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Fool 

 

 토니 스타크는 나타샤 로마노프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상태였다. 나타샤 로마노프가 바로 어제 발견한 스티브 로저스의 어떤 것에 대해서. 그 내용은 정말이지 그것보다 더 웃긴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토니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 말을 토니에게 옮긴 나타샤도 이것보다 더 재밌는 일은 그동안 없었다라는 심정으로, 이렇게 재밌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지! 했던 것에 틀림이 없다. 하여간 그 일은 정말이지 현재의 토니의 삶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얼마나 커다란 동기였으면 심지어 회의중에서도 그 스티브에 대한 일이 생각나 토니는 저도모르게 풋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회의에 모인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중역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갑자기 배꼽을 쥐고 두 발을 동동거리면서 박장대소하는 토니를 쳐다보았고 그와중에 발표를 한창 하던 중의 회사원 한명은 방금 자기가 한 말 중 대체 어느부분이 웃겼던거지하고 안색이 창박해지고 말았지만, 그자리에 있던 페퍼만은 유일하게 '토니가 지금 눈앞의 회의에 눈곱만큼도 집중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지금 토니를 회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일이 뭐지... 궁금해하면서.

 

 나타샤가 말한 일이란, 스티브 로저스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어떤 '수첩'에 관한 것이었다.

 

 그 수첩은 다름아닌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해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이 알아야한다고 판단한 21세기의 필수목록을 기록한 바로 그것이었다.

 

 랩실에 혼자남아 남은 작업(=취미생활)을 마저 하면서도 한번씩 손을 멈추면서, 토니는 스티브의 그 수첩을 떠올리며 킬킬대었다. "아, 나참나. 세상에 이런일이. 진짜 누굴 죽이려고 캡시클 그 사람 참..." 저도모르게 왠만하면 거의 하지도 않는 혼잣말마저 읖조리면서 토니는 스티브의 수첩안에 있는 내용의 철자하나하나를 더듬으며 마구 스티브를 비웃었다. 토니는 간간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나타샤가 자기에게 옮겼던 말들을 연거푸 떠올렸다. 나타샤가 보낸 문자의 내용(토니와 나타샤는 메일친구였다, 화제거리가 오직 'cap'뿐인.)을 대충 간추리자면, [나도 솔직히 수첩안의 내용을 처음부터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star wars/trek 그 한줄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내 배꼽이 내배에 무사히 붙어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러니까 언제 한 번 토니가 스티브를 만날일이 생기면 그에게 광선검이라도 하나 선물해주길 바란다, 당신 돈있으니까 진품으로, 아니 그전에 워즈, 트렉 양쪽 중 어느쪽 팬이 되었는지부터 알아야할까] 라는 것이었다. 토니는 세밀한 철사 하나에 대한 납땜작업을 하다가도 도저히 웃겨서 손이 부들부들 떨려 결국 양쪽에 들고있던 도구일체를 전부 내려놓고 눈을 보호해주는 안경을 벗으면서 "푸하하하하하" 대폭소를 터뜨리며 책상위에 코를 박고 두 손으로 책상을 마구 내리쳤다. 오늘만도 벌써 네번째의 박장대소였다. 하지만 토니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토니 스타크의 머릿속은 쉴새없이 여러가지의 현대에 관한 필수목록(이라고 스티브가 생각하는 목록)이 적힌 수첩을 뒤적이며 끙끙 앓아대는 스티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첩을 팔랑이면서 볼펜심 꾹꾹 눌러대며 또 새롭게 알게된 단어를 적어가면 갈수록 점점 칸이 모자르기 시작하는, 그리고 그 수첩에 적힌 글들을 뿌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스티브, 단어에 밑줄 좍좍 그어가며 동그라미까지 쳐댈 모범생 스티브 로저스! 사람살려!!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너무 웃은 나머지 배에 근육통이 생길 지경이야아악!!!! 토니는 아예 랩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대기까지 하였다. 최고야. 넌 정말 최고라고. 이렇게 단지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라니. 토니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사람이 그 전에도 달리 있었을까.

 내 삶속에서.

 

 "...하하. 이런 세상에. 하아. 캡시클..."

 

 토니는 중얼거리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 캡틴 아메리카의 사진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사진 속의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반듯한 군인복장의 스티브 로저스.

 

 토니는 문득 웃음끼 하나 없는 얼굴로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게 되었다. 무의식중에 자각하고 있었다. 토니도. 이렇게 문득 캡틴의 사진을 내려다보게되고나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나면 엄청나게 시간이 흘러있어 깜짝 놀랄 정도로, 한없이 그의 사진만을 바라보고 있게 된다는 것을.

 

 

 토니 스타크는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랩실 테이블 위에 스티브 로저스의 사진을 장식해놓은 그 날의 자기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왜 그랬던걸까? 하여간 토니는 서재의 아주 구석진 곳에 거의 버려두었다시피했던 오래된 앨범속에서 그의 사진을 처음 발견했을때에도 그렇게 거의 한나절동안을 가만히 사진속 그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오래된 앨범을 뒤져볼 생각을 했던 것자체부터가 스티브 로저스, 그 남자 때문이었다. 토니는 그 날 자신의 애차를 타고 스타크타워로 돌아오는 내내, 자기와는 반대편의 길로 나아갔을게 뻔한 그남자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속에 빠져 있었다. 차를 타고 그에게서 멀어져가는 그와중에서도 계속 머릿속에 엉겨있는 휘날리는 남자의 금발. 남자는 아무런 아쉬움없이 가벼운 악수와 함께 미련없이 토니에게서 멀어졌고, 그를 외면하면서 한치 망설임도 없이 바이크에 올라타 고속도로를, 그 고속도로의 고속도로 너머로 빠르게 사라졌었다. 토니 스타크는 그남자의 그 미련없이 흘러가는 시선을 낚아채고 싶어한 자기자신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데에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술을 마시며 거실을 서성이고 나서야, 그남자를 다시보고싶다라는 자신의 감상을 겨우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 그것은 정말로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힘든 감정이었다. 토니가 조금이라도 더 나이를 덜 먹었다면 한 십년 정도는 오기로 부정해버렸을지도 모를 마음이었다. 그의 시선을 나에게로 고정시키고 싶다니.

 

 그 남자를 계속 보고있고싶다, 라니.

 

 자신의 감정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넘기고 나자, 토니는 이제 조금 더 솔직하게 스티브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편안하게. 그러자 토니는 점점 더 스티브 로저스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이 알고싶어졌다. 이번 일 도중에는 거의 보지 못했던 캡틴 아메리카 이외의 모습들부터 시작해서, 하여간 여러가지를. 그리고 토니는 생전 들여다보지도 않던 아버지의 오래된 앨범들을 하나씩 꺼내어 뒤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토니는 그에 대한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종류든지간에 그를 파악할 수 있을만한 것들이.

 

 그래서 발견하게 된, 이것은 그 하워드 스타크의 앨범속에 잠들어 있던 단 하나의 사진.

 

 지금과 다른점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운 부드러운 눈매와, 그 눈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굳어 경직된 입술. 목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단단하게 조여져있는 군복의 반듯함. 상반신이 사진의 프레임 밖으로까지 뻗어있고 곧은 목줄기에 힘줄이 솟아있다. 토니는 사진위의 먼지를 걷어내는 것처럼 왼손으로 캡틴의 얼굴을 훔쳤다. 사진의 미지근한 감촉이 토니의 왼손 엄지손가락 지문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흑백의 속눈썹위를 스치는 왼손의 엄지손가락이- 꼭 70년전의 스티브 로저스의 속눈썹 감촉을 상상하는 것처럼 긴장하였다.

 

 

 

 토니는 처음 스티브의 사진을 자신의 랩실에 장식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새 자기가 자신의 책상위에 턱을 걸친 채 사진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 허리를 곧추세웠다. 토니 스타크는 머리를 긁적이며 들고있던 액자를 내려놓고 괜히 사진속의 스티브 로저스의 이마위를 툭하고 손가락으로 내리쳤다. 반동에 이기지 못하고 액자가 뒤로 넘어가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머리위로 침묵의 말풍선을 띄우며 토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웃기다. 웃긴일이야. 이건 정말 최고로 웃긴 일이라구.

 

 넌 분명 하루종일, 날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없을텐데

 난 요새 거의 모든 시간에 꼭 너를 떠올려.

 

 "...이건 뭔가 대단히 불공평한 느낌인걸."

 

 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하루종일 그것을 떠올리며 웃어대질 않나. 그전에 너의 사진을 발견해서 솔직히 기뻐하며 그걸 액자에 꽂아두기까지 했었지. 그리고 난 요새 생각날때마다 그 사진을 봐대고 있다구. 너의 속눈썹이 비정상에 느껴질만큼 길어서 거기에 연필을 몇개까지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엄청 낡아빠진 생각도 심심치않게 한단말이야. 그러나 스티브 로저스는 토니 스타크에 관한 생각을 딱히 떠올리거나 하지는 않을게 분명하다. 그가 그럴만한 이유가 없으니까. 나를 떠올릴 이유가 없다니. 그럼 나는 뭐 떠올릴 이유가 있어서 너를 생각하고 있는 줄 아나. "......" 토니는 가슴언저리가 뜨끔하고 작은 바늘에 관통된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이미 없는 심장의 비어있는 공간에 물을 잔뜩 마신 솜이 꽈악 끼어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런 생각만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좋을리가 없다.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해. 스트레스 해소가 될만한 일이. 토니는 랩실위에 쌓여있는 자신의 취미생활일체를 바라보았다. 저것도 기분전환의 좋은 것들이지만, 하지만 뭔가 좀 더 획기적인 것은 없는걸까. 한 방에 묵은때를 화악 벗길 수 있는 엄청난 것말이야.

 

 "...!"

 

 그리고 토니의 두 눈이 문득 달력에 가 닿았을 때, 토니는 재미있는 일을 떠올린 7살의 개구쟁이의 그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내일이 4월 1일이라는 것을 그때야 눈치챈 토니 스타크는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그야말로 한 방에 묵은때를 화악 벗길 수 있는 엄청난 것을 말이다.

 

 "내일은 캡틴을 직접 찾아가봐야겠는걸."

 

 

 

 

 

 

 

 

 눈을 뜨자마자 저혈압의 잠투정도 부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재빨리 샤워를 마친 후에, 몸단장하고 양복을 빼입고 마무리 향수까지 뿌리면서 토니는 "자비스, 나 오늘 어때?"라고 실없는 질문을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토니는 자신의 애차에 타자마자 스티브 로저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계가 가리키길, 지금은 아홉시 삼십 이분, 아홉시 삼십 이분 이초, 아홉시 삼십 이분 삼초, 아홉시 삼십 이분 사초.... 스티브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토니. 자넨가?] 토니는 자신의 차에 붙여놓은 전화기능의 스피커에서 잡음하나 없이 깔끔하게 귀까지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굿모닝! 캡. 좋은 아침이야, 21세기 맨하탄의 아침은 어때?"

 

 스피커 너머로 스티브의 속삭이는 것처럼 쿡, 하고 웃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가 왠지 간지러워지는 웃음소리다.

 

[70년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좋은 공기였네. 토니. 이른 아침부터 왠일인가? 자네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얼굴을 보지않아도 느껴질만큼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이 그렇게 티가 나나. 토니는 신이나서 저도모르게 스피커 너머에까지 들릴정도로 큰소리로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곡명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하여간에 왼팔과 왼팔을 맞잡고 신나게 엉겨붙는 스탭을 밟으며 허리를 돌리면 딱 좋을 것 같은 유쾌한 곡을. 토니는 오늘 스티브를 만나 그를 놀려댈 생각에 가득차 있었고, 그 가득찬 생각은 공기를 먹은 풍선처럼 점점 더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아 말야 캡틴. 오늘 내가 너를 위해서 하루를 일부러 빼놨거든. 실은 내가 냇에게서 전해들은바가 있어서 말이지."

 

[? 그게 무슨 소린가?]

 

 "당신 요새 21세기에 대해 공부한다며. 자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21세기의 아이콘 중 하나가 바로 토니 스타크, 스타크 인더스트리거든? 아, 아이콘이 무슨 뜻인줄은 아나?"

 

[아이콘 뜻 정돈 알고있네. 그리고 토니, 자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의외로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자네에 대해 알고있을걸.]

 

 "?"

 

 뒷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토니는 어쨌든 개의치 않아하고 신나게 말을 이어댔다.

 

 "아 내말은, 자네에게 나에 대해서 알려주겠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21세기에 대해 알려면 나같이 21세기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직접 배워야한다는 바로 그말이란 말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캡시클, 실은 너의 아파트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가서 내가 오늘 너에게 꼭 좀 알려주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려고, 아 그에 필요한 물건도 물론 사갖고 갈 예정이고, 음, 사실 물건들은 이미 다 샀고 지금은 깡시골 브루클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있지만 말이야. 하여간 그래서 내가 곧 도착할테니까 너보고 어디가지말고 아파트에서 날 기다리라는 그 말이야. 이봐, 듣고있어? 캡? 캡?"

 

[하아. 듣고있네. 그러니까 지금 자네가 여기 오고있는 길이라는거지?]

 

 "맞아. 바로 그거야. 잘 알아들었네 캡. 아마 나 두시간 안 되서 도착할테니니까."

 

[...그런 일을 당일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리 좀 말해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하고, 대접할거리도...]

 

 "하하하! 그런 건 필요없어. 캡시클도 참. 먹을게 필요하다면 내가 지금부터 사들고 갈게. 치즈버거 몇 개 먹을거야 캡틴?"

 

 스피커에서 한동안 침묵이 소리처럼 흘러나와 토니의 차안을 가득메웠다. 그리고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터져나오는 헛웃음소리. [하나면 충분하네. 토니. 그래. 그럼 기다리지.] 그래. 기다려. 날. 그리고 '저것'들을. 토니는 전화를 끊고난 후 자신의 뒷좌석에 잔뜩 쌓여있는 물건들을 백미러로 쳐다보면서 씨익 웃음을 흘렸다.

 

 

 

 

 

 

 

 "캡틴! 나왔어! 캡틴의 영원한 친구 토니 스타크! 이 문 좀 열지!!!"

 

 토니는 요란하게 아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벨을 누르지 않고 굳이 주먹을 쥐고 쾅쾅 내려쳐 낡은 브루클린 한구석의 아파트의 문 하나를 지탱하는 경첩까지 덜그럭거리게 만든 것이었다. 스티브는 토니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않았다, 어쨌거나 문이 부서지기 전에 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오게. 토니." 스티브는 입으로는 세이 헬로를 말하면서 표정으로는 대체 그렇게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무슨 속셈인건가 토니 스타크... 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토니는 그런 스티브의 얼굴을 향해 싱글벙글한 얼굴을 날리면서 "캡틴! 오랜만이야 여전히 미남인거 보니 잘지낸 것 같네."하고 말하기 무섭게 스티브의 몸을 요란하게 밀어내고 남은 공간에 자신의 몸을 아파트 현관문 안쪽으로 구겨넣었다. "토니! 이 짐들은 다 어떻게 된건가!" 그런 토니에게 밀려나가며-정확히 말해 토니가 들고있는 짐들에 의해 밀려나가진-스티브는 당황하여 문 안쪽과 바깥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토니가 걸어온 길을 눈으로 쫓았다. 토니 스타크는 무언가 잔뜩 짊어진 채 스티브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스티브는 그런 토니가 바닥에 흘려버린 몇 개의 구두를 집어들고나서야 아파트의 현관문을 닫을 수 있었다.

 

 쿵, 이라고까지 표현하면 좀 오버지만, 어쨌든 토니는 들고있던 커다란 포대자루를 카펫이 깔려있는 스티브의 아파트 바닥에 쿵하고 내려놓았다. 토니가 아 무거웠다 같은 말을 대충 흘리며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할때에 스티브는 그런 토니를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 그대로 팔짱을 고쳐 끼고있었다. 토니는 스티브가 들고있는 반짝이가 뿌려져있는 여성용 힐이 달린 구두를 낚아채듯 돌려받고는 "아 미안미안, 이걸 떨어뜨린 걸 몰랐네." 그것과 함께 포대자루 안의 물건들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토니, 자네 이게 다 무슨 난린가... 이것들은 다 뭔가?" 토니가 가져온 것을 궁금해했다. 토니는 포대자루 입구를 넓히며 씨익하고 웃었다.

 

 "아, 이것들. 선물이야."

 

 "? 무슨 선물?"

 

 "이것참. 70년동안 냉동된 인간은 이렇다니까. 오늘이 무슨날인지 이렇게 캄캄하니. 내가 당신 이럴까봐 걱정돼서 새벽같이 이 깡시골까지 쫓아온 거 아니겠어?"

 

 토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스티브는 점점 눈앞의 남자가 대체 무슨말을 하고있는건지 이해 못하는 사람의 눈이 되어갔다. 토니는 스티브의 그 멍한 얼굴을 아래에서 바라보며 배를 붙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싶어지는 걸 진짜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봐 영감님. 내가 아까 전화로 그랬잖아. 당신이 21세기에 대해 공부하는 것에 도움을 주겠다고. 그리고 21세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바로 오늘, 에이프릴 풀이란 날이거든? 그래서 내가 오늘에 대해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

 

 스티브는 토니의 말에 "...?"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어 달력을 돌아보았다. 스티브가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은 분명히 4월 1일, 화요일이다. 토니는 달력에서 눈을 떼고 다시 토니를 바라보았다.

 

 "에이프릴 풀? 4월 1일.. 오늘을 두고 그렇게 부른다는 말인가?"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4월 1일은 현대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이벤트를 벌이는 날중 하나인데, 뭐 정식명칙은 April Fools’ Day라고 해서. 하여간 에이프릴 풀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현대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거거든. 모처럼 현대에 대해 여러가지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런 것도 알아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말야."

 

 "하, 하아."

 

 그리고 토니는 곧 포대자루 안에 있는 것들을 요란하게 끄집어 내었다. 스티브는 곧 토니에게 '그런데 그 4월 1일, 에이프릴 풀이라는 날이 대체 무슨 이벤트를 벌이는 날이기에 자네가 들고온 물건에 여성용 힐이 포함되어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참이었는데, 토니가 물건을 요란하게 쏟아내자 스티브는 그 내뱉으려던 질문을 저도모르게 꿀떡 집어삼키고 말았다. 왜냐하면, 토니가 꺼내는 물건들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부 다 여성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나게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소매없는 드레스부터, 사선으로 이어져있는 망사스타킹이나 진주가 길게 이어져있는 목걸이도 나오고, 세일러칼라의 밑단이 넓에 팔락이는 셔츠, 주름이 잔뜩 들어간 원단에 커다란 꽃송이가 점점이 퍼져있는 쉬폰원피스, 개중에는 밑단이 너덜너덜하게 잘려져있는 청으로 된 핫팬츠도 있었다. "아니 이게, 이게 다 뭔가?!" 여성용 구두가 포함되어있다 어떻다 할때가 아닌데? 그냥 다 여성용품들이잖아? 스티브의 당황을 나몰라라하고 토니는 신이나서 스티브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 캡시클!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걸 얼른 골라봐!" "?!" 뭐, 뭘 고르라고!? 스티브는 뭔가 휘파람을 불러대며 신나게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듯이 물건 사이사이를 헤집는 토니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저도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대체, 고르라니 뭐, 뭘..."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스티브는 당황하는 와중에서도 눈을 빛냈다. 스티브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그렇군. 에이프릴 풀이란 건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스러운 물건을 선물하는 그런날인가보군?" 나에게 선물받은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던 쉴드의 여성진들이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주려고 선물들을 직접 골라 사온거구나. 토니는 참 배려심이 넘치는군. 스티브는 제멋대로 그렇게까지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그리고 물론 스티브의 그런 생각들을 토니의 정색이 한순간에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지만. 스티브는 겨우 찾은 답을 한큐에 틀렸다고 말한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당황스러워하였다.

 

 "아니라고? 그럼 대체 이 많은 여성물건들은 다 뭐하러 가져온건가."

 

 "뭐하긴. 당신이랑 내가 쓸거지."

 

 "?! 하아?!"

 

 순간 스티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는데, 토니는 스티브의 그 의심을 풀어주기 위한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토니는 스티브의 눈앞에 다시 한 번 드레스를 넓게 펼치며 또박또박 말 옆에 ''을 일일이 붙여대는 듯이 모든 단어를 강조해 내뱉었다.

 

 "당신이랑 내가 입고, 신고, 달고, 걸고, 할 것들이라고."

 

 "하아?!!!! 왜 그런 일을 해야하는데!?????"

 

 내가 왜 이 거대한 육체에 어울리지도 않을 이 많은 여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을 입고 신고 달고 걸고 해야한다고!?

 

 그리고 당황하여 창백해진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향해

 

 매우 담담함을 가장한 토니 스타크는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에이프릴 풀이란 게 그런 날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일부러 덩치가 큰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엑스라지사이즈의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번쩍 위로 집어들고, 토니 스타크는 씨익하고 기분좋은 웃음을 스티브 로저스에게 흘려보였다.

 

 

 

 

 

 

 

 

 "...그래서 이런 사진이 이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바로 그 말이로군요."

 

 "......"

 

 나타샤의 표정은 빙판위에 다시금 고이기 시작하는 냉기 그자체였지만 사실 그것은 나타샤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기 위한 필사적 노력의 반동으로 나타난 표정일 뿐이었다. 아무리 나타샤지만 이미 쿡찌르면 그대로 픽쓰러질 듯한 안색의 스티브를 앞에두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적어도 아무렇지도 않은척이라도 해줘야. 스티브는 나타샤앞에 선 채 새빨개진 얼굴을 푹숙이고 넓은 어깨를 좁게하고서는 하여간 나 지금 이자리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간이라도 내놓겠다는 표정으로 뻘뻘 떨고 있었다.

 

 "굉장하다, 스티브가 입고있는 샤넬드레스..."

 

 "......"

 

 물론 스티브 로저스에게는 죄가 없었다. 스티브는 토니 스타크가 시킨대로 했을뿐이다.

 

'에이프릴 풀이란 일년에 딱 한 번 남성이 여성의 365일동안의 노고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매너의 날로, 여성이 평소에 얼마나 치장에 힘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지를 알기위해 남성이 여장을 해보는 날인 것이다.'

 

 토니 스타크는 이렇게 말하고, 갖고 온 것들을 주섬주섬 스티브 로저스의 몸에 힘들게 걸친 후에

 

 '그리고 그 코스츔의 사진을 찍어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에게 보여주고 노고를 치하받는 걸로 4월 1일의 이벤트를 마무리하는 거지.'

 

 라고 하고 자신도 베르사체 원피스 코스츔을 하고 스티브와 함께 셀카를 찍음으로써 스티브 로저스를 완벽하게 속였다. 그리고 방금전까지 토니에게 하마터면 이런 날을 모르고 지나칠뻔한 자신을 구제해준 고마움마저 품고있던 자기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금 이렇게 차라리 쥐구멍으로 도망가고 싶어질만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대해, 스티브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크나큰 실의를 느끼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 이 나쁜놈. 이 자닌한 놈!(스티브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혀로 오는 마비를 느꼈다.) 스티브는 자신의 여장사진을 나타샤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나타샤의 변하는 표정에 의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때늦은 남자... 뒤늦은 남자... 그런 불쌍한 남자가 되었다.

 

 "...토니 스타크 내 이자식을...."

 

 "토니사진도 있어요? 아 그사람건 별로 보고싶지 않지만."

 

 스티브는 나지막하게 으르렁대며 새빨개진 얼굴위로 왼손을 들어 자신의 시선을 가린다음-마치 그렇게 하면 나타샤가 자신의 여장사진을 보고 있다는 현실이 없었던 일로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손을 뻗어 조용히 나타샤 앞에대고 흔들었다. "...이상한 거 보여줘서 정말 미안하네 냇... 그거 어서 돌려주지않겠나." 평생의 수치다. 기억에 박혀 지워지지도 않을. 더더군다나 나타샤도 이꼴을 보았다고. 스티브는 가장 큰 치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서 껴서 앞섬이 터질 것 같이 여기저기 꽈악 조여대던 드레스의 감촉을 떠올리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절개부분에 길게 옆트임이 나있던 날씬한 라인의 드레스, 그 라인 안쪽에 얌전히 있질 못해서 결국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근육투성이 왼쪽 다리에 비죽비죽 솟아있던 뻣뻣한 다리털은 또 얼마나 대단한 꼴불견이었는데. 토니 스타크가 몇번이고 셔터를 누르는 사이 심지어 등부분이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해 마지막 사진을 찍었을때엔 거의 옷이 옷의 형태가 아니기까지했다. 여성들의 노고를 이해하려다 헐크의 심정까지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단 말이야. 죽여버릴거야.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리겠어 토니 스타크.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가 토니 스타크 암살을 결심하던 그때까지도 나타샤 로마노프가 스티브의 사진을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챙기려고 하기에 스티브 로저스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타샤에게 빽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왜 날 두 번 죽이려고 하는 건가 자네에에에에에에엥에에에에ㅔㅔㅔㅔㅔㅔ.

 

 

 

 

 

 

 

 

 "큭큭큭." 랩실에 혼자 남아, 또 다른 액자에 새로 찍어온 스티브 로저스의 사진을 넣어 자신의 개인책상위에 장식하면서, 토니 스타크는 숨죽여 웃음을 흘렸다. 아 죽겠네. 진짜 죽겠어. 이건 한 방에 묵은때를 화악 벗길 수 있는 겨우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우주로 치자면 빅뱅의 수준이라고. 이 사진들 덕분에 이제 적어도 향후 십년은 웃을일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토니는 수십장이 넘는 사진들을 전부 인화하여 책상위에 펼치고는 하나하나 집어들면서 그때마다 킥킥대며 웃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다양한 어색한 웃음들을 피력하고 있었는데, 그와중에도 토니의 리퀘스트에 최대한 맞춰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포즈들이 진짜 토니에게 끊이지 않는 새로운 웃음을 더해주었다. 토니는 사진을 한장한장 펼칠때마다 마치 그전에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박장대소를 하였다. "배에 근육통 생기면 캡이 책임지기야." 토니의 혼잣말마저 다시 부활하였다.

 

 하얀 피부에 조금씩 물들어 번져가는, 연한 붉은기운의 뺨.

 귀여웠지.

 

 좀 더 보고싶다. 그런 모습. 자주자주.

 

 "...이제 그 사람도 가끔씩 내 생각 좀 하려나."

 

 토니는 사진더미속에 얼굴을 묻으며 그렇게 중얼이고는

 자신의 지나치게 사춘기 소년같은 심상을 자각하고

 픽, 하고 웃었다.

 

 토니 스타크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스티브 로저스의 지갑에 넣어둔,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가 함께 찍은 사진.

 

 그 사진을 볼때마다, 그가 나를 떠올려준다면

 

 이 불공평한 감정에도

 

 광명이 비추는 것 같을터인데.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말이야.

 

 

 

 

 

 

 - done

 

 

그날 나타샤 로마노프와 토니 스타크가 주고받은 문자.

[근데, 토니. 굳이 여장한 사진을 준 건 '내 사진 들고다니면서 종종 내 생각해줘'라고 대놓고 말하기 쑥쓰러운 것에 대한 발현인가요?]

[장난(=여장)으로 진심 얼버무리기?]

시끄러어어어어 이여자야아아아. 토니 스타크는 시뻘건 얼굴로 그렇게 아이폰을 부수었더랬다.

 

 

 

 

진짜 끗. ^0^ ㅋㅋㅋ

 

+ 세포 여장 진짜 좋아하는 거 같애요... 여장소재 미친 폭발;;; 그치만 좋은걸 어떡해 ㅎㅎㅎ

+ 근데 다 쓰고 알았는데 에이프릴 풀... 17세기부터 해왔던 역사깊은 행사더라고요? 만우절 너 이자식 제법 조상님급이더라...???;;; 쉑... 그래요 마자여 세포 무식해여... 0ㅅa0 배째주세요.... 근데 이거 미리 알았으면 스티부가 토니 만우절로 속이려고 들다가 역으로 당하는 그런 거 썼을건데 아 아쉽다 ㅎㅎㅎ 그쪽도 재밌었을 듯 ㅎㅎ 어느쪽이든 스티부 망충한 너 사랑합니다...☆

+ 트위터에서 히쿰님이 만우절 토니스팁 써달라고 해서 씁니다 ㅎㅎㅎ 세포는 쉬운 여자예요 ㅎㅎㅎㅎ 걍 옆구리 찔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ㅋㅋㅋㅋㅋㅋ 근데 히쿰님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어영 엉엉 >0< 꺄앙

 

++ 히쿰님한테 ㅠㅠㅠㅠ 그림 선물받음 ㅠㅠㅠㅠㅠㅠㅠ 세포는 성공한 덕후예요 꺄앙 >0< 으흐흐흐흐흑 행복해 ㅠㅠ 지금 이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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