굴에서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할 것은 사귄지 두 달이 약간 안 된 커플의 첫섹스이고 그런고로 긴장마저 가장 행복할 그럴 순간이건만. 토니는 스티브의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토니는 스티브의 붉은 입술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뽀뽀를 했다. 그리고 당황해 눈을 연거푸 깜빡이는 스티브의 얼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안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난 기다릴 수 있는데. 캡. 난 뭐든 당신이 원해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토니의 말에 스티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외로워져 갔다. 눈썹이 구부러져 아까보다 더 외로워 보였다. 대체, 지금 죽을 만큼 외로운 건 나라고. 이 제멋대로 영감아. 토니는 스티브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스티브는 토니의 어깨에 코를 대고 한동안 훌쩍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바스로브의 앞섬을 전부 푼 스티브의 몸 위로 토니가 몸을 포개고 있었고.
아아, 그 조용하고 부드러웠던 밤. 감미롭지만 강렬하지는 않았고, 그러나 더할나위없이 정열적이었던 고요한 밤.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눈을 떴다. "젠장." 입을 열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목구멍에서 말로 할 수없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하필이면 그 고요한 밤을 꿈에서 보다니.
토니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스티브와 헤어지고 맞이하는 첫 날, 토니는 벌써부터 그와의 헤어짐을 후회하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머릿속이 폭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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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 포츠는 한 손에 패드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솔직히 알 지도 못하는 직원의 책상을 지그시 누른 채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페퍼는 종일 바빴고 오후가 되서야 겨우 본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본사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녀의 일이 좀 줄어들거나 그녀의 쉴 시간이 늘어나거나 그러지도 않았으므로 본사에 있거나 없거나 페퍼의 바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 페퍼는 자기가 일 층에서부터 백 층까지 종횡무진 날듯이 걷고 있을 때 제발 방해가 좀 안들어오기를 바랬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모습을 한 번 보라. 그렇다. 페퍼는 족히 열 명쯤 되는 사원이 둘러싸고 있어 더 이상 갈 곳으로 가지도 못한 채 일도 못하고 이렇게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솔직히 알지도 못하는 직원의 책상을 지그시 누른 채 길게 한숨이나 내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원들은 페퍼를 좌우로 둘러싸 그녀를 더 이상 움직이게 하지 못한 채, 하소연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제발 미스터 스타크 좀 어떻게 해달라는 하소연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페퍼는 그들이 거의 자기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질렸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의 사원이 마치 페퍼에게 기도하듯 손을 포갠 채 절박하게 외쳤다. "그치만, 페퍼! 페퍼가 우리보다 훨씬 미스터 스타크와 가깝잖아요. 이젠 우린 진짜 무서워서 랩실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어요. 랩실 앞에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제발 좀 가만 내버려두라는 둥의 엄청난 고함을 내지르며 문을 향해 여러가지 물건들을 마구 집어던지는데 진짜 무서워서 다가갈 수가 없어요! 근데 또 미스터 스타크에게 확인받을 서류는 얼마나 산더미게요." 또 어떤 사원이 말을 이어받듯이 외쳤다. "그리고 미스터 스타크의 대외행사들 취소하는 것도 이제 한계예요. 모든 시공식과 파티, 개장식에 불참하는 건 파티맨 토니 스타크가 해선 안 되는 일이란 거 페퍼도 알잖아요? 적어도 다음주에 있을 시장님 연설에는 꼭 참가해야 된다구요 페퍼가 제발 토니 설득 좀 해주세요!" 그리고 봇물터지듯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하소연에 페퍼는 마치 자기가 고을의 사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페퍼가 고을의 사또를 안다면 말이지만...) 페퍼는 머리가 다 지끈거려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꾸욱 짚었다. "하아..." 그리고 다시 내뱉는 긴 한숨. "토니가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인가 보군요..." 페퍼는 딱히 누구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닌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토니. 이 바보같은 사람. 이렇게 스스로를 추스르지도 못할 지경이 되버릴 거였으면 왜 그와 헤어지겠다고 말한거예요? 페퍼는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고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얇은 금발이 사라락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페퍼는 문득 왼 팔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며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아,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나.
오늘은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가 헤어진 지 약 삼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삼주동안, 토니는 여전히 자기감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사방팔방에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랩실에 콕 박혀서 모습을 드러내기는 커녕, 모든 대외행사를 취소하고 일은 하나도 안하고 회사 사원들이 겁에 질릴만큼 무서운 공기를 내뿜으면서 말이다. 페퍼는 어쩔 수도 없이 자기에게 몰려든 불행한 사원들-슬픔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자기 랩실에 짱박혀서 버섯이나 피우고 있는 토니가 삼주가 다되도록 제대로 일을 안해주어서 진짜 곤경에 빠진 불행한 말단들-을 헤치고 토니 스타크의 랩실이 있는 최상층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알았으니 일단 급한 일부터 대충 수습하도록 해요, 토니한테는 내가 가볼게요." 페퍼는 일단 그렇게 말하여 모여든 사원들을 해산시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페퍼는 약 삼주 전의 토니를 가만히 떠올렸다. 스티브와 헤어졌다고 말하며 무척이나 우울해 하던 토니. 그 날은 페퍼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밤새도록 함께 와인 술잔을 기울이며 옆에 있어주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삼주나 질질 끌만큼 괴로워 할 거였다면, 토니는 애초에 헤어지기 전에 스티브 가랑이라도 붙잡으며 헤어지기 싫다고 매달려라도 봤어야 했다! 듣자하니 스티브의 헤어지자는 말에 토니는 쿨하게 "그럴 줄 알았어."라느니 "그래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헤어지는 거라면. 나는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했잖아." 라느니 그렇게 말했다는 거 같은데, 페퍼로써는 정말 어이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애초에 토니, 당신이 스티브의 뜻대로 행동했던 적이 대체 언제 있었다고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스티브가 당신을 차버린 요인 중 하나로 당신이 너무 말을 안듣기 때문인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을. 페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토니의 랩실에 입력되어 있는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읽혔다. 손가락 지문과 망막 스캔, 그리고 입력식 버튼을 눌러야 하는 비밀번호. 랩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토니!" 하고 소리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고.
"페퍼..."
그리고 페퍼를 돌아본, 긴 소파에 대자로 엎드려 누워있는 토니 스타크의 머리에는 여전히 버섯이 피어나 있었다... 아이고, 저 바보. 페퍼는 무성한 수염으로 둘러싸인 토니 스타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미남이긴 한데, 그래도 그 수염들은 좀 정리하면 좋겠는데. 평소 토니의 수염도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던 페퍼는 그렇게 생각하며 토니가 누워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소파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병이 가득 있었고, 페퍼는 이 사람이 알콜중독이 된다면 당장 회사를 때려칠 마음을 먹었다.
"페퍼, 당신 언제 왔어? 영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페퍼를 발견한 토니는 그제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악 들어오는 참이에요." 페퍼는 토니가 만들어준 소파의 자리에 살짝 앉으며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수척하고, 눈 아래가 쑥 들어가 있고. 저런저런. 페퍼는 평소 말끔하게 다듬은 수염자국들이 들쑥날쑥해진 것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한숨섞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 소문보다 더 엉망진창이네요. 당신." 토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회사에 내 소문이 나있어? 나 엉망진창이라고?" "네. 일은 하나도 안하고 랩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다구요." "하하." 토니는 힘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미스터 스타크. 방금까지 당신이 일을 안 한 것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원들이 날 둘러싸 제발 당신 일 좀 시키라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진풍경을 보지 못하다니 아깝게 됐군요."
페퍼는 토니의 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용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토니는 페퍼의 담담한 책망에 희미한 동요를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 내가 잘못하고 있단 건 나도 알고 있어.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근데 진짜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는 걸 어떡해."
나라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토니는 혀를 찼다. 스티브와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스티브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헤어지고 싶다면 기꺼이 그를 놓아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헤어짐은, 토니 스타크가 사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미 무수히 많이도 겪은 일이었다. 어차피 삶은 헤어짐의 연속, 그것의 반복 아니겠는가. 토니는 이제와 다시 헤어짐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무너지기에는 토니 스타크의 삶도 충분히 고통이었단 말이지. 진한 체념앞에서, 적당히 독한 술을 마시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인의 어깨에 기대 위로의 쿠션을 배어눕고 그렇게 며칠이고 지나면, 분명히 다시 멀쩡한 토니 스타크로 돌아갈 것이었다. 토니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와 헤어지고 바로 다음날, 그의 꿈을 꾸었다.
그와 처음으로 섹스 했던 그 날의 꿈을.
그 조용하고 부드러웠던 밤. 감미롭지만 강렬하지는 않았고,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정열적이었던 고요한 밤.
하필이면 그 꿈을 꾸었고, 토니는 그제야 자기가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정말이지 돌이킬 수도 없는. 헤어진 첫 날 아침부터, 토니는 스티브와 헤어진 것을 후회하였고,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단 사실에 숨이 다 막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몸이 침대 아래로 깊게 가라앉아 헤어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토니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일단 랩실에 오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전부 무리였다. 몇 주에 걸쳐서 모든 얼굴을 비춰야하는 자리를 다 캔슬하고, 일도 다 미뤄버리고, 토니는 현실에서 연거푸 도망쳤다. 어벤저스 본부에는 더더욱 가지 못했다. 스티브 로저스가 거기에 있으니까.
지금 만나면 무너져버릴거야. 그 무릎에 얼굴을 대고 매달릴 거야.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면서, 다시 내 옆으로 와달라고 울어버릴거야.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왜요? 무릎 꿇고 매달리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요?" 페퍼는 토니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가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말끝에 조금 퍼석해진 슬픔이 묻어 있었고, 그것이 페퍼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애초에 두 사람, 왜 헤어지게 된 거예요?"
페퍼는 발끝에 차이며 굴러다니는 빈병들을 소파에 앉은 채로 몇 개 집어 들어 소파 옆에 똑바로 세워놓으면서 물었다. '애초에 스티브에게 왜 헤어지잔 소릴 들었어요?'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건 지금의 토니에겐 너무 괴로운 말이 될 것 같아 일부러 말을 바꾼 것은 페퍼 포츠가 가지고 있는 상냥함의 발현일 것이다. 토니는 소파 주변만이라도 조금씩 정리를 하기 시작하는 페퍼의 모습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마를 긁적거렸다. "글쎄... 왜였을까." 정말 뭐였을까. 정말 알 수가 없다. 토니는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전부 쓸어 올리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결국 내탓이겠지."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다고 바쁜 스티브에게 떼쓰다가도, 정작 다음날엔 내가 바빠져서 한 달 정도 얼굴도 못비추러 가고. 내가 간신히 시간이 나 만나러 갈 때마다 스티브보고는 일을 제끼라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날 우선시 안 해주냐고 어린애같은 투정부리기도 일쑤였지. 내가 사랑해라고 말할때마다 너도 사랑해라고 말하라고 자꾸 괴롭혔고."
"그것 참..."
"내 나이가 몇 살이냔 소리는 하지 말아줘, 페퍼. 뭐, 그것 뿐만은 아냐. 일적으로도 늘 부딪혔지. 언제나 그와 나는 서로와 반대되는 의견을 지지할 때가 많았으니까. 어벤저스 관련 새 프로젝트를 열 때마다 스티브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모두의 의견을 먼저 수렴해달라고 자꾸 그러니까 어느날부턴가 그에겐 비밀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고, 그것이 나중에 들키면 스티브는 그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워질 만큼 화를 냈었어. 결국 그 돌이킬 수 없는 화들이 쌓여서, 정말로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거겠지."
"자기 자신의 말이 전부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정도는 당신도 이제 알잖아요. 토니."
"알아. 아는데... 페퍼, 나는 한 가지 이거다 정하면 주변이 잘 안보이는 경향이 있잖아. 내 눈앞에 놓여있는 일직선만을 보며 달려가다 보면 많은 걸 놓쳐버려."
"그건 스티브도 그렇죠. 아, 둘이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참 닮았네요."
"맞아. 그랬나봐. 그런 점이 닮았었나봐. 근데 둘이 서로 등진 채로 서로가 만든 일직선만을 보면서 달렸던건가봐... 그래서 정신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이 너무 멀리 있게 된 거야."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무리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지 않을 만큼 서로 먼 거리를 달려버렸기 때문에... 아, 그럼 안 되겠구나. 이젠 무리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지. 나도." 만나지 못한 두 달 동안 토니는 내내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티브의 슬픔을 예감하게 하는 문자에도, 똑바로 얼굴을 보고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스티브의 눈동자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것은 두 달 동안 그런 생각들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어. ...그건 정말 진심이었는데." 그래서 헤어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설마 자기가 이렇게 망가질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와 헤어졌고 다시는 연인들이 주고받는 행동들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게, 자신의 마음을 그가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로 자기에게 다가올 것인지, 토니는 정말로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마음은, 마치 무너진 댐같다.
끄트머리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갉아지던 것이, 곧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큰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이나 다름없게.
"...괴로워." 토니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을 지그시 감아, 자기 얼굴 위로 내려오는 손바닥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페퍼는 자신의 손이 만들어낸 진한 그림자 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는 토니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 슬픔을 그리는 토니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페퍼도 슬퍼졌다. 토니를 계속 이대로 둔다면 토니는 혼자서 계속 힘든 사랑을 반복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페퍼는 손을 뻗어 토니의 어깨를 힘을 주어 잡은 후 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토니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선 더욱 그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토니는 마치 허물어지 듯 페퍼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둥그렇고 마른 어깨에 머리를 깊이 기대었다. "좋은 향기." 토니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페퍼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나. 언제나 완벽하고 늘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워. 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어깨를 토닥여줄때마다 토니는 그녀가 있어 언제나 다행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생각한 거라곤 정말이지 온통 후회뿐이었어. 페퍼, 당신 그거알지. '~했으면 좋았을걸'이란 말투."
"그거 토니 스타크가 제일 싫어하는 말투네요."
"그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인간은 시간을 돌리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니까. 내가 아무리 세계에서 따를 자가 없는 천재라고 해도 타임머신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과거를 후회하는 말투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지.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던 거야."
"그래요. 토니 스타크는 언제나 그랬죠."
"응. 언제나 그랬어."
"...근데 세상에, 페퍼. 믿겨져? 그 사람 생각만 하는 지난 삼주동안, 나는 내내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그때 스티브에게 그랬으면 좋았을걸이라고 늘 생각했어. 토니는 눈을 깜빡였다. 페퍼의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토니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랬으면 좋았을 걸. 스티브. 네가 원할 때 항상 내가 네옆에 있었다면 좋았을걸. 당신이 바쁘면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내가 갔으면 좋았을걸. 당신과 만나지 못하는 몇 주 동안 너무 외로워서 못견디겠다고 메시지를 잔뜩 남겼으면 좋았을걸. 당신과 함께 살았으면 좋았을걸. 그 때 당신을 마중가거나, 그때 당신을 마중했거나, 그때 당신을 돌려보내지 않았거나 했으면 어땠을까. 당신과 돌아갈 장소가 같은 곳이었으면 어땠을까. 그 많은 별장을 두고 나는 왜 당신과 함께 살 생각을 안했었을까. 당신과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길 그렇게 바랬었는데. 그뿐만이 아냐. 모든 게 다 아쉽고 그립고, 후회되고 그래. 당신이 원하는 곳에 당신과 함께 가면 좋았을 거야. 데이트도 많이많이 했으면 좋았을 거야. 선물 줄 게 떠오를 때마다 부담스럽다고 당신 싫어하겠지 생각하며 생각을 접지 말고 그냥 그선물들을 전부 사서 너에게 안겨버리면 좋았을 거야.
네가 여전히 나의 남자일 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졸랐다면 좋았을 거야.
내가 여전히 너의 남자일 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거야.
"토니, 지금 울어요?" 페퍼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웃음에는 토니를 놀릴 기색은 조금도 없었고, 토니도 그녀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니도 그냥 덩달아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 안울어." 정말로 토니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내가 있어서 울지 못하는 걸까? 페퍼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곳에 있는 것이 더 나은지 없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한 7할 정도로, 그래도 그의 곁에 내가 있는 쪽이 좀 더 나을 거야 라는 쪽으로 그녀의 생각이 기울었다. 페퍼는 여전히 토니의 어깨를 감싼 그대로 그가 자신에게 몸을 기대게 내버려두고 있었다. 조금 차가웠던 토니의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토니. 그러지 말고 스티브한테 한 번 매달려봐요. 이미 헤어지는 걸 받아들였다고 해서 다시 매달리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말했잖아. 스티브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나 참. 언제 그렇게 스티브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고 그래요."
페퍼의 말에 토니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바라본 페퍼의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토니는 페퍼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왜,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토니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럼, 안무섭겠어? 이미 차였는데 또 붙잡았다가 또 거절당하면 상처가 대체 몇 배인데? 그걸 대체 나보고 어떻게 감당하라고." 페퍼는 소파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빈병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미 감당못하고 있잖아요."
"한 번 더 붙잡아 보고 또 거절당한다 한들, 어차피 지금과 다를 것도 없어요."
"아니야. 완전 달라. 훨씬 더 재기불능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 지금도 충분히 재기불능 상태라니까요."
그리고 페퍼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토니는 소파에서 일어나는 페퍼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더욱 고개를 위로 들어야 했다. 페퍼는 상체를 쭈욱 편 채로 토니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니까 당장 씻고, 그 수염도 좀 정리하고, 스킨 로션 말끔하게 바르고, 당신이 갖고 있는 수트 중에 제일 좋은 거 꺼내입은 뒤에, 장미꽃다발이라도 사서 스티브한테 가보라구요. 하릴없이 이러고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나 지금 냄새났어?" 토니는 그제야 자기 팔 어딘가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페퍼는 푸훗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파 옆에 직접 세워둔 빈병들 사이를 교묘하게 가로질러 간 후 토니의 엉망이 되어 있는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서류의 산들이 페퍼의 손에서 깔끔히 정리되어 갔다. 이런 일에 익숙한 지 무척이나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토니는 입고있던 티셔츠의 가슴부분을 쭈욱 잡아당긴 후 그 안의 냄새도 킁킁 맡고 있었다. 아크리액터의 불빛이 더욱 푸르게 빛났다. 토니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서류를 정리하느라 탁탁 소리를 내는 페퍼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토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다 맞았다.
어차피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로저스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한들, 설사 뒤늦게 깨달았다 해도, 어쨌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토니는 입을 열어 페퍼를 불렀다.
"페퍼."
"불렀어요?"
토니는 페퍼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아르마니가 나을까, 톰포드가 나을까?"
페퍼는 토니를 돌아보지도 않고 피식하고 웃었다. "두 벌 다 챙기세요. 스티브에게라면 두 번 도전해도 되는 거니까." 아, 세상에. 페퍼. 정정할게.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야.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
그곳에서는 비가 오고 있었다. 마르고 빨간 흙먼지가 바람결에 일어나는, 하나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도로 일색인 그 땅에 비가 오니, 땅은 순식간에 패이고 질퍽해져 흙들이 뭉쳐 흐르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발치에도 비가 고이고 있었다. 스티브가 신고 있는 군화가 만든 발자국을 따라 비가 고이는 듯하더니 곧 진흙들이 뭉쳐 점점 넓은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내려 군화가 반쯤 물웅덩이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비가 더 심해지면 오늘의 작전에 애로사항이 될 지도 모르겠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더 깊게 썼다. 두건 끝에 고여 있던 물들이 툭툭 떨어져 스티브의 짧은 금발을 적셨다. 비는 차가웠고, 고요했다.
"캡틴. 지원 왔습니다."
"...!"
본부석 천막에 서서 작전상황이 기록 된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스티브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스티브는 그 누군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로 그가 클린트 바튼 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일줄이야. "...바튼." 스티브는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클린트는 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만으로도 왠지 자기가 투입된단 사실을 그에게 비밀로 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싶었단 말씀입니다. 캡틴. "네. 바튼 입니다." 클린트는 눈가에 주름을 지우며 크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스티브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거두었다.
"...정말 깜짝 놀랐어. 자네가 이쪽에 올 줄이야."
"네. 사실은 저도 놀랐습니다. 정말로 여기에 올 예정이 없었거든요."
클린트는 그렇게 말하고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 농담도.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질 않았군. 하긴 길었다고 해봤자 겨우 장기휴가 정도다. 그 정도 못봤다고 사람이 크게 변할리가 없지 않은가. 스티브는 눈을 내리깔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휴가는 잘 보냈나? "덕분에요." 아직 한참 남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복귀가 빠르군."
"아~ 저도 아직 한참 더 쉴 예정이었는데요. 냇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휴가를 강제종료 했습니다."
"...나타샤가 불렀다고?"
"사람을 난폭하게 굴리는 건 그녀의 특기죠. 데스크 직원이 부족하다고 다시 불러놓고 현장으로 돌리는 것 좀 보라고요."
그렇게 말하고 바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후드달린 비옷을 벗어서는 의자에 던지듯 걸쳐놓는다. 스티브는 그가 펄럭이는 비옷 끝에서 주르륵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고 있었다. 바튼은 등에 매달고 있던 활을 빼내어 활의 상태를 점검하듯 활촉 끝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촉을 톡톡 치기를 반복했다.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다 가만히 바튼을 외면했다. 그리고 머리를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손가락 끝이 빗방울로 조금 축축해져 스티브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 나타샤가 자네를 불렀다는 건, 자네에게 현재의 사정을 전부 설명했다는 뜻이로군.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 바튼은 눈썹을 위로 치켜 떠 이마에 주름을 잔뜩 지우며 씨익 웃었다. "정확합니다."
스티브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손이 콧잔등 아래에 가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얼버무리고 싶을 때 취하는 행동이지만, 클린트는 스티브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고 덕분에 신기한 것을 쳐다볼 때의 표정이 되고 말았다. 클린트가 아는 한 스티브 로저스는 무언가를 얼버무리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클린트는 지금 처음 보는 스티브의 표정에서 그와 토니가 손을 잡은 채 모두(어벤저스)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스티브는 클린트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고, 눈동자는 당황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 모든 생경감이 사실은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고. 토니의 "우리 어제부터 사귄다! 이제 캡은 내꺼지롱! 하하하." 라는 외침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가락으로 뺨을 누르면 빨간 게 묻어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 그렇게 당황하면서도 결코 토니를 말릴 생각도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스티브는 새빨간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았더랬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듯이.
그때 참 감동했었는데. 클린트는 눈을 굴리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이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었다. 어쩌면 캡틴에게는 토니같은 제멋대로의 타입인 쪽이 더 잘 진행되겠지 싶었기 때문일까. 그랬는데 헤어지다니. 아쉬워. 얼마나 아쉬운 지 로라에게 제대로 설명도 못했단 말이야. 모든 걸 아내에게 말하는 좋은 남편인 클린트 바튼이 말이야.
"어째서 헤어지셨습니까?"
"...퍽 직구로 묻는군."
클린트의 가감 없는 질문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클린트는 스티브가 한쪽눈썹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여기서 웃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제가 원래 좀 그렇잖습니까." "...그렇지." 스티브는 희미하게 웃으며 클린트와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후드의 끝자락을 타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클린트처럼 나도 이 비옷을 벗고 의자에 앉는 게 좋았을걸. 스티브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출동해야 할 지 모른다, 적들이 비로 인해 흐려진 시야를 틈타 본부에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니 입고 있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발이 차가워져 얼얼해도 군화는 벗지 않는 것이 좋고, 그리고 방패도 언제나 가까이에 두는 것이 좋아. 스티브는 등에 매달아 놓은 비옷 속의 방패를 슬그머니 의식하다, 곧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어째설까..."
토니, 토니.
사실, 지금, 생각나는 건 토니 스타크밖에 없었다. 토니의 웃음이거나, 토니의 발걸음이거나, 토니의 체온이거나,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리고 그런 토니의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티브는 적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거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그에대한 생각밖에는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런 스스로에게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사랑의 경험이 그다지 없는 스티브 로저스로써도 이것이 상사병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실연병이 더 맞는 말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티브는 스스로에게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실연병이니 상사병이니, 토니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본인이 겪을 병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 헤어지자 해놓고 이게 다 뭐하는 짓인지. 스티브는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토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어벤저스 본부에도 머무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 듯 내전중인 나라에 왔고, 그것이 얼마나 치졸한 행동인지 스스로에게 자각이 있는 만큼 눈앞에서 벌어져 있는 일에 단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라는 자각이 있는만큼 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로 그는 이 전쟁에 끼어 있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스티브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클린트는 손안에서 굴리고 있던 화살을 다시 등 뒤 화살 통에 꽂아놓고 한쪽발을 들어올려 발을 꼬았다. 그리고 몸을 좀 더 스티브쪽으로 돌렸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보려고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뭐, 확실히 그사람과 오래 연애하기엔 좀 힘들 거 같기도 하네요." 클린트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토니는,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요? 제멋대로에 잘난 척에, 여자도 너무 좋아하고."
"......"
그리고 일부러 스티브를 자극하려고 조금 사나운 말을 내뱉는 클린트에게로 스티브는 고개를 돌렸다. 스티브는 클린트가 일부러 자신과의 대화를 끌어내기 위해 그런 사나운 말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었으면서도, 클린트가 내뱉은 그 말들에 솔직히 불편한 감정을 안가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닌거 자네도 알면서." 그리고 스티브는 어쩔수도 없이 그렇게 내뱉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눈동자의 푸른빛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별로 그 사람이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네. 헤어지자고 한 건 나였고 그러니까 이별은 전부 내뜻에 의한 거고, ...그러니까, 오히려 나쁜 건 나인거지."
"캡이 헤어지자고 한마디 했다고 정말 헤어져요? 그 인간이 그렇게 순순할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동안 토니도 나에게 섭섭한 게 제법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겠지... 이 이야기 이제 그만 하면 안 되겠나?"
스티브는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통에 그의 긴 속눈썹 밑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까지 했다. 클린트는 한 번 시작한 대화를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아니면 다신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거니와. 어쨌든 클린트 바튼은 스티브 로저스와 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쪽으로 파견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떤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냇에게 혼나는 건 나거든요, 캡. 그러니 조금만 더 말해주세요. 클린트는 허리를 앞으로 숙여 좀 더 스티브에게 집중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캡이 섭섭하게 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볼땐 그런 거 전혀 없었다고요."
"토니가 순순히 당신과 헤어져줬다면, 그건 그것을 당신이 바랬기 때문일 겁니다. 내기해도 좋아요, 캡."
"......"
"이 헤어짐에 토니의 의지는 하나도 없을거라구요."
"......"
그렇죠? 정말 그런 거죠? 클린트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눈동자를 반짝였고 스티브는 클린트가 눈썹을 움직이며 보내는 시선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클린트는 스티브의 무표정 속에 녹아있는 연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을 지을 바에야 헤어지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 헤어지자고 결심한 겁니까?" 클린트는 입을 가리듯 손을 움직여 턱을 괴고서는 그렇게 말했다. 스티브가 크게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클린트는 여전히 입을 가리고 있었고, 스티브는 결국 그러한 클린트를 외면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말하는 쪽이 더 마음 편해지실 거예요. 캡."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네.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니..."
"스티브. 그와 헤어진 지난 두 달 동안 그를 꿈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건 역시 안 헤어지는 쪽이 더 낫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건 진짜 맞는말이라구요." 클린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더는 추궁하는 것도 가엾게 여겨져서. 랄까, 클린트는 더 듣지 않아도 이미 스티브의 진심을 충분히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것이다. 그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슬픈데. 하지만 어째설까. 어째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걸까. 그것까진 알 수가 없군... 클린트는 후, 하고 어깨를 한 번 움직이고는 스티브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가서 탐색팀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캡틴."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비옷을 다시 걸치며 천막을 나섰다. "......" 클린트는 스티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스티브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퍽, 하고, 천막밖으로 나가자마자 클린트의 발끝에서 진흙이 질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엄청 질퍽하네." 아아, 비는 무척이나 고요한데, 고요함에도 불구하고 빗줄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것이다. 클린트는 비의 힘에 상당히 파인 질퍽한 땅을 꾸욱 누르며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
천막 안에 다시 혼자 남아, 클린트가 나간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티브는 곧 눈을 감았다. 클린트가 바깥공기를 천막 안으로 스며들게 한 덕분에 천막내부의 공기는 조금쯤 더 상쾌해진 것 같지만, 그것 못지않게 찬기운또한 스며들었다. 스티브는 긴 숨을 토해냈다. 피부에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에 저항하는 것처럼 스티브의 피부 위 솜털이 파르르 돋아났다. 스티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클린트, 그건. 그건 말일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이런 한심한 나를.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그 날 밤에, 토니의 꿈을 꾸었단 사실을.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는 사실을.
전부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사실은, 정말로.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나에겐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 스티브는 여전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의 사랑고백을 거절했던 어느 과거의 그 날부터 쭈욱, 스티브의 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스티브는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것이다. 스티브는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토니가 짓던 그 슬픈 얼굴을 떠올리며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어느 날부터 스티브는 더 이상 토니에게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단 말을 감추고 그의 사랑고백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스티브는 토니를 자기가 가지고 있어선 안된다는 생각만이 깊어졌다. 토니 스타크를 스티브 로저스에게 갇히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나는 캡틴 아메리카다.
나는 70년을 뛰어넘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다.
나는 몸에 보통 인간이라면 괴물(예를 들자면 헐크같은... 이건 닥터 배너에게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이 될지도 모르는 혈청을 가지고 있다.
대체 이런 몸을 한 내가 어떻게 누군가와 몸을 섞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누군가와 삶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토니가 스티브와 섹스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스티브는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저 키스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알 수도 없는데 몸을 섞는다니, 스티브는 몸을 섞음으로써 견고해지는 감정의 황홀감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마치 스스로를 에이즈 보균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겁쟁이였다. 토니앞에서만은 완전히 겁쟁이가 되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토니에 관해서라면 그저 모든 것이 겁부터 났다. 자기때문에 그가 잘못되길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이 미쳤을 때, 스티브는 자기가 정말로 토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너무 기뻐서 너무 미안해서, 너무 행복하고 너무 슬퍼서.
토니에게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하고, 너무 행복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토니가 조른 섹스를 마지못해 허락하는 척 하면서, 스티브는 겁이 나는 마음을 겨우겨우 감추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토니가 당연하게 준비 한 콘돔을 두 개로 겹쳐 껴라고 말하자, 토니는 스티브의 그 말을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이며 키득대었다. "바보. 두개로 끼면 지들끼리 마찰해서 찢어진단 말이야." 토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스티브도 웃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토니는 모를 것이었다. 토니의 안고 싶다는 말에 스티브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도. 토니가 안전한 쪽은 과연 어느쪽일까 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쪽이 나을까 그의 안으로 넣는쪽이 더 나을까 하고. 그리고 스티브의 생각이 차라리 그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낫겠다고 하는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스티브는 기꺼이 다리를 벌린 것이다. 토니를 향해. 그리고 토니의 땀에 젖은 등을 두 손으로 감싸안으면서도, 그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를, 키스하는 중에도 토니의 입속에 상처가 하나도 없기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섹스 후 지쳐 서로를 끌어안으며 잠들어 있는 와중에도 스티브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를, 토니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를 것이었고, 그리고 스티브는 토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헤어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토니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 스티브는 너무나 슬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음날이 되자, 그와 헤어진 것을 마치 죽음처럼 후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런 거니까. ...그런 거니까 클린트..."
그런 거니까. 그냥 그런 거니까. 스티브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토니를 떠올려서이겠지.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그런 차갑게 식은 얼굴인 것이 계속 스티브의 마음에 걸렸다. 헤어지자는 소리를 듣는 데에 웃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토니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지는 정말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하네.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데. 헤어지자고 말하고서, 그에게 제대로 사과는 했던가. 스티브는 그 때의 기억이 벌써 희미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헤어지자라고 말한 순간, 발아래가 무너지는 듯 한 환상을 충분히 맛본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토니의 방을 나섰는지 스티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본 토니의 굳어진 얼굴이 두 사람은 이제 헤어졌음을 충분히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러니, 토니. 정말 미안하네.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가 꿈에 나올 때마다 그렇게 말하길 반복했던 것이다. 토니. 정말 미안하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는 충분히 바보였다. 꿈에서나마, 토니 스타크가 듣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았다면, 스티브는 꿈속에서 토니를 향해 사과 대신에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로 시작하는 말이라던가. '해'로 끝나는 말이라던가.
뭐 그런 것 말이다.
"캡틴!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그때였다. 천막 밖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빗줄기를 뚫고 나오는 외침은 끝이 갈라질 만큼 강한 감정을 싣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스티브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후드를 잽싸게 둘러썼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그가 입고 있는 비옷에서 그리고 군화의 발끝에서 흙에 더럽혀진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스티브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전신의 근육을 긴장으로 잔뜩 팽창시키면서, 천막을 나섰다. 펄럭. 천막은 어둠처럼 무겁게 흔들렸고, 스티브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
토니는 그 어느 때보다 샤워를 하는 데에 시간을 들였다. 수염도 있는 힘껏 다듬고, 머리정리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어 심지어 손톱까지 말끔히 깎았다. 물론 발톱도 잊지 않고. 그리고 가장 최근에-실질적으로는 이 날이 마지막 데이트가 되었다- 스티브와 둘이서 먹었던 레스토랑 디너 때 입었던 아르마니 수트를 꺼내어 입고, 타이까지 깔끔히 묶었다. 사놓고 아직 한 번도 개시하지 않은 톰포드 수트는 페퍼가 말한 대로 수트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에 깊은 숨을 한 번 토해내고, 토니는 어벤저스 본부로 향했다.
본부가 가까워올수록 긴장이 점점 차올라서 중간부터는 자동 운전으로 바꾸고, 토니는 다시 거울을 꺼내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웃기는군. 스티브는 상대가 수트를 입었건 거지꼴을 하고 있건 그런 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을 거야. 근데 나는 긴장을 하면할수록 점점 겉모습을 정리하려고 드는군. 토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으니 겉모습이나마 진정시키고 싶은 거란 걸 알지만, 토니는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다. 어차피 그래봤자 심장이 뛰는 게 진정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토니는 거울을 뒷좌석을 겨냥해 휙하고 집어던졌다. 젠장. 좋아, 어차피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려 가는 건데, 기왕이면 이렇게 심장뛰는 소리마저 고스란히 다 들려주는 게 좋겠지. 그게 호소하는 데에 더 좋을 거야. 그러니, 스티브. 각오해. 나 완전히 추하게 굴거니까. 완전 멋진 수트차림으로 바닥에 무릎꿇고 당신 왼쪽 다리를 붙잡고 쭈욱 늘어질려니깐 각오하라고. 젠장.
그리고 물론, 그런 토니 스타크의 각오는 전부 헛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는 현재 어벤저스 본부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몰랐던 토니는 나타샤의 앞에서 표정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이 빠지고 말았다. "없... 어?" 나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없어."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앉은 채 잘 차려입어 말끔한-하긴, 이 빅가이는 언제 봐도 항상 말끔했었다. 이런 멋쟁이 같으니- 토니를 올려다보며 나타샤는 쯔쯔하고 혀를 찼다. "대체 캡이 여길 떠난 지가 언젠데."
"왜 이제 왔느냐구. 올려면 좀 더 빨리 오지 않고서."
"겨우 삼주! 겨우 삼주를 못 참고!"
"뭐래는 거야... 캡한테 헤어지잔 말 듣고 그 다음날 바로 한동안 본부로 안오겠다고 메시지 보낸 사람은 누군데?"
"그... 건 분명 나지만..."
"그리고 스티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현장투입으로 빠졌고. 참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닮은점이 있단 말야 두 사람?"
그래서 사귀나? 완전 다른 점에 끌렸지만 결국은 닮은꼴 두 사람이라서 말야. 그리고 나타샤는 어느새 의자 위에 허물어지 듯 앉아있는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긴장이 맥스를 달한 만큼 스티브가 없다는 소식에 완전히 허탈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아... 정말 말도 안 돼." 토니는 그대로 머리라도 감싸 쥐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게 다 장미 꽃다발이 없어서 그런거야. 하나도 빼먹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뭘 하날 제대로 안챙겨서 부정이 탄거라고..." 나타샤는 웃음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뭐야 그 미신 같은 건. 토니 스타크같은 퓨처리스트도 그런 시쳇말을 믿어? 나타샤는 입가를 부드럽게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그렇게 실망할 거 없잖아."
"여기서 스티브에게 연락이 안 닿는 것도 아니고, 나타샤 로마노프에게 그 연락할 권한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야."
"...스티브와 연결해 줄 거야?"
고개를 들어 다시 나타샤를 바라보는 토니의 눈에 희망이 반짝였다. 그러니까, 그럴 거면 진작 좀 달려오면 좋았잖아. 처음부터 헤어지기 싫다고, 다시 생각해달라고 스티브에게 말했으면 되었을 것을 말야. 나타샤는 피식 웃으며 책상이 잔뜩 연결되어 있는 사무실을 빙 돌아 사무실의 가장 앞에 있는 컴퓨터를 기동시켰다. 그리고 나타샤 로마노프의 개인 엑세스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어벤저스의 화면을 불렀다. 그러는 도중, 나타샤는 사무실의 한쪽, 누군가의 책상 위에 꽂혀있는 한 송이의 붉은 장미꽃을 발견했다. 나타샤는 컴퓨터 화면을 켜다말고 그 장미꽃 한송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토니에게로 걸어가며 손으로 꽃의 줄기 가운데를 뚝하고 꺾었다. 토니도 어느새 의자에 일어나 나타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타샤는 생긋 웃으며 토니의 가슴의 행커칩을 뽑아내고 거기에 방금 줄기가운데를 뚝하고 꺾어 짧아진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장미꽃은 꽃잎이 활짝 펼쳐져 있었고, 꽃잎 끝은 시든 곳 하나 없이 짙었다.
"이거면 이제 부정 타는 데 하나도 없는 거 맞지?"
토니는 나타샤를 알고 지내고 처음으로 진짜 그녀에게 모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자기편이란 생각이 든 적이 또 있을까? 토니는 감격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냇." 나타샤는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토니가 손바닥으로 조심히 장미꽃을 감싸는 게 퍽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냇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난 후 다시 컴퓨터 앞에 가서 엑세스를 시작했다. 스티브가 지금 있는 중동의 어느 나라의 본부로 말이다.
그리고 물론 나타샤가 가지고 있는 핫라인은 클린트와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연결이 되어가는 도중이라는 의미의 신호음이 울리고, 나타샤는 컴퓨터 너머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도 컴퓨터 너머로 나타샤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한 기대감과 긴장감. 토니는 마치 스티브에게 할 말을 처음부터 다시 곱씹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클린트와 연결 되어 인터넷 라인이 열리자마자, 클린트의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나타샤와 토니가 기대하던 것과는 딴판인 것이었다.
"블랙 위도우! 미안한데 지금 여기 상황이 좀, 전화 통화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앗!"
"?!!"
그리고, 크게 들리는 폭발음과, 지지직거리는 클린트 바튼의 목소리. 나타샤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토니의 얼굴도 금방 굳어버렸다. "호크아이? 호크아이!" 나타샤는 두 번 반복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폭탄에 의해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뒤섞인 채 클린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블랙 위도우, 그렇게 큰일은 아니니까. 그치만 전화를 받고 있을 여유는..." 또다시 잡음이 크게 났고, 그 때문에 나타샤와 토니는 클린트의 목소리를 정확히 잡아내지 못했다. "지금 캡틴이..." 클린트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마치 조각이 난 것처럼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리고 토니는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왔다. "캡이?" 조각난 클린트의 말 중 가장 정확히 들리는 말을 잡아내는, 토니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샘의 표면같았다. 나타샤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심각해 보이는 나타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꽈악 닫았다. 그리고 왼팔의 소매를 걷었다.
물론, 토니의 왼팔에는 토니가 언제나 차고 있는 바로 그것이 있다. "토니-" 그리고 토니는 나타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을 작동시켰다. 삑,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나타샤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벌써 날아온 토니 스타크의 아이언맨 수트가 어느덧 변형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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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지는 틈을 타, 열 명의 적이 쉴드의 방어막을 뚫고 잠입한 것을 클린트 바튼이 알게 된 것이 딱 오 분 전의 일로, 그가 캡틴을 천막에서 불러내자마자 적 열 명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스티브는 클린트의 몸에 쏟아지는 총탄의 비를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호크아이, 피해!" 물론 스티브의 말이 귀에 닿기도 전에 클린트는 바닥에 몸을 굴려 총탄을 전부 피하고 있었다. 비로 진흙탕이 된 바닥에 몸을 구르면서 클린트는 아 젠장, 어제까지만 해도 로라가 해주는 맛있는 밥 먹으며 따뜻한 침대위에서 애들이랑 뒹굴고 있었는데...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대치상황중에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는 거 아니냐 싶겠지만, 사실 그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적은 약했다. 적이 약하다고 방심할 만한 두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외계인을 상대한 적도 있는 캡틴 아메리카와 호크아이를 상대하기에는 그들은 턱없이 부족한 적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린트는 여유있게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피했고, 그 와중에 스티브는 벌써 작게 만들어진 전장에 뛰어들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세 번째로 방패를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패는 회전하여 캡틴 아메리카에게로 돌아오기 전에 꼭 한 명씩의 적을 쓰러뜨렸다. 스티브는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고이는 족족 얼굴을 닦아내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스티브는 생각했다.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시야가 전혀 확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열 명의 몸으로 쳐들어온 거 보면 그들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다. 게다가 약해. 그럼 이들은 이쪽 전장을 확인하러 들어오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사용된 것인가? 그 와중에도 공격을 쉬지 않는 거 보면, 어쩌면 자살특공작전도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인 건지도. 스티브 로저스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작전 중 하나인 그 특공작전을 속으로 한탄하며, 스티브는 또 한 번 방패를 던졌다. 별이 선명한 방패는 허공에서 무섭게 회전하면서 비를 갈랐다. 또 두 명의 적이 미처 피하지 못해 각각 머리와 배에 방패를 맞고 비웅덩이 속으로 요란하게 쓰러졌다. 어느덧 적은 네 명. 스티브는 점프하여 방패를 한 손으로 받아내는 것과 동시에 남은 적의 모습을 살폈다. 바위 뒤에 서서 클린트가 또 두 발의 활을 쏘았다. 아아, 이것으로 두 명. 두 명 남았군. 스티브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딱 오 분만의 일이다. 순식간에 둘밖에 남지 않은 적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그들의 몸 전체에서 피어나는 당황의 기색을 읽어냈다. 빗줄기는 가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몸을 숨겨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의 실력이 캡틴과 호크아이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막 깨달은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와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스티브는 앞서의 적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쉬지않고 몰아부쳐 그들 모두를 제압할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클린트에게서 신호음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물론 다름 아닌 나타샤가 핫라인으로 클린트에게 통신을 연결한 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음에 잠시 스티브가 정신을 팔린 틈을 타, 두 명 남은 적은 기어코 각오를 하고야 말았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마지막 작전을 말이다. 클린트는 허둥지둥 통신을 연결해 "블랙 위도우! 미안한데 지금 여기 상황이 좀, 전화 통화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라고 외쳤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기회라고 여긴 두 명의 적이 동시에 스티브를 향해 두 개의 수류탄을 던지고야 말았다. 수류탄을 던졌다고 해도, 그들도 충분히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분명 폭탄에 말려들고 말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래, 그것이 바로 자살특공작전인거지. 스티브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두 명의 적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앗!" 클린트는 나타샤와의 통신이 연결 된 그대로 그렇게 다급한 소리를 내질렀다. 스티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달려가 죽음 앞에 후들거리며 눈을 꽈악 감은 두 명의 적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 둘에게 몸을 던져 머리를 낮추게 하고서는 방패를 앞에 내걸고 그대로 전신을 방어하였다. 클린트는 바위에서 점프해 멀찍히 뛰어올라 진흙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수류탄 두 개가 동시에 터졌고, 나타샤와 토니가 들었던 잡음이란 그러니까 바로 그것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틈 사이로 폭탄이 일으킨 흙먼지가 일어났고, 바닥이 폭발에 의해 움푹 패였다. 수류탄에 의해 팽창한 주변 공기가 좀 잠잠해지자 클린트도 벌떡 일어났다. 두 개의 폭탄이 동시에 터진 것치고, 주변의 흙들의 무너짐이 생각보다 범위가 좁았다. 클린트는 덕분에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캡틴!" 얼굴에 묻은 흙을 손등으로 털어내며 클린트는 스티브를 외쳐 불렀다.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폭탄에 의한 연기와 또 조금도 가늘어지지 않은 빗줄기들과, 그 모든 것의 사이에서, 클린트는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사람의 형상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론, 우뚝 서 있는 그것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폭탄에 맞서 두 사람의 목숨과 지켜 낸 캡틴 아메리카였다.
그리고 먼지가 좀 잦아들 무렵, 클린트는 두 명의 적을 발치에 쓰러뜨린 채 방패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캡틴을 똑똑히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클린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쪽 너머에서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호크아이? 호크아이!" 클린트도 그제야 헐레벌떡 대답을 했다. "아... 블랙 위도우, 그렇게 큰일은 아니니까. 그치만 전화를 받고 있을 여유는 없긴 한데, 간단히 말해서 방금 적과 대치했고, 지금 캡틴이 마악 마지막 적을 처리한 상태야. 조금 진정되면 상황보고 다시 할 테니까 일단 끊는다?" 그리고 클린트는 순간의 폭발음 때문에 통신 연결에 조금 혼선이 나있는 상태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말이 전부 제대로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고서 일단 나타샤와의 통신을 끊어버렸다. "캡틴! 괜찮습니까?" 그 뒤 클린트는 큰소리로 캡틴의 안부를 물었고, "난 괜찮네. 호크아이. 자네는 괜찮나?" 캡틴은 클린트쪽을 향해 짧게 손을 흔듬으로써 상황이 일단락 되었다.
폭발이 두 번 연속으로 있었지만 어쨌든 상황은 금방 정리 되었다. 수류탄이라고 하지만 개량을 했는지 폭발범위도 넓지 않았고 규모도 축소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적은 캡틴 아메리카와 호크아이가 금방 다 제압하였고 뒤늦게 나타난 아군들이 모두 그들을 포박한 채로 포로를 묶어두는 장소로 끌고 갔다. 클린트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몇 번 굴러 온몸이 더러워진 것 외에는 별로 다친 곳이 없었다. 스티브는 폭발에 조금 가까웠으므로 맨 살갗 여기저기가 조금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왼쪽의 팔 부분도 찢어져 피가 흘렀다. 클린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캡틴의 다친 부위를 바라보았다. "캡틴. 다쳤잖습니까." 스티브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좀 운이 안 좋았군. 고작 그 정도로 다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스티브는 오른손으로 왼팔의 다친 부분을 꾸욱 눌렀다. 보기에는 피가 많이 흘렀지만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니라서, 스티브가 그렇게 상처부위를 꾸욱 누르는 것만으로 제법 피가 멎어가는 듯 했다. "뭐, 이정도 상처는 금방 나을 걸세." 클린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어서 천막으로 돌아가서 상처치료부터 먼저 하시죠. 캡. 분명 그 정도 상처는 당신이라면 금방 낫겠지만 소독하고 치료하면 그보다 더 빨리 나을 겁니다." 스티브는 클린트가 하는 말에 쿡쿡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알았네." 스티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클린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천막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클린트가 직접 스티브에게 붕대를 감아주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고요한 비를 가르며,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캄캄한 비구름이 잔뜩 하늘을 가리고 있어, 클린트와 스티브는 순간 천둥이라도 치는 듯 한 착각을 받았다.
물론, 그 소리는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아이언맨이 날아오기 위해 발끝과 손끝으로 추진에너지를 쉼 없이 뿜어내고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이언맨은 단숨에 비구름을 뚫고 커다란 빛을 발하며, 비가 오는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어..." 클린트는 아이언맨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 그리고 스티브는, 스티브는
스티브는 물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언맨!" 클린트는 소리쳤다. 아이언맨은 한참 하늘을 날아오다 우뚝 멈춰 서서 그대로 일자로 선 채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스티브는 마치 자기가 뭔가 잘못 보고 있는 것처럼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후드를 썼으나 아이언맨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얼굴 고스란히 빗물을 받아 후드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스티브는 눈을 찌르는 빗방울에 정신없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그인가? 정말로 그가 왔다고? 그리고 정말로, 그가 맞았다. 캄캄한 하늘에 혼자 붉게 빛나는 그가 정말로 맞았다.
그리고 아이언맨은 큰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진흙바닥을 뛰어와 스티브의 앞에 섰다. "스티브! 괜찮아?!" 그리고 토니는 쉘헤드를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스티브는 여전히 벙찐 얼굴로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앗! 이런 젠장, 다쳤잖아?!" 토니는 스티브의 상처를 바로 알아보았다.
"많이 다쳤어? 많이 아파? 괜찮은 거야?!"
"어.. 어어..."
다급한 토니의 표정과 목소리와는 다르게, 스티브는 여전히 어딘가 얼이 빠진 듯했다. 스티브는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토니를 보고 있었다. 토니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젠장, 더 빨리 왔어야 하는건데. 연료의 60%를 날아오는 데에 다 썼어. 하지만 그래도 이 이상의 속도는 안 나더라고. 대체 왜이렇게 멀리 있어서 날 걱정하게 만드냐 그래, 이 망할 영감아."
"...어떻게 이런 델 다 왔나?"
드디어 정신을 차린 스티브가 그렇게 말했다. 토니는 스티브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어떻게 이런델 다 왔느냐니!"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 왔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내가 여기에 있는데 자네가 여길 왜 와."
"그, 그건."
그거야, 그건.
그건.
그 대답에 타당한 이유는 정말이지 하나밖에 없었다. 토니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어느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역시 좀 슬퍼보였다. 토니는 젠장,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그 표정이다. 스티브. 또 그 표정이야. 나를 볼 때마다 종종 짓곤 하던 바로 그 표정 말이야. 어째서 그렇게 슬퍼 보이는 얼굴이야? 왜 날 보면 늘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구. 대체 뭐가 그렇게 널 슬프게 하는 건데, 대체 나의 뭐가 널 슬프게 만드는 거냐고.
나는 널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널 슬프게 하고싶지 않은데, 대체 어떻게 하면 좋으냔 말이야.
"보고 싶었으니까."
"...!"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드디어, 삼주동안 그렇게도 앓았던 진심을 내뱉었다.
그래, 다른 것은 없었다. 다른 이유도 없었다.
토니 스타크의 진심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었으니까."
"토니..."
"그래서 왔어."
"가라고 하지 마. 당신이 그렇게 다쳤는데 내가 어떻게 가." "......" "사실은 처음부터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토니의 솔직한 말에, 스티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기뻤다. 솔직히 너무 기뻤지만, 대놓고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토니를 위해서 토니를 잘라내려 했다. 아니, 토니를 위해서란 핑계를 대며 사실은 내가 겁쟁이라서 먼저 도망쳐버리려고 한 거였는데. 그런 자기자신이 뻔뻔스럽게, 어떻게 토니의 진심을 마냥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스티브는 웃거나 울거나 하는 대신에, 그저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뭐라 할 말도 찾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토니를 어쩔 수 없는 눈으로 똑같이 바라보며,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는 것 같았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토니.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난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견디지 못하고 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티브. 대체 왜 그렇게 슬픈 눈이야."
"...토니, 나는..."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목이 메였다. 스티브는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를 빗속에 저렇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저렇게 혼자 슬퍼하게 두고싶지 않아. 하지만 토니는 당장 스티브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스티브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 두려움은 당장 토니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다가가면 그를 두렵게 만들고, 도리어 그를 멀어지게 할 것 같아 토니는 당장에라도 스티브에게 뛰어가려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대로 스티브를 꽈악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진심을. 토니는 영영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울적해 했다.
그러다 문득, 나타샤가 준 장미꽃에 생각이 미쳤다. 맞아, 그건 나타샤가 스티브에게 주라고 준비해준거야. 그거면 틀림없이 스티브도 이해하게 될 거다, 지금 나의 진심을. 생각이 나서 다행이야. 토니는 금세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급한 마음에 수트차림 그대로 아이언맨 수트를 걸쳤으니 장미꽃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달려 있을 터였다. 토니는 서둘러 아이언맨의 쉘헤드를 벗어내고 가슴부분의 파츠도 떼어냈다. 그러자, 아, 장미꽃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긴 거리를 한계속도로 빠르게 날아온 통에 장미꽃은 밀려오는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온통 시들어 있었다.
장미꽃은 여전히 붉었지만, 커다랗게 피어있었던 것이 상당히 숨이 죽어버렸다. 꽃잎도 몇 장 떨어진 채였으며, 남아있는 것도 끝이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토니는 꽃을 내려다보며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아 이럴 때에는 정말이지 억만장자 조만장자따위도 다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째서 과학자는 마법사가 아닌 걸까. 마법사라면 지금 당장 장미꽃 백송이를 뚝딱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과거로 돌아가, 장미꽃 한다발을 깜빡한 자기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정신차리고 꽃집에 들르라고 경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자리에 서서, 마법사도 뭣도 아닌 토니 스타크는 그저 그 시들어버린 장미꽃 한 송이를 스티브에게 건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토니는 가만히 자신의 가슴에 달린 시든 장미꽃을 들어, 스티브에게로 내밀었다.
"스티브."
"......"
스티브는 장미꽃을 바라보다, 문득 눈물을 한 방울 떨구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스티브는 진심으로 이 눈물이 그저 빗방울로 여겨지기를 바랬다.
빗물이 쏟아져 남은 꽃잎마저 비를 견디지 못하고 애처롭게 고개를 숙이는 붉은 장미꽃. 스티브는 그것보다 더 반짝이는 것은 이때까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스티브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 장미꽃이 정말로 자기를 위해 준비된 것이란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내 것이어도 괜찮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내것이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그렇게 말했더니, 토니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바보 같으니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시 내 것이 되어준다면, 이런 것따위 매일이라도 안겨줄 수 있어."
그리고, 토니의 그 말에, 스티브는 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눈물도 또 떨어졌다. 그래서 스티브는 어쩔 수도 없이 다시 또, 이 눈물을 들키지 않기를, 그저 빗물로 여겨지기를 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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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는 조용히 천막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타샤에게 문자를 쳤다. '두 사람 다시 화해했어. 진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네.' 클린트 바튼의 문자를 치는 속도는 물론 현대인답게 무척이나 빨랐고, 덕분에 나타샤가 혼자 초조해하는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었다. 기왕이면 수줍게 장미꽃을 주고받는 두 아저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줄까도 했지만, 비가 와 시계가 나쁨으로 그것만은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저 두 사람이 화해했으니, 나는 다시 장기휴가를 떠나도 되는 게 아닐까? 클린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빗줄기가 조금씩 얇아지고, 날이 천천히 개기 시작했다.
클린트에게서 온 좋은 소식이 적힌 문자 메시지를 읽으면서, 나타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금세 이럴 거면서." 나타샤는 지체하지 않고 페퍼의 연락처를 눌러 클린트에게 받은 것과 비슷한 말이 담긴 메시지를 작성했다. 토니가 어벤저스 본부에 가고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먼저 나타샤에게 메일을 보낸 것은 페퍼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도 그동안 토니를 달래느라 나타샤와 비슷하게 마음고생을 한 게 틀림없으리라. 나타샤는 어서 그녀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송신." 나타샤는 그리고 송신버튼을 꾸욱 눌렀다. 휴우, 다시 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가볍게 매달려 있었다.
나타샤에게 온 좋은 소식이 적힌 문자 메시지를 읽으면서, 페퍼도 물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금세 이럴 거면서." 페퍼 또한 그렇게 말했다.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아주 조용히 서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고요한 키스는 마치 그 날 밤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꽃은 다소 시들었지만, 여전히 붉었고,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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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는 바스로브를 입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토니의 침대는 여전히 건장한 두 남자가 눕기에도 공간이 남을 만큼 아주 컸다.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 토니는 매일같이 스티브에게 장미꽃을 배달시켰다. 스티브가 이제 됐으니 그만 보내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스티브가 그렇게 전화를 한 뒤 토니는 망설이지 않고 스티브를 찾아왔다. 당신 일은? 이란 스티브의 질문에 그런 무드 없는 질문은 하지 마, 라고 일축한 뒤 토니는 스티브의 허리를 끌어안고 막무가내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자기 방에 밀어넣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잘 정리된 커다란 침대를 바라보며 잠시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곧 자신이 토니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를 정직하게 말했다. 스티브의 고백에 잠시 벙쪄 있다가, 토니는 곧 크게 웃었다. 하하, 겨우 그런 거 때문이었어? 무슨, 당신이 병균도 아니고, 나한테 뭔가를 옮길리가 없잖아. 하하 정말이지. 토니의 태도는 스티브의 고민을 별 것 아닌 걸로 만들어버렸고, 그런 토니의 행동에 스티브는 아주 조금 상처받았다. 하지만 곧, 스티브도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결코 상처를 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토니의 말대로 정말 별 것도 아닌걸로 그동안 혼자 끙끙 앓아온 게 아닐까 싶어져서, 정말이지 그동안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토니는 스티브의 웃고 있는 입술에 문득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화해섹스하자, 고 속삭였다. 스티브는 조금 뺨을 붉힌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토니의 말에 동조하듯이, 토니의 입술 사이로 자기가 먼저 혀를 밀어넣었다. 오오. 토니는 기뻐하며 스티브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그리고 각자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먼저 샤워를 끝낸 스티브가 이렇게 바스로브를 입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토니가 뒤따라 나와, 언젠가 처럼 스티브의 젖어있는 머리를 매만졌더랬다. 스티브는 고개를 돌려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또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있었다. 스티브는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이지, 이젠 됐다니까. 토니도 눈꼬리 끝을 가늘게 하며 웃음지었다. 그리고 들고있던 장미꽃을 침대의 어딘가에 내려놓고 스티브의 입술을 더듬었다. 내 사랑을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말이지. 또 당신한테 헤어지잔 소리는 듣고싶지 않단 말야. 토니가 입술을 맞부딪힌 채 그렇게 속삭이자, 스티브가 조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하네. 스티브도 토니와 입술을 포갠 채 그렇게 속삭였다. 토니는 코끝으로 스티브의 코끝을 문질렀다. 젠장. 사과받자고 한 소리 아니라고. 괜한 말 했네, 내가. 내가 더 미안해, 스티브. 토니가 그렇게 말하자, 스티브는 또 금방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을 참고 있으려니 어쩔수도 없이 코끝이 붉어졌다. 토니는 스티브의 빨개진 코 끝에 쪽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 다시 스티브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스티브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토니는 키스하는 도중, 스티브를 계속 보고 있었다. 스티브의 높은 콧날과 희미하게 떨리는 도톰한 입술과, 그리고 파르르 흔들리는 긴 속눈썹을 끝까지 말이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의 입술 사이를 혀로 톡톡 쳐서 그가 입을 벌리게 하고는, 스티브가 조심스레 입을 벌리자마자 그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를 밀어넣었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움직이자. 그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그렇게 생각하며, 토니는 길고 긴 딥키스를 나누었다. 스티브와 함께.
사랑해라고 몇 번 말하면 그가 안심할까, 어느덧 눈을 감고 토니는 생각했다.
이제는 후회하지 말아야지. 그렇게도 생각했다.
토니는 이제 스티브가 원할 때 항상 옆에 있을 것이었다. 그가 바쁘면 그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고, 스티브와 만나지 못하는 몇 주 동안 너무 외로워서 못견디겠다고 메시지를 잔뜩 보낼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 함께 살아달라고도 조를 예정이었다. 언제나 그를 마중하기 위해서, 또한 그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위해서. 토니가 소유하고 있는 그 많은 별장 중 어느 곳에서, 아니면 스티브와 함께 새집을 고르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스티브와 돌아갈 장소가 같다는 게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당신과 함께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고 물론, 너도 그 사실에 행복해한다면,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없을 게 분명하다.
스티브와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면.
그럼 난 매일 아침마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너의 얼굴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분명 이순간이 영원할거란 그런 꿈을 꿀 것이다. 한 번 더, 꿈꿀 것이다.
그리고 네가 여전히 나의 남자일 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조를거야.
내가 여전히 너의 남자일 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줄거고.
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행복한 미래밖에는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것일까. 토니는 스티브의 어깨를 더욱 끌어안았다. 질끈 감고 있는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힐 것 같아, 토니는 천천히 입술을 떼내었다. 스티브가 붉은 입술을 조금 헐떡이며 거칠어진 숨을 토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토니는 한동안 스티브의 목을 끌어안은 채 숨을 고르는 스티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스티브가 토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스티브와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토니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스티브의 뺨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스티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토니의 목소리에 너무나 기쁨이 가득해서, 스티브의 가슴까지 다 벅차올랐다. 스티브는 자신의 얼굴에 쏟아지는 키스의 비를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토니." 아, 내 목소리에도 행복이 가득함을, 토니도 눈치채어 주기를.
그리고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걸치고 있는 것을 벗겨내기 시작하였다.
- done
커미션 넣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공개허락두 감사드리구요 헤헤. 말씀하신 대로 브루스 마노의 노래를 컨셉으로 잡고 썼는데, 마음에 드시다 해서 저도 넘나 기분이 좋아요 희희.
요새 토니스팁을 쓰면 의도적으로 시빌워는 빼버린(...) 시간대 쯔음이란 설정으로 글을 씁니다. 이유는... 내가 말안해도 다 아시겠지...../_
커미션은 언제나 받고 있습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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